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9화 (99/108)

<-- 집에 원수를 들였다 -->

물론 제롬은 밤중에 찾아온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녕, 동생아.”

아이작 경이 나에게 친한 척 기댔다. 문턱 뒤에 있던 제롬은 아이작 경을 혐오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나는 제롬의 얼굴을 조심스레 뜯어보았다.

최근 잘 자지 못한 것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는지, 지금 그의 모습은 피로해 보이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피로로 공허한 눈빛, 그리고 무뚝뚝한 표정. 아마도 지금 이방인이 찾아오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때였을지도 모른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제롬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둘을 번갈아보았다.

“제롬, 아이작 경을 아세요?”

“아이작?”

제롬이 당치도 않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지금이 제 형님을 소개시켜드릴 나쁜 시간은 아닌 듯 하니.”

제롬이 나를 끌어당겨 그의 옆에 두었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대었다.

“저 쪽은 제 형이자, 화이트 가문의 장남. 요나단 화이트입니다.”

“어쩐지!”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작, 아니 요나단 경을 뜯어보았다. 저 찬란한 골든블론드, 그리고 푸른 눈동자의 빛이 제롬과 닮았다. 하지만 두 형제는 그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제롬이 절제된 인상의 신사라고 하면 요나단은 화려한 인상의 미청년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머리카락만 해도 그렇다. 제롬은 단정한 직모이고 요나단은 화려한 곱슬머리다.

“그럼 다시 인사드려야겠네요. 저는 제롬의 아내에요. 세실리아 화이트.”

“압니다.”

요나단이 쓰게 웃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썽 피우려면 좋은 때가 아니니까, 일찍이 다시 카사로로 꺼져.”

제롬이 낮은 목소리로 응수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져 나는 제롬의 팔을 잡았다.

“제, 제롬. 그래도 아이작, 아니 요나단 경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오늘 축제에도 재미있는 곳도 많이 소개해 주셨고…….”

“저 남자랑 오늘 하루종일 있었던 겁니까?”

그때, 요나단이 끼어들었다.

“하루 더 있었으면 진짜 꼬실 수도 있었을 텐데.”

“뚫린 입이라고 제멋대로 지껄이십니다.”

“오해에요, 제롬!”

내 말에 제롬이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아그니스도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요나단 경께서는 아그니스의 에스코트였는걸요.”

“그러면 레이디의 에스코트는 누구였습니까.”

“없었어요. 혼자였죠. 게다가…….”

“거짓말.”

나는 놀라 요나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왜 나랑 오늘 재미있게 놀았다고 말을 못해?”

“요나단 경!”

“우리 춤도 같이 췄잖아.”

멍해졌다. 턱이 떨렸다. 나는 제롬의 소매를 잡았다.

“이 사람이 거짓말 하는 거예요, 제롬. 제가 어떻게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과 하루를 보내겠어요? 이 사람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아그니스를 아름답다 칭송하던 남자였어요.”

제롬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요나단을 쏘아보았다.

“레이디, 제 형을 용서하십시오. 저 쓸모없는 혀를 놀려 하는 것이 거짓말뿐인 사내라.”

요나단은 우리 둘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그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싫었다. 그는 마치 나와 제롬의 사이를 시험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깊은지. 그의 눈빛이 반짝인다.

“원하는 게 뭡니까, 형님.”

“방 하나.”

그가 제롬을 밀어내고는 스스로를 성 안으로 들였다.

“여관 갈 돈 없어. 재워줘.”

“싫습니다. 어서 카사로로 돌아가십시오.”

“아, 물론 네가 말하지 않아도 카사로로 돌아갈 거야.”

요나단의 말에 제롬이 마땅찮다는 듯 눈썹 한쪽을 들어올렸다.

“용건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으럼.”

요나단이 기지개를 켰다.

“이 숙녀분 말대로 말이야, 내가 관심이 가는 레이디가 생겼거든.”

“아그니스는 안 돼요!”

“아니.”

그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건 레이디가 정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 아그니스는 곧 이 곳을 떠날 거라 했어요. 율러를.”

요나단이 허리를 숙여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코 앞에 바로 그의 뺀질거리는 미소가 있었다.

“슐츠 가의 그 무도회 전에는 아니야. 내가 물어봤거든.”

그가 눈을 곱게 휘어보였다. 제롬이 내 앞을 막아섰다.

“어쨌든 안 됩니다. 나가십시오.”

“나는 화이트야. 이 집에서 나고 자랐어. 나는 이 집에 머물 권리가 있어.”

“이젠 없습니다.”

제롬이 쏘아붙였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제롬의 어깨 너머로 요나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롬.”

제롬 옆에 섰다. 제롬이 나를 바라보았다.

“요나단 경은 제롬의 형이에요.”

“……세실리아.”

“요즘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형제끼리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될 거에요.”

나와 카밀리아처럼, 제롬과 요나단은 이런 때일수록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제롬의 모친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요나단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요나단을 걱정하고 있었다.

“네 부인 말 들어, 제롬. 난 네 혈육이야. 형이라고.”

요나단은 눈까지 촉촉하게 적시며 호소하고 있었다.

