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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96화 (9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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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 화이트

캐서린 로레이나 화이트.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요나단조차 묘비에 적힌 제 어미의 이름을 보고서야 그것이 제가 어머니라고 부르던 사람의 이름이었구나 했다.

그래. 비가 왔다. 그녀가 죽은 뒤로 15일이나 되어서야 요나단은 소식을 듣고 발리타로크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비가 내렸다. 비가 죽을 듯이 퍼부어, 그의 후드를 적시고, 그리고 구두에 부서졌으며 그는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왔다.

그의 눈에서 쏟아져내리는 그 뜨거운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다.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속에서 속절없이 쓰나미처럼 밀려나오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요나단은 아랫입술이 푸르게 질릴 때 까지 제 이로 그것을 짓물었다. 하지만 새어나오는 흐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의 어머니였다.

요나단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내렸다. 비참했다. 어디서부터 비참한 걸까. 제 동생이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와 저를 성에서 쫓아냈을 때였을까.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길거리에서 전해 듣고는 술에 취해 일주일 동안을 쓰레기더미 속에서 누워 있었을 때였을까.

그의 어머니, 레이디 케서린 화이트는 독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어느 좋은 날에. 제 동생이자 혈육이 새 신부를 맞은 날에. 그녀의 차가운 주검, 얼굴에 걸린 미소는 너무나도 평온했다고 한다. 마치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한참동안을 묘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어릴 적이 기억이 났다. 기분 나쁜 감상이 밀려들어온다.

저에게 항상 칭찬을 퍼부어대던 검술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먹어서 얼굴엔 기름기가 돌았고, 수염은 덥수룩했었다. 그리고 그는 요나단이 진심으로 동경하고 존경하던 기사였다.

저가 일곱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날도 검술 선생의 칭찬을 많이 받아, 그는 우쭐해져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유모가 해놓았을 간식을 떠올리며 복도를 걸었다.

그때, 먼발치에서 제 검술 선생을 발견하고는 그는 기둥 뒤에 숨었다. 그의 스승님은 여러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는데, 요나단은 눈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었다.

‘……요나단 화이트 경도 물론 뛰어난 기사이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소공의 동생, 제롬 화이트 경에는 비할 바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 딱합니다. 소공께서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쉬이, 목소리를 낮추시오, 경. 로드께서 들으면 진노하실 겁니다.’

그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흩어졌다. 요나단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 동생은 저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겠구나. 그는 한동안 그 곳에 서 멍하니 제 스승이 서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돌았다.

제 동생 제롬은 태어날 때부터 천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라고 주목을 받은 쪽은 요나단 자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제롬은 비상한 머리와 수많은 독서를 통해 축적한 지식으로 저에게 유리한 판을 짜나갔다. 그리고 그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사소한 일에도 열성이었다. 제 자신을 갈아넣으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갔다. 요나단은 그를 관찰했기에, 이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요나단은 그만큼의 노력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제롬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가야 하는, 보장 된 미래가 없는 공작가의 관심받지 못하는 차남이었다. 그리고 요나단 자신은 미래가 창창한 공작가의 장남이었다. 모두의 관심을 받는 화이트 가문의 유망주.

그 알 수 없는 이상한 역학관계가 완전한 전환점을 맞은 것은 요나단의 열다섯 번째 생일날이었다. 요나단은 제 생일 축하 파티에 제롬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제 동생이 며칠 전부터 끙끙 앓긴 했지.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몰랐고, 관심도 갖지 않았지만. 요나단은 궁금했다. 그래서 제롬의 방에 가 보았다.

하지만 분명 제롬이 누워있어야 할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끈질기게 사용인들에게 물어 제롬이 말을 타고 어디론가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제롬의 행방을 쫓았다. 그리고 요나단은 어느 숲으로 향했다. 숲을 한참을 떠돌다가 그는 제롬을 발견했다. 제롬은 그야말로 불로 동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사냥. 화이트 가문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여섯 달에 한번 쯤은 불의 힘을 폭발시켜서 승화해야 했고,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불의 힘을 다루는 화이트 가문 가주들에겐 일상이었다. 그런데.

