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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05화 (105/108)

<-- 빗속의 여인 [完] -->

내일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려 하고 있었는데, 나는 사과나무를 심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아그니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시녀들 몇이 사형수에게 펜을 쥐어주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샬롯은 완강했다. 내가 이상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나는 샬롯의 친절에 감사했다.

그 이후, 나는 내 더러워진 드레스를 벗고 탕 속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녀들은 모두 다 심통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물의 편안함이 좋았다.

“저어, 레이디.”

내 손에 비누거품을 묻히고 있던 하녀가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제 친구 도티가, 그 증인석에 선 하녀를 잘 아는데요.”

“응.”

“분명 자살이라 했어요. 캐서린 화이트 공작부인께선 자살하셨다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탕에 손을 휘휘 저으며 물장구에 몰두했다.

“어떤 외압이 레이디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 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디가 그 날 본인에게 불리하게 발언한 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믿어요. 그리고 율러는 아직 정의가 살아숨쉬는 땅이잖아요.”

그녀는 그리고서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레이디가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제 동생 브리젯은 레이디가 훌륭한 공작부인이라고 했어요. 전하를 웃게 해주셨던 유일한 분이라고 했어요.”

“브리젯의 언니니?”

“네. 웨스트체셔 공작성에 일하고 있는 그 하녀가 제 동생이에요. 그 아이, 호들갑이 심해도 정말 좋은 애거든요. 입도 보기보다 무거워요.”

“고마워.”

그녀는 끄덕이고는 묵묵하게 내 목욕시중을 들었다. 감옥에 찌들어 있다 목욕을 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녀는 내게 정성스레 향유를 발라 주었고, 좋은 옷을 건넸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서 그녀는 나를 치장해 주었다. 눈을 뜨자 거울 뒤로 슬프게 미소짓고 있는 샬롯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지어보였다. 샬롯이 가까이 다가왔다.

“난 작별인사 하는 게 싫어, 세실리아.”

“저도 그래요.”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어.”

나는 웃었다. 그녀의 애틋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죽지 마.”

“그건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롬이 첫사랑이라고 하셨죠?”

내 말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만약 제롬 옆에 새 사람이 서게 되면 잘 대해 주세요. 아마 그 여자는 물의 언어술사일 수도 있겠죠. 그 여자라면…….”

“아, 우니베르 신이시여!”

샬롯이 탄식했다.

“그렇게 청승 떨게 뭐야. 그냥 재판 갈아엎고 조용히 살면 안 되는 건가?”

“그러려고 해 보았어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러면, 이 상황에서의 돌파구가 없을 것 같더라구요. 파멸을 이리저리 요령껏 피하다 자멸하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 모든 걸 걸고 정면으로 이겨낼 거예요.”

샬롯은 가만 입을 닫았다. 나는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운명에 맡기려고요. 저는 결정을 내렸어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내일 아시게 될 지도 몰라요, 샬롯.”

“네 뜻이 있겠지. 알았어.”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 저번에 제가 부탁드린 건…….”

“아. 물론 구해뒀어.”

그녀가 서랍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낸다.

“네가 쓸 거니?”

“일이 잘못되면요.”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받아든다. 작은 병. 그 안에는 끈적한 까만 액체가 들어 있었다. 독이었다. 아주 무시무시한 독. 한 방울 피부에 닿기만 해도 십분 안에 생명을 앗아갔다.

나는 시선을 옮겨 다시 샬롯을 보았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성공했으면 좋겠어.”

“고마워요, 샬롯.”

나는 미소로 회답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아그니스.”

나를 바라보는 내 가족, 혈육이 있다. 그녀가 내게 달려와 안긴다.

“세실리아.”

“아그니스.”

우리는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로즈블룸을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아그니스가 눈물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내가 예전에 입었던, 그 빨간 드레스. 아직도 있니?”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다. 내가 웃어보인다.

“그래. 그걸 입고 싶어. 그래야 할 것만 같아.”

“으응.”

“샬롯.”

나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샬롯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차 빌려 줄게. 갔다 와.”

