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88화 (8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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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왕세자비 샬롯을 만나러 갔다.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한번 들어가보기도 힘들다는 왕궁의 밀실, 세이지 궁을 이렇게 제 집처럼 드나드는 것도 내가 유일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샬롯은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쌍의 눈이 내게로 향한다. 알렉산더가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레이디 세실리아.”

“왕세자 전하.”

그가 나더러 이름을 부르라 했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겐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 아가씨는 항상 내 이름을 잊는 모양이야, 샬롯.”

“아니면 당신이 불편한지도 모르겠죠.”

“그럴 리가.”

알렉산더가 능청스레 내게 다시 물었다.

“레이디는 내가 주위에 있는 게 불편한가?”

“아뇨, 전혀요.”

태연하게 미소지어보였지만, 어쨌던 나와 알렉산더는 대화 몇 번 해보지 않은 사이 아닌가. 낯을 가린다는 게 조금 우습긴 했지만, 왕세자는 왕세자라서 다른 사람과 달리 살갑게 대하기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다.

그때,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롬 공에게 안부 전해주게나.”

“그럴게요.”

그가 문을 닫고 남았다. 그래서 실내에 남은 것은 나와, 샬롯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샬롯 앞에 가 앉았다. 샬롯은 연분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네가 오는 게 좋아.”

그녀가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려 웃는다.

“그러니까, 자주 오도록.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래요, 샬롯.”

샬롯이 손짓하자 하녀들이 구석의 선반에서 찻잔을 내왔다. 다른 하녀들은 알렉산더가 남기고 간 찻잔을 치웠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내 찻잔이 따뜻한 노란 차로 가득 찼다.

“오늘은 무슨 일이지?”

“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했더라. 말해도 괜찮으려나.

“그게, 샬롯. 무도회에서 일어났었던 일에 대해서.”

“좋아. 계속 말해봐.”

“샬롯이 제게 선물해준 가루를 제롬이 알고 있었어요.”

“아. 그건 말한 적 없었는데, 이상하네.”

“그럼 제롬이 어떻게 알게 된 걸까요?”

나는 차를 한 모금 조심스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밀려들어온다.

“그 사람이 너한테 하녀들 몇을 붙여놨겠지. 짐작 가는 거라도 없어?”

“그러고 보니 제가 독을 숨길 때, 문이 조금 열려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이미 답이 나왔네.”

“네?”

“세실리.”

샬롯이 미소지었다.

“네 시녀들, 하녀들 말고. 시녀들을 조금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 네 편 말이야. 아마 네 집의 사용인들이 다 네 남편 될 사람의 눈과 귀인 것 같은데, 그러면 조금 답답하잖아.”

“그러고 보니, 제롬한테 제 일과를 보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긴 해요.”

나는 타르트를 집어 먹으며 생각에 빠졌다.

“제가 뭘 하는지 제롬은 다 꿰고 있고……. 저랑 친하면 친할수록 추가수당을 받는지 하녀들은 저랑 말 한마디 더 섞어서 정보 하나 더 얻어내려고 안달이고.”

“저런.”

샬롯이 손을 뻗어 내 입가의 생크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서는 냅킨에 제 손가락을 닦아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웃어보인다. 마치 귀여운 고양이를 보는 눈빛이랄까.

“그래서 세실리아, 너는 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관심 없어하는 것보다는 낫죠. 아마도. 그런데 너무 극단이잖아요, 그 사람 감정이. 게다가 저를 너무…애취급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세실리아,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그러게, 다정하면서도 엄격하단 말이야. 너무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세실리, 그래도 그 남자는 누군가를 처음 사랑해 보는 거라는 걸 알아야 해. 그러니까 서투른 거겠지. 물론 그 사람 행동이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고.”

“제롬은 저 이전에 짝사랑이나, 뭐 연애. 이런거 해 본적이 없었나요, 그럼?”

나는 샬롯을 바라보았다. 분명 샬롯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샬롯은 왕세자비였고, 게다가 가십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테니까.

샬롯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차를 마셨다.

“없을 걸? 아, 없어. 한 번도 없었지.”

“정말요?”

“그래. 심지어 카사로 황제가 카사로 제국을 주겠다며 공에게 청혼해왔지만 공작이 거절했어. 하긴, 그 때 카사로 황제는 내 엄마만큼 나이가 많은 여자였지만 말이야.”

“정말 다양한 의미로 대단하네요. 제롬도, 황제도 다요.”

“뭐, 그래서인지 다들 거리를 두고 공작을 흠모했지. 안 될 걸 아니까. 나도 그랬고.”

“아…….”

제롬, 그 사랑꾼에게 여자가 없었다니 정말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샬롯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분명 제롬 공의 옆자리에 설 여자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래도 그는 가주인데. 후계를 봐야지. 내 시녀들이 어찌나 제롬 공작을 소개해 달라고 조르는지. 나도 힘들었어.”

“왕궁시녀들이요?”

“그래. 내가 신임하는 아이들인 만큼 내가 다리를 놔 줘야 하기도 하니까. 그러고 보니 바네사가 곧 혼기가 다가오는구나. 좋은 남자 알면 소개해 주렴, 네 조언에 귀기울일게.”

