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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는 천국은 굳건한 낙원이어야 해서
무도회 9일 전. 세이지 궁.
D-9
제롬은 응접실에서 하녀가 내온 차를 음미했다. 시녀는 왕세자비가 곧 올 것이라고 거듭 전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제가 가져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콧대 높기로 유명한 세이지 궁의 수석시녀였다. 제롬은 그녀에게로 잠깐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 제가 들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과묵하고 까칠하다는데, 소문과는 다르게 말이 많았다. 아까부터 자꾸 시시콜콜한 건으로 말을 걸어 대서 제롬은 조금 짜증이 나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제롬은 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와 주셨군요, 공작.”
세이지 궁의 주인, 샬롯 왕세자비였다. 제롬은 일어나 예를 표했다.
“아, 앉아요. 앉아요. 어차피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와서 시녀들이 어찌나 소란인지. 내 시녀들을 상사병으로 죽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자주는 오지 마시길 바라요, 공.”
“명심하겠습니다.”
제롬이 착석하고, 그리고 샬롯 왕세자비도 제롬과 마주보며 앉았다.
“요즘 내 아기새들이 즐거운 소문을 전해주는데…….”
“그게 무슨 소문일지, 궁금해지는군요.”
“공이 세기의 커플을 이어 줬다면서?”
“오스카 경과 레이디 다이애나는 정말 좋은 커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롬이 샬롯을 힐끔 바라보았다. 샬롯은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두 사람을 억지로 결혼시키려 한 명분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 라는데. 내가 들은 것이 맞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제롬이 점잖게 차를 마셨다. 샬롯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운 손으로 박수를 짝 쳤다.
“그러고 보니 오스카 경과 레이디 세실리아 사이에 추문이 있었지, 그래.”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제롬의 손이 떨렸다. 샬롯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질투?”
“…….”
“하여간 남자들이란.”
샬롯은 다과를 집어들어 한 입 베어물었다. 제롬은 깔끔하게 답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결혼, 조금 앞당긴 것 뿐입니다.”
“뭐 그랬겠지. 공의 집착도 참 대단하다니까.”
“과찬이십니다.”
샬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턱을 괴고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 하러 온 건 아니겠고, 말이야. 무슨 일인데?”
“모르시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공도 그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샬롯이 관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제롬은 눈길도 주지 않고 깔끔하게 답했다.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가 물의 언어술사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말하시는 거라면, 예. 들었습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그러고 보니 요즘 다 물의 언어술사 얘기뿐이지.”
샬롯은 따분하다는 듯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의 뜻이 같을 것이라고 믿는데, 공.”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물의 언어술사의 죽음을 원해. 공도 그렇지 않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롬이 샬롯과 시선을 맞췄다. 샬롯은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괜히 찻잔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그녀는 따뜻한 차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목청을 골랐다. 하지만 말을 꺼낸 것은 제롬이 더 빨랐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공. 어떤 것이든 내가 가져다주지.”
“놀이터입니다.”
“뭐?”
“왕궁이면 족합니다.”
제롬이 미소지었다. 샬롯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해했다는 듯 미소로 응수했다.
“날짜는 무도회 날로 정하는 게 완벽하겠어.”
“그럼 무도회 날로 알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은 확신에 찬 눈빛을 주고받았다. 똑같은 눈빛, 똑같은 야망. 두 사람은 이런 쪽에 있어서 완벽한 동류였다. 같은 차가운 피가 흐르는 두 명의 냉혈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롬이 예를 차리고는 일어났다. 샬롯은 멀어지는 제롬의 뒷모습이 문 뒤로 사라질 때 까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무도회 이틀 전.
D-2
“공작 전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을 때, 제롬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제롬은 깃펜을 내려놓고는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연 것은 갈색 머리 하녀, 브리젯이었다. 딱 제롬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지?”
“레이디 세실리아에 대한 새 정보입니다, 로드.”
“고하라.”
그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과자를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제가 본 것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레이디 세실리아께서 제가 보기에는, 받으면 안 될 편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디 율리아 슐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떠나셨지요.”
“좋아, 더 말해 봐.”
제롬이 흥미를 보이자 하녀는 더욱 더 신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응접실에 있던 기사가 말하기를, 분명 레이디께서 응접실 문을 나설 때에 손에 디저트 상자를 들고 있었다고 하더랍니다. 저는 그것을 영 수상하게 여겨 복도에서 레이디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았습니다!”
하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레이디께서 그 디저트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주위를 살피시더니, 침대에 있는 배게 커버 안에다가 편지를 숨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군. 돌아가 봐.”
“예, 알겠습니다.”
제롬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가 작성하고 있었던 문서를 바라보았다. 목재 책상 위에 주먹쥔 제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율리아 슐츠라면 오스카 슐츠의 누이였나…….’
그는 그 편지가 오스카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말 세실리아가 오스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었을까. 두 사람이 최근 붙어 다니긴 했었는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실리아가 숨긴 그 편지를 봐야 했다.
무도회 하루 전
D-1
운이 좋게도, 세실리아가 자리를 비웠다. 아마 샬롯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었나. 제롬은 세실리아가 저택을 떠나자마자 방으로 서둘러 향했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배게 속을 뒤져보았다. 역시 편지가 있었다. 제롬의 손이 떨렸다.
제롬은 급히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색, 무향, 무취의 독이에요, 세실리.
당신이 현명하다면 어디에 쓸지 알겠지.
-샬롯
제롬은 손에 힘이 풀려 그만 편지를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샬롯은 오스카의 사촌이었고, 그랬기에 오스카의 사랑을 돕고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오스카와 세실리아의 사랑을.
