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5화 (9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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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촛불이 꺼지고,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것은 창에서 밀려오는 빛이 느껴질 때였는데 그 때는 물론 새벽이었다.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옆자리를 보았다. 제롬은 졸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이 썼다.

“제롬.”

내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나를 보았다. 그리고 피곤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내 뺨을 조심스레 쓸며.

“일찍 일어나셨나 봅니다.”

“편하게 주무시지, 왜 졸긴 졸아요.”

속이 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휴식은 집에 가서 취해도 충분합니다.”

“저도 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그니스처럼.”

나는 내 말랑말랑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우리 교대로 서로를 지키면 되잖아요. 그럼 제롬이 밤 안 새도 되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우린 부부입니다, 세실리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특이하네요.”

“인생은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인다.

“그랬기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되지만, 특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롬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왜 그러십니까?”

“레이디 화이트, 그러니까 제롬의 어머니가 자꾸 신경쓰여요.”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의 언어술사가, 그러니까…….”

“어머니는 괜찮으실 겁니다. 보기보다 강한 분이십니다.”

“제롬은 괜찮겠어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이 자리엔 물의 언어술사가 있었어야 했다고 해요. 심지어 신께서도 똑같은 말을 하셨다는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롬은 볼에 붙은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미소지었다.

“레이디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레이디는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제게 중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그가 내 손을 들어 입을 맞춘다.

“난 당연히…레이디 화이트가 되고 싶어요. 위험이 큰 자리라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나는 그러니까.”

그가 나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나는 얼굴이 그만 붉어져 시선을 어디에다 둘 줄을 모른다.

“제롬이 필요해요. 사랑하는 감정 이상으로요. 많이, 많이 필요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가 내 턱을 섬세하게 잡아 들어올린다. 시선이 마주친다.

“당신이 제 운명이 아닐 리가 없습니다.”

이마에 다시금 입을 맞춘다. 닫힌 눈에도,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다. 그 다음에는 코 끝, 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입술. 입술이 떨어지자 내가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세실리아가 제 운명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사실 와닿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나는 이불 위에서 무릎을 세워 팔으로 감쌌다. 무릎 위에 턱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의 주인공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타인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항상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행복이라도 찾아오면 그것이 얼마 안갈까 두려워서. 빛나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을 있게 해주는 조연이라고 믿었다. 제롬 같은 1류와는 절대 같아질 수 없는, 조연.

생각해보자면 신탁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조연의 이름이 신탁에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제롬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신탁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내가 그의 히로인이라고. 내가 그의 운명이 아닐 리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던 걸까?

그래, 그랬던 것 같다. 항상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카밀리아의 그늘 뒤에서 살아왔고, 제롬을 동경했지만 그의 옆에 선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건 힘들었다.

내가 나빴다. 사람을 급으로 나누고, 내 등급을 매기고, 그리고 나는 그들이 될 수 없다고 믿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믿고. 바쁘게 살아오다보니 내 자신에 대해 회고할 시간이 없었다. 내 삶의 가치는 내가 만드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고 무뎌져갔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마도 잭은 내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고 싶어했겠지.

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행복해지는 방법.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는 방법. 이런 것들.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 노력했던 사람이니까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저는 신께서 무엇을 원하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세실리아가 레이디 화이트가 되고 싶으시다 하면, 제게 중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다. 그의 체온을 느낀다.

“고마워요, 제롬.”

나는 미소짓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다시 웨스트 체셔로 떠나는 것은 모두에게 고된 일. 그랬기에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고, 떠나기 전의 충분한 휴식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동행인력들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우리는 아침을 충분히 먹고 오전 늦게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사람 셋 앉아있는 식당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싸늘했고, 살얼음판이었다.

“제롬, 괜찮아요.”

“아닙니다.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 누가 압니까?”

제롬은 기어이 내 몫의 빵을 잘라다 제 접시 위로 가져갔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습니다.”

그가 완벽한 예법으로 빵을 베어물었다. 레이디 화이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는 말했다.

“그렇게 네가 기대하고 있는데, 내가 음식에 장난을 치는 것을 잊어서 실망스럽겠구나.”

“어머니라면 이런 고전 수법은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전형적이라서.”

“네 여자를 건드렸다고 아주 이를 세우고 달려드는구나. 무례해.”

그녀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와인을 마셨다.

“제가 또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

“이제 식도 끝났으니, 앞으로는 저를 볼 일이 없으실 겁니다.”

정적이 맴돈다. 고요함 속에서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하다.

식사가 끝나고, 레이디 화이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말없는 제롬과, 그녀의 뒷모습을 번갈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실리아.”

제롬이 나를 올려다본다.

“방에 있을게요, 천천히 올라오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레이디 화이트의 뒷모습을 좇았다. 복도를 조금 뛰고서야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디 화이트의 손이 문고리로 향했다.

“레이디 화이트.”

그녀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시선이 맞부딪혔다. 그녀가 땅을 보고 웃어보였다. 그제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치고는 정말, 평온한 미소였다.