“영광이에요, 샬롯.”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도 시녀들을 들이는 게 좋지 않겠어? 네가 원한다면 내가 좋은 영애들을 몇 아는데, 소개시켜 줄게. 도움이 될 거야.”

“제안은 고맙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샬롯.”

“그렇다면야.”

샬롯이 깔끔히 답했다. 물론 제안은 고마웠지만, 샬롯의 사람들이 나와 너무 가까이 지내는 걸 제롬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샬롯이 찻잔 너머로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발리타로크로 간다고?”

“네, 샬롯. 곧 떠나요.”

“잘 됐어. 레이디 화이트가 되기 위한 마지막 절차가 발리타로크로의 여행이라고들 하잖아. 화이트 가문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땅. 낭만이 살아숨쉬는 남부라니, 그것만큼 대단한 게 없지.”

제롬은 아마 그곳에서 내게 청혼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레이디 화이트가 되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곧 봄이 와서 꽃이 예쁘게 필거라고 제롬이 말했어요.”

“안 그래도 사교계에서는 그 얘기뿐이야. 용이 제 둥지로 여자를 데리고 간다고. 화이트 가 방계들에게는 희소식은 아니었지. 공작이 후사 없이 죽으면 저들에게 좋을테니 말이야.”

“후사요…….”

나는 조용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샬롯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천천히 네가 준비되었을 때 아이는 가지면 되니까.”

“그래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쉬고 싶어요.”

나는 큰 머랭을 집어 베어물었다. 달콤한 맛이 혀끝으로 밀려들어온다.

“샬롯. 제롬이 저 때문에 많이 불안해하는데, 그 사람을 안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짐작이 안 가요. 혹시 알고 있는 거라도 있으시다면…….”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샬롯이라면 확실히 뭔갈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알렉산더 왕세자도 집착이 어마무시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남자를 손 안에서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뻔한 이야기겠지만 대화를 많이 해봐. 그리고 세실리아 너도, 표현을 많이 해 보려고 노력하고.”

“표현이요?”

그러고 보니 항상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오는 쪽은 제롬이었다. 표현이라. 나는 마음 속 종이에 그것을 메모했다.

“그래, 표현.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르니까.”

“좋아요. 해 볼게요.”

“그리고 정성이 담긴 선물 같은 거라도 답례로 준다면 정말 좋아할 거야. 사랑에 빠진 사내만큼 단순한 건 없거든. 자수라던가.”

“아! 그래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내가 박수를 짝 치자, 샬롯이 미소지어보였다. 무언가 깨달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샬롯의 부드러운 손이 내 것을 잡았다.

“당신 남자, 꽉 붙들어 놓는 게 좋아.”

그녀가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내 생각에. 아직 물의 언어술사가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거든.”

“샤, 샬롯. 그게…….”

“무도회의 그 여자는 진짜라고 말하기엔 너무 허술하지 않았어?”

그녀가 기묘하게 미소지어보였다. 나는 온통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집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것은 소피아 부인이었다. 나는 마침 머리도 비울 겸, 자수를 하고 싶었기에 그녀를 기꺼이 맞았다.

그녀는 내게 자수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역시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 네, 다섯 시간쯤 되었나. 나는 제롬의 값비싼 손수건에 그럴 듯 해보이는 장미를 수놓을 수 있었다. 내가 자수를 끝내자 옆에서 하녀 브리젯이 박수를 쳐 주었다.

“레이디, 정말 아름다운 장미에요!”

“그런가?”

“네에! 로드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나는 뿌듯한 얼굴로 소피아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건…….”

그녀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마 조금 더 연습하면 더…….”

그녀는 내 자수를 뭐라 형용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소피아 부인의 난처한 모습이었다. 내가 눈을 빛내며 쳐다보자 그녀가 손 제스쳐까지 취하며 말했다.

“멋진 장미가 되겠군요.”

“그렇죠?”

나는 내 첫 작품을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열심히 연습해야겠어요!”

“그럼 제가 천을 많이 구해놓아야겠네요.”

“아냐, 브리젯. 제롬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다가 수놓으면 될 거야.”

“그건…….”

브리젯은 무언가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웃어보이니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레이디!”

“수놓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어. 앞으로 자주 해야지.”

게다가 나는 소질도 있는 것 같았다. 제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제롬은 늦저녁에 도착했다. 나는 자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 나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제롬!”

그가 나를 꼭 품에 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잘 있었습니까.”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나를 눈에 담으며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나의 명작, 자수 넘버 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제가 당신 손수건에 이걸 수놓았어요!”

“그렇군요. 그건…….”

그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쁜…붉은 소용돌이군요.”

“장미에요, 제롬.”

내가 단호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가 금방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장미입니다, 세실리아.”

“그렇죠?”

내가 손수건을 고이 접어 그의 안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자수에 조금 소질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예. 세실리아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성의 식당으로 향했다.

“앞으로 자주 하려고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가 웃어보였다. 식사 전에 집에 딱 맞춰 들어와 나를 꼭 안아주는, 내 아름다운 자수 세계를 이해하는 남자라. 완벽했다.

샬롯이 물의 언어술사에 대해 경고했지만 나는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제롬은 이렇게 나의 옆에 있을 것이었고, 우리는 발리타로크에 가 곧 결혼할 것이었다. 나중에는 우리 사이에 아이도 가질 거였다. 그 아이는 제롬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겠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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