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0화 (90/108)

<-- 성당의 종이 칠 때 -->

“좋아요. 어쨌든 저는 제롬에게 여러 차례 오스카 경과 저는 친구라고 말해왔어요. 그런데 당신은 제 말을 믿지 않으셨군요.”

“죄송합니다.”

그는 제 앞머리를 제 손으로 거칠게 헝클어트리고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제가 레이디를 믿었어야 했는데, 제 과실입니다.”

“그래요. 그리고 저는 평생 이걸 안 잊을 거예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요?”

“예?”

“그 독을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왜 설탕이랑 바꿔 놓았죠?”

“그건…….”

“빨리 말하세요.”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레이디께서 그 독으로 저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네? 제가 제롬을 왜요!”

“그야……. 만일 제 짐작이 사실이라면, 레이디께서는 그 독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셔야 오스카 백작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그 독으로 뭘 하려고 하느냐고. 아, 물론 내가 말해주면 제롬은 그 말 또한 믿지 못했겠군요. 그래서 독을 설탕으로 몰래 바꾸어놓고는, 제가 그 독으로 무얼 하는지 지켜 본 건가요?”

그는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랬군요.”

“세실리아. 저는…….”

“잘 하셨어요.”

“예?”

“제롬이 한 행동은 상대를 믿지 못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대처이겠죠.”

제롬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다 미소지었다.

“세실리아.”

“하지만 난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라고 했어요, 제롬. 당신의 예언에 대해 듣고 멋대로 일을 꾸민 내 잘못도 있지만, 제롬은 내 말을 안 믿어 줬어요.”

“잘못했습니다.”

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더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일부러 그가 내게 져주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랄까.

그는 절대로 내가 우위를 가져가게 두지 않는다. 그저 내가 우위를 가지려고 바둥대는 걸 일부러 져주면서 관조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는 그의 감정이 여유로울 때에는 내가 그렇게 하게 둔 다음에, 조금이라도 위기가 찾아오면 다시 제 진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압도한다.

그래. 그는 내 친구를 압박해서까지 오스카를 기어이 기혼남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이 사람한테 그것에 대해 따지지도 못하고 있다. 플러스로, 더 심각한 것은 나는 이 남자. 제롬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혼란스러웠다.

“오늘은 독방 쓸 거니까, 제롬은 침실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세요.”

“세실리아.”

“서재에서 책들과 함께 환상적인 밤을 보내시길 바라요. 전 갈 거예요.”

“세실리.”

그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하세요.”

“당신이 독이 담긴 잔을 내게 내밀었어도, 저는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그가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서는 내 턱을 부드럽게 쥐고는 저를 보게 한다.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하려는 듯, 제 손가락을 내 손 마디마디에 끼워 오므린다.

“이번에는 안 당해요.”

데자뷰가 느껴진단 말이지. 나는 그를 밀어냈다.

“또 그렇게 키스하고 어물쩍 넘기려고 하지 마요.”

“제가 그랬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문고리를 잡자 그가 두 팔로 내 허리를 조심스레 감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소름끼치게 달콤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는 그의 손을 내 허리에서 떼어냈다.

“자숙이요. 그럼 이만 실례…….”

내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가 제 손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뒤돌았다. 이럴 때엔 여자라서 억울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그에게 힘으로 밀리다니!

그가 벽에 손을 짚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설적이게도, 내 등 뒤에 문이 있는데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테네시 제과를 사서 내 무릎 아래다 바쳐도 싫어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찰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귀엽습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나의, 세실리.”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웃음에 너무나도 약하다.

그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제롬은 정말로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천천히 문학작품을 읽어내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화가 사르르 녹았다.

“……그래서 카트린느는 천천히 그녀의 부군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면 깊은 밤이라도 환한 낮이 될 것이요, 하늘에 뜬 것이 촛불이라고 해도 나는 믿으리다.”

제롬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에 스몄다. 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제롬은 내 눈이 감기려는 것을 자세히 살피더니 책을 덮어 침대 옆 서랍 위에 두었다.

“졸립니까, 나의 세실리.”

“네. 조금요.”

나는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제롬은 일어나 천천히 촛불들을 끄기 시작했다. 나는 방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의 팔이 나를 감싼다.

“주무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 다음날에 눈을 떴을 때, 햇빛이 내 눈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야말로 늦은 아침. 나는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리고 옆 자리에 인기척을 느껴 몸을 일으켰다.

“제롬?”

제롬이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책을 덮어놓고는 미소지었다.

“일어났습니까, 세실리아?”

“어디 안 가셨어요?”

“세실리아는 제가 옆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서는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십니까?”

“……좋아서요.”

눈을 떴을 때 그가 내 옆에 있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제의 일 때문이었는지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같이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그가 나를 안아올렸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천천히 층계를 내려갔다. 그리고 식당에 내려가자, 약속이라도 했듯 따뜻한 차가 나왔다.

“고…마워요, 제롬.”

그가 나를 의자에 앉혀주고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는 내 맞은편에 단정히 앉아 나와 같이 차를 마셨다.

“제가 오전에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선물입니다.”

“그게 뭔데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가 손짓하자 하인이 폭신한 방석 위에 무언가를 얹은 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열쇠였다. 큰 열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열쇠잖아요.”

“그렇습니다.”

제롬이 차를 마셨다. 그리고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이디가 요구하신, 테네시 제과의 열쇠입니다.”

“네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가 언제…….”

그러다 나는 어제 내가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당신이 테네시 제과를 사서 내 무릎 아래다 바쳐도 싫어요.’

그래, 그 말이었다. 정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이 제국에서 가장 큰 베이커리를 정말로 사서 내게 선물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거 다시 팔으셔야 돼요, 제롬. 그 말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였어요.”

“그렇습니까. 전 몰랐습니다만.”

제롬은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제롬이 얄미웠다. 이 베이커리가 내 손에 있어서 뭐가 좋단 말인가. 나는 더 이상 가필드 테네시가 만든 디저트와 빵을 먹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이미 제롬에게 베이커리를 팔고 총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말이다.

“다, 다시 팔고 오시면 안 될까요? 아, 아니려나. 힘들겠죠? 이미 성사된 거래니까.”

내가 안절부절 못하자 제롬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책상을 꽝 내리쳤다.

“왜 웃어요! 난 심각하다고요!”

“농담입니다.”

“제롬!”

아마도 그는 이걸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롬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참동안 그렇게 웃어재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제롬이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이 집에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렇군요.”

나는 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차가운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내일 발리타로크로 떠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 당신은 레이디 화이트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드리는 겁니다.”

“고마워요.”

“잘 가지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래도 제롬에게 유머감각이라는 게 있으니 다행이었다.

오후에 놀러와도 괜찮겠냐는 율리아의 편지에 답신하고, 나는 화이트 저택을 혼자. 자세히 구경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했다. 나는 이곳의 레이디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걸어오다, 나는 천천히 멈춰섰다. 그의 방으로부터 왼쪽으로 세 번째에 있는 방. 나는 그 오래된 문을 천천히 감상했다.

내 손에는 제롬이 준 마스터키가 있었고 내 눈 앞에는 그가 들어가지 말라는 금지된 방이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열쇠를 쥔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안에 있는 것이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제롬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여, 열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보고만 있던 참이었어요.”

“믿습니다.”

제롬이 차분히 답한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고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 없으실 겁니다.”

“그게 무슨…….”

“발리타로크에서 돌아오면.”

그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에게 이 방을 둘러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기묘한 충족감이 밀려들어왔다.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그의 비밀 장소를 그는 나와 함께 공유하려고 하고 있었다.

“제가 알아도 되는 건가요?”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제롬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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