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87화 (8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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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성당의 종이 칠 때

Let the cathedral bells ring

무도회가 그렇게 끝났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를 체감했을 때엔 그저, 봄이었다.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느낀 것은 내 친구의 결혼식에서였다.

봄날의 신부라고, 다이애나는 그날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신부대기실에서 다이애나의 옆에 있었다. 나와 율리아, 그리고 아그니스까지.

율리아는 제 동생이, 그리고 제 소꿉친구가 한꺼번에 기혼이 된다는 것에 감상에 젖어 있었다. 율리아가 손수건으로 눈을 또 훔쳤다.

“너도 이렇게 가버리는구나…….”

“괜찮아, 율리아.”

다이애나는 본인의 결혼식이었음에도 눈물 한 방울 없이 의연했다. 다이애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의 품에 안기는 율리아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너도 가고, 세실리아도 곧 가고. 내 약혼남은 마음에 안들고.”

율리아의 말에 아그니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있는데 뭐. 우린 아직 젊고 싱글이지.”

“그게 문제잖아!”

율리아가 아그니스의 손을 꽉 잡았다.

“게다가 나는 험프리 백작같은 사람과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불쌍한 험프리 백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이애나가 탄식했다. 내가 웃었다.

“그 사람이 어떤데?”

그러자 율리아가 나를 보며 답했다.

“30대 후반의 말 한 마디도 안 섞어본 완전 낮선 남자.”

“좋아, 그리고?”

“몰라. 미안한데 난 30대 후반이 아닌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것도 잘생긴 사람으로. 난 돈도 많은데.”

“그걸 죄라고 할 순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아그니스가 거들었다.

“율리아 동생이 오스카 슐츠잖아. 어지간한 남자는 눈에 찰 리가 없지.”

“그 사실에 대해 논쟁할 순 없는 것 같다.”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율리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왕세자 알렉산더 베르디게츠, 기혼. 예쁜 왕자 니콜라이 베르디게츠, 기혼. 그것도 카사로 황제의 몇 번째 남편이었더라. 한 네, 다섯 번째나 되었나. 그 여자는 남편을 몇번이나 갈아치우는지, 참. 그리고 이 나라의 유일한 20대 공작, 제롬 화이트도 약혼. 내 마음에 드는 남편을 고르려면 다른 나라에 가야 되겠어.”

“행운을 빌어.”

아그니스가 율리아의 어깨를 톡톡 쳐 주었다. 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럴 거면 그냥 결혼, 안 하면 안 될까. 난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이애나가 까르르 웃었다.

“보수적인 레이디, 그리고 로드 슐츠가 허락해줄 리가.”

“그게 문제야!”

율리아는 그리고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디, 하늘에서 내 취향인 남자 하나 안떨어지나 몰라.”

“언젠간 네 미스터 라잇Mr. Right을 찾을 지도 모르지. 뭐.”

“세실리아, 친절한 조언 고마워.”

율리아가 손수건에 코를 흥 풀며 말했다. 아그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남자 필요 없어, 있으면 좋을지 몰라도.”

“너도 조금만 있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 안할 때가 올 지도 몰라.”

율리아가 황금빛의 눈동자를 떨구었다. 그때, 아그니스는 나를 바라보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 전에 이 나라를 뜨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관리할 영지가 있어서.”

“로즈블룸을 경영해 줘서 고마워, 아그니스. 네가 있어서 정말 힘이 된다.”

“그래. 그렇게 앞으로 고마워해주고, 공작 전하께 멋진 친척 있는지 좀 알아봐주련. 남자로.”

“물어 볼게.”

“농담이었어. 진짜로 물어보지는 마, 지체 높은 나으리는 내 쪽에서 사양이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서 우리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연 것은 슐츠 가의 시녀였다. 그녀는 슐츠 가문색인 크림슨 레드의 시녀복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레이디 다이애나, 곧 나가셔야 해요. 그리고 레이디 세실리아?”

“나에요.”

“로드 화이트께서 찾으십니다.”

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나간다고 해요.”

“그 새를 못 참으시네.”

율리아의 말에 아그니스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얘들아, 먼저 일어날게.”

내가 뒤돌아 문 쪽으로 걸으려 할 때, 발걸음이 뒤따랐다. 내 뒤에는 붉은 빛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가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세실리아.”

“다이애나.”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아준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인다.

“와 줘서 고마워, 세실리아.”

“나도 고마워.”

다이애나가 나를 놓아준다. 그리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가?”

“좋은 친구라서.”

“당연하지.”

다이애나의 말에, 눈빛에 모든게 담겨있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

“이제 지긋지긋한 파랑도 안녕인가 봐.”

“넌 정말, 좋은 레이디 슐츠가 될 거야.”