‘제롬이 불의 언어도 구사할 수 있었었나?’

몰랐다. 제롬은 그렇다면, 여태껏 그 사실을 아버지, 그리고 형인 저에게까지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요나단은 제 동생이 만들어낸 불꽃에 매료되어 그의 동생을 지켜보았다.

그의 동생은 천재였다. 아니, 천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는 화염의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였다. 요나단은 그게 제 동생이라는 것에 신이 났다. 저의 언어술은 겨우 담뱃불이나 붙일 정도로 미미했지만, 제롬의 능력은 아버지의 불꽃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리고 강력했다.

‘대단해.’

요나단은 읊조렸다. 하지만 제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차가운 달 아래, 숲에서 제롬은 서늘한 눈빛으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요나단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께 알리면 안 된다니? 넌 천재야, 제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거야. 여태껏 왜 네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난 몰랐잖아. 내 능력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불이었고, 강력한…….’

‘그래서 안 된다는 겁니다.’

요나단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언젠간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말을 타고 저에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요나단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뒤로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디어뮈르 전투. 그의 승리.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바뀐 세계의 전세. 그리고…….

요나단은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제 어머니의 묘 앞에서 흐느낀다.

어머니가 옳았다.

제롬은 괴물이었다.

제롬 제 동생은,

저들의 행복을 먹고 사는 괴물이었다. 그도 똑같은 불행을 맛봐야 했다.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요나단은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는 입 안에 술을 털어넣었다. 비오는 밤. 그것도 주말의.

이런 날, 이런 낡아빠진 주점에서 술 마시는 인간들이라면 처지는 다 저와 다를 것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저와 같은 하찮은 사람들의 존재가 그의 감정에 심심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요나단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실소했다.

“당신은 여기 왜 왔수.”

요나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대머리에, 하나로 이어진 듯한 눈썹. 그리고 수염은 온통 술으로 젖어 흥건하다. 요나단은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유감이군. 내 어머니는 잘 살아 계시나 모르겠는디.”

“잘 모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거더라고. 사람 인생은.”

“사인이 뭐였슈.”

“자살.”

요나단이 그 뒤로 두어번 기침했다. 손에 묽은 가래가 묻어나온다. 그는 그것을 대충 테이블 밑에 닦고는 책상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독이 든 와인을 마시고는 죽었다지.”

“사는 게.”

요나단은 눈을 떠 상대방을 본다. 그는 책상에 놓인 빈 맥주잔을 보고 상념에 젖어 있다.

“참 이렇게 찌질하고 구릴 때도 있나 봅디다.”

요나단은 피식 웃는다. 그러게, 명색이 공작가 장남인데 처지 하고는.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들이 집을 나갔슈.”

“집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굳이 묻지 않기로 한다. 사내는 요나단을 돌아본다.

“나리께서는 이곳에 있을 분이 아닌 것 같수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수?”

“…….”

“그랴. 내 묻지 않겠수. 이런 날에는 그래도 술이 제격이라.”

요나단은 손을 들어 늙은 바텐더에게 말한다.

“밀주 더 줘.”

바텐더는 말없이 낡은 컵들에 밀주를 채워 두 사람에게 건넸다.

“건배.”

두 사람은 잔을 맞부딪히고서는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켰다.

* * *

“화이트!”

요나단은 정신을 차려, 흐린 시야로 문 쪽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아. 그는 피식 웃었다. 익숙한 인영이 비를 배경으로 한 채, 열린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는 새벽이었다. 요나단은 힘없는 손을 들어올려 인영을 가리켰다.

“야, 이거. 서, 서덴베르크 황태자 전하 아니십니까.”

요나단은 트림을 하고서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킬킬 웃어댔다.

“물의 언어술산가 뭔가를 찾는다고, 온 깨방정을 떨어 놓으시고는. 이렇게 쪼올-딱 망해서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 나를 또 찾아오셨나.”

“아직 그래도 입은 살아 있는걸 보아하니 죽으려면 한참 멀었군.”

요나단이 피식 웃었다.

