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01화 (101/108)

<-- 집에 원수를 들였다 -->

“그래요.”

나는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긴장은 늦추지 않은 채로. 요나단에게서 뒷걸음질치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아름답게 웃어보였다. 촛불이 흔들릴때마다 그의 얼굴을 담는 빛의 방향이 수시로 변한다. 어둠 속의 그는 소름끼치게 아름다웠다.

“해 봐.”

자칫 오만해 보일 수 있는 목소리. 그는 그가 현재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머리가 그만 얼어붙은 것 같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온다.

“다, 당신이 사교계에 말도 안 돼는 헛소문을 풀었다는 걸 들었어요.”

“아?”

그 사람이 그리고 피식 미소지었다.

“푼 게 많아서 뭐가, 뭐인지도 기억이 안 나네? 뭐였더라? 너는 네 동생을 미치게 한 불세출의 요부라는 거였나. 네가 그 자리에 앉기 위해 방해되는 내 어머니를 죽였다는 거였나.”

“요나단 화이트 경!”

“야.”

그가 내게 훅 고개를 들이밀었다. 끔찍한, 역겨운 술내음이 코로 밀려든다.

“나는 네가 여태껏 상대해왔던 수준낮은 또라이들이랑은 달라.”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부술 거야. 첫 번째는 사회적으로 널 매장시킬 거고, 두 번째는.”

그의 눈은 황홀경이었다. 나는 그만 숨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저 남자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당혹스럽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그때, 그가 내 손목을 잡는다.

“내 동생이 널 죽이게 할 거야. 내가 만든 무대 위에서, 세상에서 가장 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겠지, 넌.”

“지금 그게 무슨.”

“……아, 모르겠니? 난 네가 싫어. 처음 널 볼 때부터 싫었어.”

“내가 당신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죠?”

손이 떨린다. 시선이 흔들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요나단에게 잡힌 내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자 그가 역겹다는 듯 내 손을 거칠게 놓아주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잔혹하게 휘어졌다.

“네 잘못은 아니야. 아니지. 아, 하나 있다면 조금 지랄맞은 남편을 둔 거 아닐까?”

“뭐요?”

“내 동생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을 때, 그 인간한테 말했어. 네가 가장 행복한 순간, 네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부수러 오겠다고. 그래서 그저 재미 좀 보려는 것 뿐이야.”

“……제롬이 당신이 그러게 둘 것 같아요?”

“응.”

요나단이 미소지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정적을 지키다 내 턱을 움켜쥐었다.

“그 감정 없는 괴물 같았던 놈이. 너를 보면 얼굴을 붉히고 웃어. 그래, 그 놈의 첫 사랑이더지 네가. 내 동생은 너한테 어떻게 그렇게 빠지게 된 걸까? 어디가 좋아서?”

그가 내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본다. 아팠다.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나랑 그 인간을 구원하라고 하늘이 내려다보낸 천사는 없고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거지? 그리고 뭐? 듣자 하니 너는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려고 했다며. 네 주제에.”

내 치부였다. 그에게 할 말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그가 내 어깨를 잡아누르며 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잔혹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뭐, 그래도 네가 완전히 구제불능은 아니겠어. 네가 물의 언어술사는 아니더라도 더 적합한 용법에 맞게 너를 써버릴 방법이 떠올랐다니까?”

밀어낼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제물이야. 제물.”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불의 신에게 바친다면, 가장 강력한 힘으로 보답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어라?”

그가 낮게 웃었다.

“여기 훌륭한 제물이 있잖아? 세상에. 너무 훌륭해.”

“…….”

“네가 없어진다면 내 동생놈도 불행해해 할 게 틀림없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그 비극이 가져올 파괴력은 정말 어마무지할 거야. 화염의 힘은 절대 배반하지 않으니까.”

“놓으세요!”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절…불에 태워 죽이실 건가요?”

그의 얼굴이 순간 꿈틀댔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주춤했다. 그가 그 말을 듣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움찔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좋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되었다. 내 행방을 하는 하녀가 있으니 제롬이 곧 올 것이…….

쾅.

