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1화 (91/108)

<-- 성당의 종이 칠 때 -->

제롬을 바래다주고 나는 저택에서 온 오전 내내 상념에 잠겨 있었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범람한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어본다. 샹들리에의 빛이 내 손가락 사이를 넘어 환하게 흩어진다. 그리고 내 손에는 피보다 붉은 빛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보석은 보는 각도가 다를수록 특이한 빛을 뿜어냈다. 선홍색, 분홍색, 드물게 연초록. 이러다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러고 보니…….’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마르사의 궁에서 노아가 내게 했던 말이 있었다. 이 반지에 대한 비밀은 스스로 찾으라고 했었나.

노아는 이 반지를 갖기 위해 내게 접근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이건 단순히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뭐지?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 제롬이 준 반지였고, 제롬이 들어가지 말라는 방이었고, 물의 언어술사는 제롬의 아내 될 사람이었고. 모두 제롬에 대한 수수께끼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고는 목청을 골랐다.

“들어와.”

“레이디.”

하녀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이디 율리아 슐츠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율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심해서.”

“잘 왔어.”

“너도 내일이면 발리타로크로 여행, 가는 거지?”

“맞아.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율리아가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이애나가 제도를 떠나니까 너무 쓸쓸해. 오스카도.”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 신혼이었구나.”

“맞아. 두 사람이 제도에 있는 저택을 떠나 이제 블리시스로 갔잖아. 거기에서 아마 자리를 잡고 때가 되면 오스카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겠지.”

“블루 다이아몬드 성도 그럼 이제, 카밀리아와 에드거뿐이겠네.”

“그 둘한텐 잘 되었지. 오붓하고 좋잖아.”

“그러게.”

차를 마시는 율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험프리 백작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어.”

“싫은 거야?”

내가 묻자 율리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야. 우선 그래, 그는 곧 40을 바라보는 남자이고 그건 그런 대로 두잔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제 영지를 가진 백작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그래, 세실리아.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면 안주인이 되는 거야. 그렇게 할 일이 많아지면 부티크를 운영하는 데 소홀해질 거겠지.”

“율리아.”

“난 부티크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40대 남자랑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

“샬롯이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왕세자비니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완강하셔. 고지식하고 고집 센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오, 율리아.”

율리아는 울고 있었다.

“왜 나한테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 걸까?”

나는 그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슬퍼.”

“그럼 내가 도울 방법은 없을까?”

율리아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세실리아, 나 남자가 필요해. 험프리 백작보다 부유하거나 고결한. 혹시 알아봐 줄 수 있니?”

“좋아. 일단 알아볼게.”

율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고마워, 고마워, 세실리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미소로 답례했다.

우리는 오후 내내 제롬의 서재 소파에서 뒹굴며 네임북, 그러니까 귀족들의 명부를 뒤적였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펠릭스 윈즐턴.”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정말 소문난 남색가야. 좋지 않아.”

“좋아, 그러면 다니엘 윈셔는?”

“너무 구두쇠야. 가진 부는 많은데, 쓰진 않지. 게다가 너무 신앙심이 깊어서 별로야. 그가 신앙심이라는 명목 아래 벌인 우스꽝스러운 일을 말하면 너도 웃을 거야, 세실리.”

“쓰인 내용으로는 정말 훌륭한 신사인 것 같은데.”

“그의 종교 집회에 한번이라도 참석해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하루 종일 네임북을 뒤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엔 율리아의 뛰어난 정보력이 한몫했다. 율리아가 가십의 신이다 보니까, 모르는 귀족들의 치부가 없어 그녀의 말을 들으면 이 세상에 믿을 신사 하나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덮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율리아에게 물었다.

“제롬에 대한 재밌는 가십은 없어?”

“없지. 정말 깨애끗한 신사야. 그래서 재미가 없다니까.”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아, 그러고 보니까 카사로 황제가…….”

“아아. 그 이야기라면 알지.”

“아는구나. 하여간에 기백이 대단한 신사야, 공작 전하도. 아마 험프리 백작이 내게 나라 하나를 주겠다고 말했으면 내 선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그러면 제롬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라도 있어?”

“짙은 갈색 머리에, 붉은 드레스를 입고 진주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취향이라는 것 정도?”

나와 율리아의 눈이 마주쳐, 우리는 한없이 웃었다. 율리아가 나직히 읊조렸다.

“취향이 결과를 만든 건지, 네가 그 사람의 취향을 만든 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율리아는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린다.

“내 친구가 공작부인이라니. 그것도 그 제롬 공작의 첫사랑인 여자잖아.”

“놀랄 것도 없어, 율리아. 네 사촌은 왕세자비잖아.”

“그러니까 왜 세상은 나한테만 이렇게 잔인한지 몰라.”

그녀가 쓴 웃음을 흘렸다.