“네가 나를 내쫓으면 난 갈 곳이 없어.”

“제롬…….”

나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요나단을 차갑게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무도회.”

“…….”

“이번 무도회까지입니다. 그 뒤로는 카사로 제국으로 다시 떠나시는 겁니다.”

“그래. 고마워.”

요나단이 입을 찢으며 크게 미소했다.

“고마워.”

그는 휘파람을 부르며 층계참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제롬은 하녀를 시켜 요나단에게 방을 주라는 명을 남기고는 다시 침묵했다.

“제롬.”

그가 나를 본다. 나는 그의 목에 내 팔을 감는다.

“그렇게 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나를 꼭 껴안는다. 놓지 않을 거라는 듯 강한 두 팔이 내 등을 감싼다.

그날 밤이었다. 나와 제롬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나를 안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제롬의 큰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쓴다. 나는 그가 주는 이런 안락함에 취한다.

“요나단은 당신의 동정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스며든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제롬의 형제에요. 형제를 이런 밤에 내칠 수는 없어요.”

“세실리아.”

그가 내 턱을 어루만지고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그는 제 몫의 재산을 모두 술과 여자에 탕진하고는 사람들에게 제 비극을 팔아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중년의 귀부인들께 말입니다. 유학을 떠난다는 명목으로 카사로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도 그의 행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제롬의 품에 머리를 부비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사람은 두 번째 기회를 받아 마땅하니까요.”

“세실리아는 그를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을 카사로 제국으로 보내지 마세요, 제롬. 율러가 그 사람의 고향이에요.”

그의 뺨을 쓸며 그를 안심시킨다. 그는 내 손길에 천천히 눈을 감는다.

“게다가 그는 화이트잖아요. 이 가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텐데, 기밀까지도. 그런 정보가 카사로 제국으로 흘러들어가면 곤란하잖아요.”

“그런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레이디. 그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게 아직까지도 율러 왕국이 건재한 이유이겠지요.”

나는 한숨을 쉰다. 그는 한 마디도 져 주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족이에요. 그리고 제롬이 힘들어하는 만큼 그 마음의 고통을 요나단 경과 나눴으면 해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요.”

“세실리.”

제롬이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 가족은 이제 당신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요.”

“요나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다면 제가 또 뭐라 말할 수 있겠어요.”

그의 가족사에 너무 깊게 파고드는 것은 역시 실례였으려나. 나는 눈을 감았다.

“주무십시오, 세실리.”

“네. 제롬도요.”

나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어둠 속에 내 자신을 내려놓았다. 잠이 왔다.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멋진 오후에 한 편지가 왔다. 율리아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녀는 샬롯의 도움을 받아 험프리 백작과의 약혼 파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험프리 백작을 위해서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고로 행복할 자신 또한 없었다고.

하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전해준.

“……말도 안 돼.”

요즘 사교계에 떠도는 한 소문이었다.

편지를 받은 똑같은 날, 나는 내 가정교사 소피아 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했다. 마차를 타고 가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소문의 출처는 어디인지, 또 그런 끔찍한 소문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가장 끔찍한 부분이었다.

그런 소문이 바깥에 깔려 있다는데 나가는 게 무서웠다. 제롬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아마 모를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여태까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힘들어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이 소문에 대해 모를 것이 분명했다.

마차에서 내려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아 방으로 안내받았다. 손이 떨렸다. 문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나왔기에 나는 경청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소피아 부인은 괜찮으세요? 그런 여자를 이곳에 초대하다니 제정신인가요?’

‘내가 믿는 사람입니다, 델라스 부인.’

‘하지만 그 여자는 요녀가 맞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쉬잇. 그녀도 이 파티에 초대받았다고요.’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여러 쌍의 눈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레이디 세실리아.”

소피아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정말 먼 길을 하셨겠군요.”

“소피아 부인.”

나는 예를 차리고 자리에 가 앉았다. 남작부인부터 후작부인까지. 정말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했다. 찻잔을 집어드는 내 손이 요동친다. 나는 그래서 테이블보 밑에 내 손을 감추고 태연히 미소지었다.

“반갑습니다. 세실리아 화이트입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찻잔을 바라보거나 시선을 피했다.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요즘 사교계에 저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는데요.”

목청을 고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귀부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중 입술이 유난히 붉은 부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인가요? 그…레이디께서. 그러니까.”

“저는 제롬의 어머니를 독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부인들이 웅성였다. 서로의 귀에 말을 속닥이고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까 그 부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요나단 화이트 경께서는 레이디가 그랬다고 하셨어요.”

쿵. 무언가가 마음 속에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네?”

“요나단 경께서 말하시길, 당신이 화이트 부인을 독살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럼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갓 화이트 가문에 들어간, 요부라고 불리는 당신의 말일까. 아니면 화이트 가문의 장남의 말일까. 생각해보세요.”

나는 멍하니 테이블 위 차를 바라보았다. 소피아 부인의 점잖은 말이 이어졌다.

“아직 속단하기 이릅니다. 재판을 통해 참거짓이 가려질 것이니 기다리시죠.”

“재판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피아 부인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모든 순간이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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