나는 몸을 움츠렸다. 벽을 짚고 있는 요나단이 씨익 미소지었다.

“다른 생각 하면 안 되지.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데.”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눈 앞의 남자는 진심으로 미쳤다.

“너를 죽일 거라면 기회는 많았어. 지금까지 쭈욱.”

그가 공허한 눈빛에 나를 담았다. 다리가 마비된 것만 같다. 뒷걸음질쳐봐야 차가운 벽이 등 뒤로 닿는다. 나는 숨이 그저 턱 막혔다. 그가 입을 째며 미소했다. 소름끼치게 아름답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한 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손이 내 뺨에 와 닿는다. 나는 벽을 짚는다. 조심스레, 조심스레. 내 손이 벽의 차가운 면에 닿는다. 나는 벽을 더듬는다.

“널 망가트리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야.”

“…….”

“난 내 동생의 손으로 직접 너를 없애게 할 거고. 그 다음에는 내 동생이 불행으로, 그리고 흘러넘치는 힘으로 이 나라에 파멸을 가져오는 걸 지켜볼거야.”

“그, 그런게 가능할 리가…….”

“지켜봐. 내가 못하는지.”

그때, 철크덕. 문손잡이가 잡혔다. 문이 열리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환한 복도로 뛰었다. 미친 듯이, 정신을 내려놓고 뛴 것 같았다. 눈물이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쿵. 사람과 부딪혀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내가 소리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본다.

“세실리아.”

제롬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한다. 그의 다리를 붙잡고 운다.

“요나단.”

그가 짓씹는다. 나는 그렇게 바닥에 무너져 내린다.

* * *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제롬의 방에 있었다. 제롬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제롬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정신이 몇 차례 희미해지다 되돌아온 것이었다. 눈을 깜박인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과호흡이 왔다. 나는 제롬의 셔츠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붙잡고 있었다. 제롬은 나를 꼭 껴안고는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무서웠다. 무서웠다. 무서웠다. 다시 돌이켜 생각할수록 두려움이 부피를 늘려간다.

그 공허한. 겨울 숲 같은 눈동자를 당신은 보지 못했겠지. 노아의 눈빛에는 열정이, 마르사의 눈동자에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의, 요나단의 눈빛은 달랐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공허함 속에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듯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이 나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정신이 다시 흐려진다. 제롬이 나를 다시 꼭 안아준다.

“세실리아,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다, 당신이 옳았어요.”

한없이 약해진다.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 사람, 당신의 형은 되돌아왔어요. 당신이 아끼는 그 단 하나를 망가트려 부숴 없애기 위해 왔어요.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제롬. 그는, 그는 나를…….”

“세실리아.”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괜찮을 거라고 맹세하겠습니다.”

손이 떨린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그의 방에 있었다. 그의 침대에.

시간은 많이 흐른 것 같았는데 바뀐 것은 없다. 이불 속에 파묻혀 시트에서 그의 미약한 체향을 느낀다. 흐르던 눈물은 마른지 오래. 나는 한없이 나약한 기분이 들었다. 이불 속에서 머리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본다. 온통 천이다. 천. 그리고 그 캐노피 천 속에 둘러싸인 나는 암흑에 파묻혀 숨을 고른다.

그때,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이다. 괜찮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괜찮다고. 나는 제롬의 침대 위, 안전한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라는 방패는 절대적이다.

“아아, 동생아. 불렀어?”

“형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숨을 죽인다.

“율러 왕국에 떠도는 쓸데없는 소문을 형님께서 모르시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만.”

“나는 모르겠는데.”

보고 있지 않아도 요나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소문일……. 큭.”

목소리가 끊겼다. 내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개수작 마십시오.”

“이제 네 형한테도 이렇게 짓궂게, 구는, 구나.”

요나단의 기분나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좋아. 그 미소. 계속 지어.”

그리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제롬이 요나단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 같았다. 기척.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네 여자 데리고 조금 장난쳤더니, 벌써부터 눈 돌아가는 게 아주 장관이잖아?”

“형님.”