“하오나, 왕세자비 전하.”

그녀의 시녀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지. 두 사람, 어서 갔다 와. 도망치면 더 좋고.”

“왕세자비 전하!”

샬롯이 깔깔 웃어보인다.

“농담이야, 농담.”

나와 샬롯의 눈이 마주친다. 나는 미소로 회답한다.

* * *

나와 아그니스는 마차를 타고 로징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징턴은 수도 근교에 가까운 작은 땅이라고 했던 말, 혹시 기억하는지. 왕궁에서 로징턴은 멀지 않았다. 그래서 도착도 금방이었다. 나는 나를 감싸는 찬란한 햇빛에 가슴이 뛰었다.

“이야,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대한 로즈블룸의 모습이 내 눈에 모두 담긴다.

“어서 올라가자.”

아그니스가 내 손을 잡았다.

“드레스 입고 보석도 고르려면.”

“그래, 좋아.”

우리는 로즈블룸의 층계를 올라 문손잡이를 턱, 턱 내리쳤다.

“누구십니까.”

“나야, 페넬로페.”

나의 목소리는 은근히 들떠 있다. 페넬로페.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던 로즈블룸의 하녀장 이름이었다. 세상에, 내 세상엔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이. 소중하고 찬란한 순간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 삶을 담보로 걸고 참 일을 크게 쳐놓기도 했구나.

그 생각을 하자 눈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페넬로페는 절대 놀라지 않는다-있는 페넬로페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지어보인다.

“세상에, 제가 죽기 전에 레이디를 다시 볼 줄 몰랐습니다.”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나와 아그니스는 그녀에게 인사하고는 천천히 층계를 오른다. 이 삐걱이는 낡은 나무 계단도 내가 정말 아꼈던 것이었다. 가슴에 햇빛이라도 든 듯 따스해진다.

그리고.

“네 방이었던 곳이야, 세실리아.”

나는 내 방을 바라본다. 내가 내 자신을 뉘었던, 나를 품어주던 내 방. 나는 미소짓는다.

“내 방이잖아.”

“네가 떠난 그대로 두었어.”

나는 아그니스를 껴안았다. 그녀가 아름다운 금빛 눈을 휘어 보였다.

방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창을 넘은 햇살이 방을 예쁜 색으로 비춰주고 있다. 내 책상, 그 위에는 쌓아올린 책 몇 권. 그리고 대충 섞여있는 서류. 고개를 돌려보면 벽면을 꽉꽉 메우고 있는 서재가 있다. 제롬의 재미없는 책이 아니라, 내 콜렉션인 책들이라니.

피식 웃음이 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면, 다른 쪽엔 내 침대.

“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뛰어든다. 폭신한 매트리스가 출렁인다.

“그렇게 좋아?”

“으아, 내 이불이다!”

나는 이불에 머리를 묻는다. 따뜻하다. 시선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그니스가 나를 보며 피식 미소짓는다. 나는 뻘쭘한 표정을 감추며 일어난다.

“그, 그냥 침대가 폭신해 보여서.”

“베개 싸움이다!”

그녀가 베개를 들고 나를 치기 시작했다.

“야, 야. 아그니스.”

그러다 베개로 한 대 더 맞았다. 나는 그만 참을 수 없어져 똑같이 베개를 들었다.

“용서할 수 없다, 이 악마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소녀때로 돌아간 것처럼 한참을 투닥였다. 배게 싸움은 내 머리 위로 아그니스가 배게를 내리쳤을 때, 하늘에 깃털이 흩날렸을 때 끝났다.

“아, 베개 터졌다.”

“하녀들의 원성이 높아지겠네. 치우려면 장난 아닌데.”

“좋아. 그럼 오늘 디저트는 글렀어. 하녀들 바쁠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눈이 마주쳐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멎었을 때는 울음을 참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해야 했다. 나는 쓸쓸하게 옷장으로 걸어갔다.

“내 드레스네.”

붉은 드레스를 꺼내 든다. 아그니스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준다.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건네 준다.

“이건…….”

