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04화 (10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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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빗속의 여인

Lady in the rain

후.

그리고

하.

심호흡. 심호흡. 심호흡. 정신이 말끔해진다. 그래, 정신이 말끔해진다. 나는 체념한 듯 미소짓는다. 오늘은 내 최후의 날이었다.

온 율러 왕국이 주목하는 ‘그’ 재판이 있는 날이요, 요나단이 그렇게 고대했을 날이었으리라. 내 마음은 이미 폭풍이 한번 쓸고 지나간 잔잔한 바다, 아무리 요나단이라도 나를 더 이상 무너트릴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설계도를 다시 한 번 복습한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파멸으로 이어질 시나리오였지만 나는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도착입니다.”

마부의 목소리.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죽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요나단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제롬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준비 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는다.

오늘은 내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날이었다.

“공작 전하, 그리고 레이디. 도착했습니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한다. 그 다음은 모든 게 빠르게 지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재판의 최종 심판을 맡은 바톨로뮤 화이트입니다. 명예로운 전 화이트 공작의 형제이자, 현 공작의 삼촌이지요. 본디 재판을 주관하는 것은 가주의 일이시지만, 이 사안은 화이트 공작부인에 대한 일이니 공정성을 위해 정당한 권리를 위임받았음을 알려드리며...."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나는 그저 관조자인 것처럼 일이 흘러간다.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가만 위를 둘러본다. 원형으로 생긴 실내, 2층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 이곳은 재판정이었다. 수많은 쌍의 호의적이지 않은 눈들.

그 사이에 요나단의 거들먹거리는 듯 한 두 눈이 있다.

‘포기해.’

그의 입이 그렇게 움직인다. 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선다.

수많은 길들 중,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사람들이 보는 나, 세실리아 화이트는 과연 제롬의 모친을 살해했는가, 아닌가.

그 둘 중 내가 고를 법한 선택지는 물론 후자.

‘살해하지 않았다.’

죽이지 않았으니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뻔하겠지. 요나단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내가 무죄라는 판결을 받으면 사람들은 그 판결을 믿지 않을 것이다.

“공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저 여자, 현 공작부인께서 공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제가 증인입니다!”

증인석의 남자가 소리쳤다. 나는 요나단을 본다. 그가 꽤나 기형적인 미소를 지어보인다. 화이트 가문 사람들이 웅성였다. 이미 그들은 내가 제롬의 어머니를 죽였다 생각하고 있다.

제롬이 해명하려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때, 내가 무죄라고 소리친다 해서 달라질 것은?

“공의 여자라 해서 감싸지 마시고 사실을 말씀해주십시오, 진실을!”

“공께선 요부에게 홀리신 것입니다. 가주께서 보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무죄를 선고받으면 사람들은 제롬이 살인자인 나를 감싼다 생각하고, 요부라는 내 악명은 높아만 갈 것이다. 그 길의 끝은 파멸이다. 요나단은 우리가 가장 약해졌을 때, 우리를 갈라놓을 것이다. 그가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요나단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팔짱을 낀 채,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요나단은 우리의 약점을 파악해 무너트리고는 그 다음에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이용해 세상을 제 편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가주께서는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특별한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전자.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된다면 제롬은 더 이상 요부에 홀려, 죄인을 감싸는 가주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 정신이라면 나를 구하려 내 목에 칼을 들이댄 요나단을 파멸시키려 할 것이다.

제롬은 지금 제 자신이 아니었고, 정신적인 각성을 통해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었다. 공허한 표정의 그. 무너져내려버린 그. 나의 사형선고는 그의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다.

두렵지 않느냐고?

나는 내가 죽는 것보다 제롬이 무너지는 게 더 무서웠다. 제롬이 약점을 잡혀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약해지는게 더 두려웠다. 미친 짓 같아보이겠지만 대비책은 있었다.

우선, 내게는 강력한 조력자가 둘이나 있다. 제롬과 샬롯.

싸늘한 공기가 맴돌고 나는 상념에서 벗어난다.

나는 1층, 가신들과 화이트 가문 어르신들의 앞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론 증인들은 내 편이 아니었다. 방금 차분한 표정의 하녀가 증인석으로 올랐다.

“하녀 앤은 우니베르 신께 맹세코 이 사람들에게 사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주근깨가 인상적인 하녀였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우리에게 네 이야기를 말해주게나.”

하녀에게 발언권을 준 노인은 바톨로뮤 화이트로, 제롬의 삼촌이었다. 제롬의 아버지의 동생. 팽팽한 공기가 장내를 긴장으로 물들였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나는 그쪽을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요나단 화이트였다. 눈이 마주치니 그가 악마처럼 미소지어보인다. 그의 옆에는 아그니스가 초조한 얼굴로 앉아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본다. 다시 요나단 화이트와 눈이 마주친다.

내가 최대한 고운 미소를 지어 회답한다. 요나단의 얼굴에 순간 당혹이 스쳤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톨로뮤 화이트를 바라본다. 하녀 앤이 입을 뗀다.

“레이디 세실리아 화이트께서 제롬 화이트 공작의 모친을 살해했다는 것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앤을 바라본다.

“……사실입니다.”

웅성임이 커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마녀다! 소리치는 사람. 그리고 입에도 담기 힘든 험한 말을 건네는 말을 하는 사람.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상이 또렷이 맺힌다.

“조용!”

바톨로뮤 화이트의 고함에 장내가 조용히 물든다.

“레이디 세실리아 화이트.”

그가 나를 본다.

“부인께서 캐서린 화이트, 전 레이디 화이트를 죽였다는 것이.”