“근데 이게, 시작이야. 난 절대로 안 멈춰.”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들린다. 아, 아으으. 사내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숨을 쉬는 법도 잊고 이불 속에서 떨었다. 신음소리가 요나단의 것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침실에 네 기사들도 숨겨놓은 모양이……. 앗, 아야. 제롬. 네 자객들한테 이 기분 나쁜 칼좀 치워 달라고 하면 안 돼니?”

그리고 광기어린 웃음소리. 요나단의 것이다. 다시 금속성이 들린다.

“야, 나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와. 진짜?”

침묵이 맴돌았다.

“여자 하나로 형에게 칼을 겨눈 제롬 화이트. 이거 정말 황색 일보를 훌륭하게 장식하겠는데?”

“형님.”

“목에 난 이 상처는 영광의 상흔으로 여기겠어. 아이, 소중해라. 귀부인들은 이런 상처에 뻑간단 말이야. 응? 멋있다나, 뭐라나. 이번 상처는 뭐라고 이름지어야…….”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나는 입을 틀어막는다.

“그 잘난 얼굴에 난 상처에도 붙일 이름을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아, 좋아.”

또 요나단의 웃음소리.

“역시 내 동생이잖아. 내가 심심할 건 알고 일거리를 항상 늘려준다니까.”

“당신은 돌아오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 하게. 나 죽이게? 아아. 좋지 않은 그림이야, 제롬. 아버지는 훌륭한 수가 아니었다고 말하겠…….”

또 둔탁한 소리. 이번에는 침묵이다.

“아주 때려서 죽이겠다?”

착 가라앉은 요나단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제롬의 것일 것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죽여. 그럼.”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네 여자는 네 어머니 뿐만 아니라 형도 잡아먹은 요부가 되는 거야.”

“당치도 않는 소리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될 거 같아?”

그리고 악마같은 웃음소리. 또 요나단의 것이다.

“유서를 숨겨놨어. 네가 모를 어딘가에. 안전한 곳에. 그 유서는 내가 죽으면 정확히 하루 뒤에 세상에 드러날 거야. 그 유서에 뭐라 적혀 있게?”

침묵.

“나를 죽인 것은 세실리아 화이……. 윽.”

둔탁한 소리. 그리고 거친 숨소리.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 미쳤다. 광기다.

“저한테, 제 아내에게 왜 그러는 겁니까.”

제롬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그런 빛을 띤다는 건 내가 그를 만나고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요나단의 것인 것 같은 기침소리가 이어진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쉬워. 간단해.”

“…….”

“네놈이 미치는 걸 보고 싶어서야. 응? 좋은 시절 다 어디로 갔니, 동생아. 네가 살인귀처럼 디어뮈르 전쟁을 누비며 승리를 가져왔을 때를 기억해.”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네 숙명인걸?”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그게 네 숙명이야.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너는 너야. 악귀 그 자체. 그리고 화이트 가문의 저주받은 괴물! 역겨운, 역겨운 살인귀! 정신차려.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고 있잖아, 너는.”

한참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디어뮈르 전쟁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제롬을 기억한다. 오스카가 식사를 하며 그 얘기를 꺼낼 때 제롬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걸어갔었지, 그 사람이. 그는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트라우마. 그런 그의 심각한 정신적 외상. 내가 보는 그는 그 기억을 겨우내 덮어내고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한 나약한 개인이었다. 밑동이 깨진 유리병이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의 역린에 소금을 뿌리며 조롱한다.

육체에 난 상처만이 덧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굳이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보란 듯이 제 언어라는 비수로 상처를 헤집는다.

그, 요나단 화이트는 정말로 악마였다.

어깨를 툭툭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발걸음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캐노피를 걷어 바깥으로 나선다. 제롬이 열린 문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서있다.

무언가가 많이 잘못되고 있었다. 어긋나고 있었다.

세상에, 그리고 나는 이 비극을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내 온 몸의 세포가 내게 경고했을 정도로, 이 순간은 내게 선명했다.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발코니의 커튼, 멍하니 죽은 듯 서있는 제롬, 그런 그를 살펴보는 나. 요나단은 아마 이 순간을 예측했으리라.

벌써부터 그가 승기를 쥐고 있었다. 나는 한없는 절망감의 늪에 곤두박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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