“가 볼게, 세실리아. 내일 부티크도 다시 열어야 하고, 바빠서.”

“그래. 잘 가, 율리아.”

그녀가 일어나 문 밖으로 향한다. 내가 뒤따르자 율리아가 미소짓는다.

“안 바래다 줘도 돼, 세실리아.”

“아냐. 너 나가는 거 볼래.”

나는 그녀의 팔에 내 것을 끼워넣고 바깥으로 향했다. 바깥은 어느새 노을이. 우리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와 문 쪽으로 향했다.

“내일 여행 잘 다녀와, 세실리아.”

“너한테 좋은 일이 꼭 생기길 바랄게. 율리아.”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떠났다.

다음날은 꽤나 바빴다. 나와 제롬은 부부가 되기 위해 발리타로크로 떠나려 하고 있었고, 역시 그런 여행이라면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놓고 가야하는지 고민되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곳에 아무 짐도 없이 몸만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간 시간이 좀 지나서였는지 내 짐이 하나 둘 따지고 보니 많았다. 정말 많았다. 그래서 무엇을 들고 가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미 챙겨놓은 드레스 빼고도 남은 드레스 중에서 나는 고민했다.

“제롬.”

제롬이 침대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드레스 까만 걸 가져갈까요, 초록색 가져갈까요? 남부 유행에는 안 어울리는 거 아녜요? 골라줘요 제롬.”

“둘 다 가져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사도 괜찮습니다.”

“어려워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나 손을 튕겼다.

“어제 제가 말한 건 생각해봤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남자 소개시켜달라고 한 그거요. 제롬 파티에서 친구 많은 것 같은데, 제 좋은 친구 율리아를 위해서 좋은 남자 한명만 소개해 줘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롬이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아는 사내들은 좋은 파트너고, 친구지만 좋은 남자들은 아닙니다.”

“꽤 박한 평가네요.”

“사실입니다.”

그가 나를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 외로, 그들의 난잡하고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 레이디는 상상도 하지 못하실 겁니다. 절대 훌륭한 신랑감이 아닙니다.”

“유감이네요.”

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제롬은 한참의 고민 끝에 말했다.

“게다가 슐츠 가문이라면 잣대가 보통 엄격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제가 어느 신사를 추천해 주었든, 로드 슐츠에게는 만족스러운 평가를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그런 가문의 장남이라니. 오스카의 예법이 왜 그렇게 완벽한 지 알 것 같네요.”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실수였다. 나는 오스카 얘기를 의식적으로라도 꺼내지 않으려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제롬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목을 골랐다.

“그런데 제롬, 샬롯이 제게 말해주던데…….”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고는 다급한 표정의 시종이 들어왔다. 하인이 아닌 시종.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보는 시종이 제롬의 방문을 노크하는 일은 드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불안하게 둘을 번갈아보았다.

“전하.”

시종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제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히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두 가지 나쁜 소식입니다.”

“고하여라.”

시종은 나를 살피더니 제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조사를 수행한 끝에, 벨 릴케 공주가 이번 무도회 사건에 연루되어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뛰어난 하늘의 언어술사인 그녀가 비가 올 때를 짐작해 정보를 카사로의 황태자에게 넘긴 모양입니다.”

“역시 그랬군. 릴케 공주의 출국 정보는 찾았나?”

“예. 마차에 숨어 나가려고 하던 것을 붙잡으려 하였답니다. 하지만 외교적인 마찰이 우려되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랬군. 그 문제는 왕세자의 권역이니 내가 관여할 수는 없고.”

나는 두 사람을 다시 한 번 번갈아보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타국의 공주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것이며, 카사로의 황태자는 무슨 일을 꾸몄던 걸까.

내가 무도회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물의 언어술사의 선명한 죽음뿐이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종의 입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터져나왔다.

“그날 죽은 물의 언어술사는 카사로의 황태자가 만든 가짜라 합니다.”

“알고 있어. 결국 쓸데없는 짓이었지.”

“가짜요?”

나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훑었다.

“제롬. 그게 무슨 얘기에요? 결국 샬롯이 한 말이 맞는 거예요?”

“세실리아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인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지만 무시했다.

“당신의 옆자리에 있어야 할 여자가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거잖아요.”

“세실리아.”

제롬이 내 어깨를 부드러이 쥐었다. 내 흔들리는 시선이 그의 차분한 눈에 담긴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이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뭐지?”

제롬이 시종인을 바라보았다. 시종인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곧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 떨고 있었다.

“그, 그, 그게.”

“내게 소식을 전할 다른 시종인이라도 고용해야 하는지 궁금하군.”

“전하.”

그가 제롬을 바라보았다.

“요나단 화이트 경, 화이트 가문의 첫째 도련님께서 율러로 돌아오셨습니다.”

“……나가 봐.”

시종인이 고개를 숙이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굳게 쥐어 떨리는 제롬의 양 손을 가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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