“내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끼치게 차분했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왜 그러셨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방에 들어가버릴까봐서 그녀의 팔을 충동적으로 잡았다.

“왜 저를 죽이려 하셨죠?”

그녀는 그저 미소지었다. 눈주름이 곱게 접히고, 입술이 휘어진다.

“내 아들이 행복한 게 싫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네 주제를 알라는 둥, 그 자리는 네 것이 아니라는 둥, 여러 가지 말들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갔는데 너무나도 예상외의 답이 나온 것이었다.

“당신이 죽으면 그 아이는 피눈물을 흘릴 것 같았죠. 그 애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제롬은 레이디의 아들이에요.”

“혈육이죠. 하지만 내 배를 빌어 나온 저주의 자식따위 품어 무엇하겠습니까.”

“레이디!”

그러자 그녀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절그덕 소리를 내며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레이디 화이트는 눈을 곱게 휘며 노래하듯 말했다.

“쉬이, 목소리를 낮추세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롬이 이 말을 들으면 다칠 것 같아서였다.

“내 아이들이 조금 예민하니까.”

할 말을 잃고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레이디 화이트가 부채를 펼쳐 펄럭였다. 아마 그녀의 눈물을 말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붉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도 불행하고, 내 남편도 불에 타 죽었으면서 불행했고, 내 아들 요나단도 말하지 않아도 불행할 게 뻔한데. 왜 제롬만 행복해야 하지요?”

“…….”

“그 아이를 불행하게 키워, 불행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게 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처음 이 곳에 나타났을 때, 난 많은 게 바뀌었음을 느꼈습니다.”

부채를 쥔 그녀의 손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눈이 광기로 번뜩인다.

“그 아이가 웃었습니다. 그 눈빛을 당신이 압니까? 익숙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죽으라고, 죽어 돌아오라고 그 아이를 디어뮈르 전쟁에 선봉으로 세워 내보냈습니다. 그때 그 명을 받던 그 아이의 눈빛은 죽어 있었습니다. 이미 몇 십 년 전에 죽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녀가 울면서도, 웃었다. 하늘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도 허탈하게 웃는다.

“그런데 당신이 옆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한테서 생명의 빛이 보이더랍니다. 그 악마같던 인간이, 내 자식이. 사람처럼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녀가 쓰러지려는 걸 내가 받으려 하자 거친 손길이 나를 밀어냈다. 그녀는 벽을 짚고 서 숨을 헐떡댔다.

“어차피 물의 언어술사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면. 날 구원할 천사가 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예언이, 신탁이 빗나갈 거라면. 그러면 제롬, 그 아이도 행복하면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고는 바닥에 무너졌다. 나는 감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병사들이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그녀가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은빛 머리카락, 정수리.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본다.

“요나단을 보면.”

그녀가 미소지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레이디. 제 어미가 그를 찾고 있다고. 보고 싶다고 전해줘요. 응?”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뒤돌아섰다. 그리고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뒤돌아보았다.

“정말 사내들이란,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웃는다. 그런 그녀는 마치, 정말로. 갓 새 신부가 된 것처럼 앳되어 보였다.

“저들을 가장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칭해놓고선 이렇게 여자의 포근한 품에 안겨선 울고 웃고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녀가 미소지어보인다. 그리고 목에서 제 목걸이를 풀어 그것을 바라본다. 정교한 흑진주 세 겹으로 이루어진 낡은 목걸이이다. 목걸이 중간에는 펜던트가 달려 있었는데 귀부인의 옆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진 상아였다. 그녀가 그걸 가져와 내 목에 걸어준다.

“내가 레이디 화이트의 자리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레이디 화이트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혹적인 저주라 하셨어요.”

“또.”

“가시왕관이라고 하셨죠. 머리에서 흐른 피가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요.”

“그래요.”

그녀가 미소지어보였다.

“그래도 난 이제 내 몫을 다했어요.”

나는 그녀가 걸어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그녀의 눈빛과 내 것이 허공에서 만난다.

“후회는 없답니다. 안녕히 가시길.”

그녀가 그 말을 남기고는 문 뒤로 사라졌다. 나는 문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나와 제롬은 곧 나갈 준비를 했다. 모든 채비가 끝나고 나는 내가 머물렀던 방을 차분히 한번 둘러보았다. 채광이 적당히 드는, 고운 방이었다.

“이제 힘든 건 다 끝났습니다.”

제롬이 나를 안아왔다. 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는다.

“네, 맞아요.”

“이제 돌아갑시다.”

나는 제롬과 함께 층계를 내려갔다. 훌륭한 오후였다. 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꺄아아아악! 마님!”

저택을 찢을 듯한 하녀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아주 짐승같은 울음소리여서 선명하게 공기를 가르는 그 비명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와 제롬은 동시에, 뒤를 돌아 층계 위를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바라봤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해 바삐 출납한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린다.

그녀의 가시왕관.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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