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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92화 (92/108)

<-- 성당의 종이 칠 때 -->

마차에 탄 뒤에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제롬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소피아 부인에게 배웠던 것이 기억난다. 각국의 상징. 율러는 불, 유래는 화이트 가문의 불의 마법. 그리고 카사로는 바람, 유래는 서덴베르크 왕가의 바람마법.

그리고 릴케 신성국은 하늘. 릴케의 공주들이 구사하는 하늘의 언어로부터 유래한 상징이었다. 선택받은 릴케의 공주들은 하늘의 언어를 다룰 수 있었고, 하늘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에서는 거의 신이라고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런 릴케의 공주가, 이 나라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카사로의 황태자를 도와 가짜 물의 언어술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샬롯의 말이 맞았다. 그 여자, 제인은 가짜였다.

그때, 무도회의 나는 어떻게 제롬을 포기할 생각을 쉽게 했었을까. 저렇게 완벽한 남자를. 나는 제롬이 없는 내 인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잭은 나를 억만장자 상속녀로 만들어주었지만, 돈으로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어도 돈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는 없는 법. 나는 제롬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사랑이 필요했다.

물의 언어술사는 평생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며, 성녀로 추앙받으며 살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롬의 사랑까지 빼앗겨야 한다니. 믿을 수 없다. 너무 과한 처사 아닌가.

나는 당신이 필요한데. 당신이 내게 주는 쾌락, 기쁨, 안락함까지도.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그리기가 너무 힘들다. 손이 차가웠다. 가슴에 멍이라도 든 듯 아팠다.

“무서워요.”

말했지만, 제롬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롬, 무서워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알고 싶어요.”

나는 제롬의 소매를 잡았다. 제롬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제 형이, 그러니까 요나단이.”

그가 힘겹게 내뱉었다. 그는 조금 망설였다, 나를 바라보다 이었다.

“웨스트 체셔를 떠날 때, 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돌아올 땐.”

그가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장 아끼는 것 단 하나를 앗아가겠다고.”

“그 사람, 그냥 유학길에 오른 거 아니었어요?”

제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아닌 모양이었다.

“세실리아.”

그의 차가운 손이 내 볼을 쓸었다.

“걱정됩니다. 저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제 생각보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니,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제게 많이. 많이 소중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제롬.”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내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그 미친 치가 당신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괜찮을 거예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품에 녹아든다. 내 남자였다. 나의 것이었고, 누구도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었다.

“나도 걱정돼요.”

나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눈에 담는다.

“내가 당신의 운명에 끼어든 나쁜 사람인 것 같아서요.”

“세실리아.”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제 운명입니다.”

나는 자조했다.

“그럴까요.”

“제겐 그렇습니다.”

“그거면 돼요.”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체온을 온전히 느꼈다.

“주무십시오.”

그가 내 귀에 속삭인다.

“긴 여정이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레이디 화이트가 되어 있을 겁니다.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게 제 형제라 해도 말입니다.”

“믿어요.”

“그리고 물의 언어술사가 나타나도. 제 대처는 이전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걸까. 한숨을 삼킨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일주일을 달렸다. 이 여정을 떠나며 내가 깨달은 것은 이번 여행에 제롬이 많은 병사들을 동원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마 제롬이 그의 형, 요나단을 경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롬은 요나단이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동물적인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요나단이 내 존재조차 알까 싶었지만 제롬의 걱정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발리타로크BalitaLokque.

오늘 오후즈음에 보았던 표지판이었다. 그 말은 곧 도착지가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내가 이 표지판을 보았을 때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더 이상 텐트 안에서 자는 것도 싫었고, 밤의 차가운 공기도 나를 지치게 만들 참이었다.

제롬은 무조건 빨리 도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마차는 지독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기나긴 일주일의 여정을 끝내는. 깔끔하고 높은 장정의 목소리.

“도착입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 문이 열렸을 때에, 보이는 밤하늘이 괜히 예뻤다.

“제롬, 도착했어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제롬이 나를 살피고는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분이 매우 좋다 해도, 제가 알려드린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래요. 나는 다 기억해요.”

“어머니가 조금…….”

그는 말을 골랐다.

“쌀쌀맞게 대할 수 있어도, 그건 레이디가 아니라 저 때문일 겁니다.”

“두 사람 사이 안 좋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를 쫓아 그와 보폭을 맞췄다.

“제롬!”

그를 불렀을 때, 그가 멈춰섰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화이트 캐슬의 주인이 왔다고 직접 전해야 하나?”

제롬이 삐딱하게 웃어보였다. 기사들은 완강했다.