아마 세실리아는 이 독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에게서 자유롭게 벗어나, 오스카의 품에 안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제롬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이 여자에게 이렇게 미치게 되었나. 이 여자의 치맛자락에, 이 여자의 미소에. 이 여자가 주는 따스함에. 행복에, 쾌락에.
이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죽여 없애 더 이상 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러면 제가 제 이성을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여자가 항상 위험에 처했다고 하면 본능부터 앞선다. 그래서 세실리아가 마르사 로렌스에게 납치되었을 때, 제 전력을 이끌고 마르사의 궁을 부순 것이었다.
그렇게 벤 칼라일 대공이 저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자, 세실리아는 성가시게 일을 치고 다녔고 그는 항상 그녀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게 멍청한 짓임을 앎에도.
그리고 이제 그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려고 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겐 세실리아가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세실리아 그녀를 구해오겠다는 잭 제커시스의 청을 승인한 것도 그였다. 아마 세실리아가 그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제롬 자신이 세실리아의 신실한 벗인 잭을 그런 위협 속으로 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세실리아는 그를 분명 미워했으리라.
잭이 그런 위협 속으로 제 자신을 던질 때, 제롬은 그 사실을 묵인했다. 심지어 허락까지 내어 주었다. 그리고 오스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이 사실을 세실리아에게 말한 뒤, 그녀를 꾀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너무 자주 붙어다녔다. 잭 제커시스의 장례식장에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밤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오스카가 세실리아를 꾀어낼 이유는 많았다. 첫 번째로, 세실리아는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으며,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두 번째로, 세실리아는 이젠 억만장자 상속녀였다. 아마 오스카는 세실리아의 부를 탐냈을 수도 있었다.
제롬은 탄식했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침착하게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서는 편지 봉투 속에서 흰 약포지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제 주머니 속에 숨겼다. 그리고서는 똑같은 약포지를 구해와, 그 속에 흰 설탕을 대신 넣고서는 다시 편지 안에다 집어넣었다.
그는 세실리아의 베개를 원상태로 해 놓고는, 방을 떠났다.
무도회 당일
D-DAY
무도회가 끝난 뒤였다. 세실리아는 제 침대에서 잠자고 있었고, 제롬은 서재에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았다. 그는 그리고서는 피식 웃었다. 폭소했다.
세실리아. 제가 사랑했던, 세실리아는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녀가 더없이 사랑스러워졌다. 그녀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더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기특했다.
그녀는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때, 그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그는 뒤돌았다.
“저입니다, 로드시여.”
현자이자, 가신인 헨리였다. 제롬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의뢰한 약에 대해서는 알아봤는가?”
“오오, 네. 그랬죠. 그랬습니다.”
늙은이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제롬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과는?”
“그 가루는 ‘이클립스’ 라는 무색, 무향, 무취의 독입니다요, 로드시여. 아주 구하기 힘든 독인데, 아직도 이런 것들이 유통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왕세자비 샬롯이 세실리아에게 편지에 동봉한 것은 독이 맞았다. 제롬은 상념에서 벗어나 노인 헨리를 바라보았다.
“아. 고맙네. 가루는 알아서 폐기하도록.”
“제 연구 자료로 사용해도 좋겠습니까, 로드?”
“그래. 그러도록.”
“감사합니다.”
늙은 현자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나갔다. 제롬은 하녀가 건넨 새 셔츠로 옷을 갈아입고는, 서재를 나섰다. 아직 끝나지 않은 볼일이 있었다.
응접실에 가니, 역시 예상하고 있었던 방문객이 있었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그 사내는 마치 갓 잡아 불태운 짐승과도 같이 억눌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밤의 패자, 세드릭 서덴베르크 황태자였다. 무려 옆 제국에서부터 먼-길을 한 손님이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롬이 얄궂은 승자를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태자는 인상을 구겼다.
“……이 수모는 꼭 되갚아 주지.”
“물의 언어술사도 죽었는데, 누구와 함께 그런 일을 감히 도모하시겠습니까.”
빌어먹을 자식. 황태자는 뇌까렸다. 제롬은 그 말을 무시하고는 황태자 앞에 가 앉았다.
“편히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편히 오게 해줬어야 말이지.”
“제 사람들이 조금 거칠긴 합니다만.”
“젠장할.”
황태자는 젊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역시 잘못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였다.
“어차피 오늘 내가 무도회장에 데리고 온 것은 가짜다.”
황태자의 말에 제롬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황태자는 묵묵히 이었다.
“진짜는 카사로 제국에 있지.”
“아아, 그렇습니까.”
제롬이 미소지어보였다.
“그럼 시험해보아야겠군요.”
“…….”
“그 말이 거짓이라면, 내일 카사로 왕국이 속절없이 불타겠지 않습니까.”
제롬의 말에 서덴베르크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는 거짓말을 누구보다 싫어해서 말입니다.”
“그래, 블러핑이었다.”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미간을 구겼다. 블러핑. 낮은 패를 가지고 있으면서 높은 패를 가진 양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했다. 제롬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는 여유롭게 응수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
“물의 언어술사는 앞으로도 없을 거고, 제가 없게 만들 겁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롬은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분노로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제롬은 개의치 않고 응접실의 문을 닫았다.
제롬은 천천히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간다. 문을 열자, 어두움 사이로 틈새의 빛이 밀려들어간다. 문 주변에 제 그림자가 진다. 제롬은 그 안에 저를 들이고 문을 닫는다.
그는 침대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잠에 든 세실리아를 가만 바라본다. 침대에 걸터앉아, 보배라도 되는 듯 그녀의 볼을 쓴다. 그리고 밀려들어오는 충족감에 미소짓는다.
당신이 사는 천국은 굳건한 낙원이어야 하니까. 제롬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네가 사는 천국은 굳건한 낙원이어야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