“말하는 거 하고는.”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 세드릭 서덴베르크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천천히 요나단이 늘어져 있는 롱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으윽.”

“야. 이렇게 보니까, 네가 세 개로 보인다.”

야하. 요나단은 읊조리고는 흔들리는 손으로 서덴베르크를 가리켰다.

“골때리는 황태자가 셋이라니. 젠장할, 카사로 제국도 이제 망했군.”

“정신이 흐릿해도 독설 퍼부을 정신은 있나봐?”

서덴베르크는 깔끔히 응수하고는 바텐더에게 와인 한 잔을 부탁했다.

“야. 너 왜 나 쫓아다니냐, 귀찮게.”

요나단은 건조하게 응수했다. 서덴베르크는 와인을 받아 마시고는 크으-감탄했다. 그는 와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요나단을 바라보았다. 몇 달 씻지 않아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악취가 굉장했다. 요나단이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말을 쏟아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때가 묻고 진흙탕에서 굴러도 요나단은 요나단이었다. 그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서덴베르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에 몸서리치며 와인을 마셨다.

“이제 미치기까지 했군.”

“미안, 난 여자가 좋아.”

“마찬가지다.”

요나단이 피식 웃었다.

“우리 인생 참 구리지 않냐?”

“우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

“불쾌하니 앞으로 나와 너를 ‘우리’ 라고 엮지 말도록.”

그는 와인을 마셨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 혈맥 속으로 알코올이 온통 퍼져나가 기분이 알싸해진다. 그는 계속해서 와인을 마신다. 몸이 뜨뜻해져 좋다.

서늘한 빗내음이 실내로 밀려들어온다. 비는 추적거리며 내린다. 빗소리가 서정적이다.

“야.”

서덴베르크는 고개를 돌려, 롱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늘어진 요나단을 바라본다.

“넌 좋은 황제가 될 거야.”

“이제 저주라도 하는 건가?”

“아니.”

요나단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렇게 열심히 물의 언어술사, 물의 언어술사. 네 나라 하나 지키려고 발로 뛰는 게 참 기특해서. 사람들은 몰라줘도 나는 네가 얼마나 절박한 지는 최소한 알겠다, 야.”

요나단은 떨리는 손을 들어 서덴베르크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황제 되면 나 좋은 자리 하나만 소개해줘. 네 덕 좀 보자.”

“안 그래도 그래서 찾아왔다.”

“뭐?”

요나단이 몸을 일으켜 서덴베르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강경했다.

“그래, 네 말대로 물의 언어술사는 없겠지만. 나는 네 냉소와, 직설적인 언행이 마음에 든다. 네 능력은 네 말대로, 네 동생의 것과 비하면 한미하겠지만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나쁜 새끼.”

요나단은 웃으며 서덴베르크의 등을 퍽 쳤다. 꽤 힘이 들어갔는지 서덴베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율러의 국보급 인재를 모셔가면서 ‘물론 네 동생보단 능력이 한미하지만’ 은 뭐냐? 황제가 될 사람이 인재를 홀리는 능력이 돌보다도 없어요.”

“……최소 공작 자리, 그리고 영토. 성과 예쁜 아내도 얻어 주지.”

“좋아.”

요나단이 낡은 책상을 내려다보고 클클 웃었다.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아야지.”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모습을 보여줬어야 됐는데.”

요나단은 한참동안이나 빈 컵을 내려다보고 침묵했다. 서덴베르크는 어찌 할지 모르다가, 어색하게 목청을 고르고. 또 아랫입술을 깨물다 손을 올려 서툴게 요나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유감이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간 같이 다니며 정이 들었던 모양인가. 같이 속이 쓰렸다.

“진심이다.”

“알아.”

요나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네놈 고지식하고 옳은 말만 하는 건 늘 알지.”

빗소리가 울려퍼지고, 천둥이 쳤다. 요나단은 천천히 서덴베르크 황태자를 바라본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

번쩍. 번개가 쳐 시야가 순간 하얘졌다 다시 돌아온다. 천둥소리가 이어진다.

“난 새 공작부인을 죽일 거야.”

요나단이 벼린 칼날처럼 곱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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