“레이디 화이트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개소리. 네가 보고 있는, 내 옆에 있는 여자가 레이디 화이트다.”

“죄송합니다.”

“불복하는군. 그럼 이제 내 멋대로 하는 수밖에.”

그가 손짓하자 그의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이 살벌한 분위기에 그저 침만 삼키고 눈치를 살필 따름이었다. 세상에, 제롬은 내게 그의 어머니와, 그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해가 되는 것은 있었다.

“죽이지는 말고 제압해라.”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 둘이 바닥에 꿇어앉혀졌다. 성 안에 있는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의 팽팽한 기류. 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이트 가문의 전 실권자, 레이디 화이트 눈에는 제 아들이 좋게만 보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제롬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의 첫째 아들까지 밀어내 후계자가 된 사람이니까. 레이디 화이트가 그녀를 살갑게 맞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모성애로 덮기엔 제롬의 흠이 너무 컸다.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제롬은 태연한 미소로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또 문을 넘어야 하는데, 그 문 앞에 인영이 있었다. 걸음에 따라 인영이 가까워진다.

어느정도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내 앞의 그 사람이 레이디 화이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롬을 닮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빛이 바랜 은빛 머리.

하지만 무엇보다도, 달빛 아래 고고히 서있는 그녀의 흔들림없는 자세. 그리고 고집센 입매와 완강한 표정까지. 압도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어머니, 저 집에 왔습니다.”

제롬이 말을 끝내자마자 레이디 화이트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곧 제롬의 손에 가로막혔다. 허공에 떠 있는 두 손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레이디 화이트가 힘있게 손을 거두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제롬이 싱긋 웃어보였다.

“제 여자가 옆에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예쁨받으려면 얼굴에 흠집 나면 안 됩니다.”

“말 잘하는 것을 보면 잘 지냈나 보구나.”

레이디 화이트의 목소리는 어느 얼음보다 차가웠을 것이다.

“너를 보면 치가 떨리는구나.”

“저도 많이 사랑합니다, 어머니.”

제롬이 삐딱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항상 가장 아꼈던 것은, 요나단이었죠.”

“네가 감히……!”

레이디 화이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부채를 잡은 그녀의 손이 요동쳤다.

“아아, 이해합니다. 어머니도 사람이니까요. 가장 아끼는 아이가 있을 수 있죠.”

“네가 내 뱃속에서 나왔다는 게 저주스럽구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

“태어난 것도, 제가 몹쓸 제 형보다 잘났던 것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도.”

제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여러 감정을 담은 두 시선이 허공에서 전류라도 될 듯 맞부딛힌다.

“집에서 덜덜 떠는 형 대신 어머니께선 저를 선두로 세워 전쟁에 내보내셨죠. 똑똑한 차남은 돌아오지 말라고. 하지만 저는 돌아왔습니다. 이기지 못할 전투였지만 말입니다.”

분노에 떠는 레이디 화이트의 눈에 눈물이 천천히 고이기 시작했다. 제롬은 그럼에도 태연했다.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디어뮈르 전쟁에서, 카사로는 율러를 집어삼킬 것이었습니다. 그걸 읽으신 아버지는 스스로를 화염에 제물로 바치셨고, 저는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했습니다.”

“너는 내 남편, 그리고 네 아버지를 죽인 괴물이다.”

레이디 화이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 여자는 분명 네 잘난 얼굴만 보고 너를 좋아했겠지. 어떻게 꾀어냈는지는 모르겠다만……. 하지만 네 마음대로 일이 되지만은 않을게다.”

“어머니.”

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제게 말을 끝맺게 하지도 않으실 겁니까?”

“…….”

“전쟁에서 이기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당신의 사랑을, 관심을 갈구했을까. 그러자 모든 것이 쉬워졌습니다.”

제롬은 차갑게 내뱉으며, 비릿한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속이 얼마나 문드러져 있었는지를.

“저는 집에 돌아와 요나단을 내쫓고, 아. 물론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당신을 이곳으로 보내드렸지요.”

“그리고 이제 와서 아들 행세를 하시겠다.”

레이디 화이트의 볼을 타고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아뇨.”

제롬의 대답은 명료했다.

“역대 모든 레이디 화이트들은 화이트 캐슬, 즉 이 성의 정원에 있는 성당에서 신성한 서약을 맹세하고 화이트 가문의 정당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제롬이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식이 끝나면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떠날 겁니다. 그리고 이 땅과 성은 공작인 저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그가 레이디 화이트를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엔, 어느 병사들도 그를 막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보려 했지만, 내 어깨를 감싼 제롬의 강력한 악력에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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