“나도 알아.”

다이애나가 붉은 입술을 휘며 미소지어보인다.

“이제, 다락방에서 동화를 읽던, 항해사를 꿈꾸던 어린 소녀는 안녕.”

그리고 그녀는 뒤돌았다. 나는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이애나와, 오스카의 결혼식은 아름다웠다. 다이애나는 예쁜 부케를 들고 있었고, 흰 제복, 그리고 한쪽 어깨에 붉은 망토를 두른 오스카는 정말 늠름해보였다.

“정말 예쁜 한 쌍이지 않습니까.”

제롬이 내게 미소지어보였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리의 결혼식도, 분명 이처럼 아름다울 겁니다.”

제롬이 속삭인다. 내가 작게 웃자, 그가 내 손을 잡아온다.

붉은 옷을 입은 추기경의 긴 주례가 이어졌다. 분위기는 더 없이 경건했다.

“……이토록, 레이디 그린힐은 이제 정당한 슐츠로서. 훌륭한 안주인이, 벗이, 조언자가 되길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 로드 오스카 슐츠께서는 레이디 그린힐을 아내로 맞으시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레이디 그린힐은, 로드 오스카 슐츠를 남편으로 맞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오스카는 초조한 눈빛으로 제 아내 될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부케를 한번 보고, 그리고 주위를 한번 보고, 다시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네.”

추기경은 흡족한 얼굴로 두 커플을 바라보았다.

“이상, 신랑은 신부의 베일을 넘겨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습니다.”

장내에 고요가 맴돌았다. 오스카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그 아름다운 눈을 휘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이애나의 베일을 넘겨주었다. 다이애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스카를 본다. 오스카가 조심스레 다이애나의 턱을 들어올려, 입을 맞춘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다이애나가 미소짓는다. 그리고 구두 굽을 들어, 다시 오스카에게 입을 맞춘다. 이번 입맞춤은 조금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 두 커플이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

“이제, 저는 두 아름다운 커플을, 신랑과 신부로 선언하겠습니다.”

성가가 흘러나온다. 다이애나는 부케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천천히.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율리아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나와, 계단을 걸어 율리아에게로 걸어갔다.

탄식이 쏟아져나왔다. 그때, 다이애나가 율리아의 손에 부케를 쥐어주었다.

“행운을 빌어.”

율리아는 조금 울먹이는 것 같았다. 오스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뒤뜰에서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모두 즐기시길.”

다이애나는 고개를 돌려 오스카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연회가 시작됐다.

연회라고 해서 기대했지만 슐츠는 슐츠. 재미있는 인형극이나, 연극은 없었다. 내가 연회에서 본 것은 어느 백작부인의 피아노 연주와, 어느 남작의 시 낭송이 전부였다.

그래서 아그니스가 말하길, 연회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미청년 오스카의 얼굴과 다이애나의 드레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숙녀들과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는 더욱 동의할 수 없었다. 식을 마치고 성당에서 걸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성당 밖의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본다. 이미 꽃이 피고 있었다. 봄이었구나.

“무슨 생각 하십니까.”

제롬이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벌써 봄이구나 해서요.”

“발리타로크로 여행 가기 가장 괜찮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가 나를 보며 웃어보인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제롬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혹시.”

내가 그를 바라본다. 그의 뒤로 어두운 밤하늘이 겹쳐보인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시는 거라면…….”

“아뇨.”

그는 아마 무도회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려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당신의 어떤 모습이던 사랑해요. 괜찮아요.”

정말 그랬다. 그가 물의 언어술사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그게 나를 위해서였다는 변명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세상 사람들이 제롬을 용서할 수 없더래도, 나만큼은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성서에 있는 모든 구절로. 어떤 죄악을 저지르던 무죄였다.

억울했지만 사랑이 그랬다. 그저, 나한테는 그랬다.

“저는 그날 밤 그 여자한테 먹이려던 독배를 들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나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리고 그를 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진중하게 바라본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결혼하면 뭐라도 다를까요?”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탄다. 그가 문을 닫고, 마차가 굴러간다.

“저는…….”

“네에.”

“당신을 사랑하기에, 항상 불안할 겁니다.”

그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저도 그래요.”

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린 이런 쪽에선, 정말 닮았어요. 그렇지 않나요, 제롬?”

“그러길 항상 바랍니다.”

나를 감싸는 그의 팔이 단단하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체온을 느낀다.

“곧 여행이네요. 제가 정말 기다렸었는데.”

그는 말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춰준다.

“발리타로크도, 새 안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기뻐요.”

나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 바꾸어 가지는 체온, 그리고 똑같은 마음의 형태.

어쩌면, 진짜 사랑인지도 몰랐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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