“진주 목걸이야.”

그녀가 웃어 보였다.

“너는 항상 흰 진주 목걸이가 잘 어울렸어. 그 붉은 드레스에.”

“고마워.”

미소로 화답한다.

“이건, 그리고 네가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던 검.”

아그니스가 침대 밑에서 작은 검을 꺼내주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 웃어보였다.

“아, 쓸만한 붕대는 없니?”

“여기 있어.”

그녀가 내 손에 붕대를 쥐어 주었다. 나는 검과 붕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레스를 걷어올려, 내 다리에다 검집을 단단히 붕대로 고정한다.

나는 카펫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작은 병의 미니 코르크를 떼어 낸다. 아까 샬롯에게 건네받은 것이었다. 매우 강력한 독. 이 독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 독은 내 계획에 있어 중요했다.

한 손에는 검을 잡고 다른 손으로 작은 병을 기울이자, 검 위에 진득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검 위를 덮는 진액이 흘러넘쳐 카펫에 떨어진다. 카펫이 부글부글 끓으며 녹는다.

독이 말라붙기 전에, 나는 검집에 조심스레 검을 넣는다. 이것으로 준비가 된 것이었다. 나는 붕대의 매듭을 더욱 견고히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그니스를 바라본다. 아그니스가 침대로 가 앉는다. 그리고 그녀의 옆 자리를 툭툭 친다. 나는 그녀에게로 걸어가 앉는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는 나를 바라본다.

“너한테 말할 게 있어, 세실리아.”

“응? 뭔데?”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아그니스가 망설였다. 그리고 다시 어색하게 미소지어보였다.

“아, 아니야. 별 거.”

“그래. 알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미소지어보인다.

“훌륭한 기사가 되길 바래, 아그니스. 검을 준비해 줘서 고마워.”

아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너도 준비해야지. 곧 무도회인데.”

“아, 응.”

그녀가 미소지었다.

“무도회네.”

나는 그녀를 두고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멈칫 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아그니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어보인다. 나는 뒤돌아 문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문 밖에 서 있던 경비병 둘을 번갈아본다.

“왕궁으로 되돌아갈 준비 다 됐어요.”

그리고 그들에 이끌려 로즈블룸 밖으로 향했다. 왕궁에 돌아가면 제롬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그러고 보니 삶은 정말 역설적인 것 아닐까. 내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내고서야 그 곳에서 낙원을 발견하다니. 병사 한 명이 마차 문을 열어 준다. 나는 그 안에 순순히 몸을 담는다.

마차가 움직인다. 아, 나의 로즈블룸. 나는 내가 집이라고 부르던 곳에 심심한 작별 인사를 전했다.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건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내가 두 장의 편지를 받은 날, 아그니스와 대화를 나눴던 날. 그 날 아그니스를 보내고 샬롯에게 쓴 편지를 기억한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썼던 편지.

‘샬롯, 제가 아주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는데, 혹시…….’

그때처럼 독을 구해 달라고. 아마 그녀가 도운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을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에 두려움에 떨며 내일을 걱정하던 나였더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생기니 내 세상이 달라졌다.

위험을 감당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남을 위하려 하고, 이성에 부합하지 않은 일을 제멋대로 벌인다. 오직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미친 짓이었다. 애초에.

사형을 선고받고 무도회에 참석할 기회를 따내지 못했더라면?

재판이 열리는 장소가 왕궁이긴 했지만, 일이 잘못되어서 샬롯의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제롬이 내 죽음에도 동요하거나 각성하지 않는다면.

정말 감당해야할 위협이 하나둘이 아니었던 일. 하지만 그 수많은 실패를 감당하고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위험을 감당하지 않고 억지로 얻어낸 평화, 그 도망쳐 숨어버린 곳에는 내가 바라던 낙원이 없을 수도 있었기에.

그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미친 짓을 저질러 버린 것 같다.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나의 죽음인가, 영원한 평화인가.

이 극단 사이에 애매하게 선 나는 그저 한숨지을 뿐이었다. 부디 행운이 따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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