나는 제롬을 바라본다. 그의 표정이 퍽 초조하다. 나는 그런 그에게도 웃어보인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사실입니까.”

바톨로뮤 화이트가 나를 엄격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내가 여기에서 반박한다고 어떤 것이 달라질까. 어떤 것이.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제롬의 운명의 짝이 아니어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여서. 이렇게 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신탁에 그렇게 못박혀 있다.

나는 내 스스로가 하는 경고를 뛰어넘었다.

스스로의 안전선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부인.”

바톨로뮤 화이트의 둔탁한 목소리가 내게 떨어져내린다.

“부인께서 캐서린 화이트를 죽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나는 눈을 감는다.

“사실입니다.”

뜬다. 나는 세상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제가 독살했습니다.”

나는 제롬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게 떠오른다. 그에게 다시 생기가 되돌아와 행복하다. 그는 행복해야 한다.

내가 이 계획을 실행하는 것에 실패해서 죽게 되더라도. 나 말고 다른 여자가, 물의 언어술사가 그의 옆에 서게 되더라도 괜찮다.

나의 억울한 죽음은 제롬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 줄 것이요, 제롬이 요나단의 사람을 쓸어버릴 훌륭한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운이 좋다면 나는 죽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

“더 들을 것도 없겠군요. 화이트 가문을 대표해서, 부인께 사형을 선고합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진다. 나는 떨었지만 차분했다.

“사람들에게 전할 마지막 말이라도 있습니까? 소원이라도? 그래도 공작부인이었던 사람이니 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도회.”

바톨로뮤 화이트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일 열릴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안됩니다!”

가신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하게 반발했다.

“분명 도망갈 게 뻔합니다. 지금 즉결처분해주십시오, 바톨로뮤 경.”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제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듯이, 제 아내는 어머니를 독살하지 않았습니다.”

좌중이 웅성였다.

“하녀와 사용인들 따위의 증언이, 제 아내를…….”

“본인이 자백했습니다.”

정적이 떨어지고 제롬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 무도회, 제가 에스코트하지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제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역시 그가 도와줄 줄 알았다. 나는 속으로 웃는다.

“제 아내였던 사람이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그때, 요나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로 빈정거렸다.

“무도회 정도라면 나쁘지 않죠. 공작부인이었던, 여자일텐데 말입니다.”

바톨로뮤 화이트, 가문의 어르신은 젊은 공작을 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공작 전하.”

“…….”

“그 말에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화이트 가문의 가주로서, 여기 있는 모두에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장내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제 레이디를 안전하게 에스코트 한 뒤, 그녀가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화이트 가문의 명예와, 제가 맡고 있는 공작위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윤허해 드리지요.”

“바톨로뮤 화이트 경!”

반발이 잇따랐지만, 바톨로뮤 화이트는 단호했다.

“내 결정은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궁 재판정 지하에 있는 감방에 가두어졌다. 차가운 바닥에 나를 뉘었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첫 단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뭐,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연많은 여자가 되긴 했지만. 나는 피식 웃다 상념에 잠긴다.

햇빛.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이 찬란하다. 슬픔에 잠기려 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안 됩니다, 전하.”

“내 아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나는 창살 너머.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제롬을 본다. 물끄러미 창을 넘은 시선. 그리고 그의 당혹스러운 눈빛이 만난다.

“세실리아.”

그가 감옥의 창살을 잡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바깥에서 넘어들어오는 햇빛마치 웃었다.

“제롬.”

“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압니다. 제발, 제발.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말을 해 보십시오. 당신이 하지 않았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이었을지도요.”

나는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보았다.

“신탁이…….”

“빌어먹을 신탁 따위가 뭐라 하던 전 상관없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제발.”

그가 애걸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발,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괜찮아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행복하세요, 제롬.”

그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뒤늦게 대동되어온 왕실 기사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이끌려 감옥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고개를 들어 감옥 벽면에 파여있는 작은 창을 바라본다. 봄이 지나가고 있다. 햇빛이 묻어 내려온다.

눈을 감는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 * *

내일 하루는 너무나도 금방 찾아왔다.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참석하고 싶다던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근위병들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다.

“야, 일어나.”

기사 한명이 나를 발로 툭툭 쳤다. 사형수에 대한 취급은 내가 아무리 레이디라도 좋지 못했다. 아, 이제 레이디도 아닌 건가. 나는 실소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 세이지 궁으로 향했다. 나를 맞이한 것은 왕세자비 샬롯이었다. 샬롯은 나를 발견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침묵했다.

“안녕하세요, 샬롯. 오랜만이죠.”

나는 부러 시원하게 말했다. 샬롯은 그저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꼭 껴안았다.

“왜 그랬어.”

“샤, 샬롯. 저 지금 상당히 꼬질꼬질한데.”

“왜 그랬지? 이 순둥이 아가씨가.”

그녀가 나를 떼어놓고는 눈물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 그러게요. 제가 왜 그런 독살같은 멍청한…….”

“그거 말고 증언 말이야! 네가 그 여자 안 죽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아, 그거요.”

“너 죽어. 그러다가. 빨리 가서…….”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오늘이 무도회죠?”

샬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살고 싶은 생각이 없구나? 너.”

“언젠가 제게 훌륭한 선생님이 말씀해주셨거든요. 소문이 사실인지, 가짜인지는 세상한테 중요한 거가 아니라고요.”

“스스로한테 그런 악수를 둔 이유가 뭐지?”

샬롯이 타박하듯 물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

“목숨을 걸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까 치장하는 거, 도와주세요. 샬롯.”

샬롯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미소로 화답한다.

“오늘 밤이 무도회니까요.”

내 최후의 모습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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