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
“다이애나.”
나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냥 가 버려, 세실리아.”
“다이애나.”
내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다이애나가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이 슬픔으로 일렁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준다. 다이애나는 뿌리치지 않는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 다이애나.”
“됐어.”
“두 사람, 결혼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말해주러 왔어.”
“……뭐?”
다이애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할게. 제롬…에게. 그러니까. 너희 둘 결혼에 대해 명한 거, 취소해 달라고.”
“아니.”
다이애나의 말은 날카롭고 단호했다.
“아니, 아니야. 공작 전하는 네가 이 사실을 안다는 걸 알면 안 돼.”
“뭐?”
“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님께서. 아, 세실리아. 제발.”
그녀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챘다. 그래서 순간 내가 쥔 잔에서 와인이 조금 출렁였다. 내 마음도 같이 철렁였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절박했다.
“제발, 제발. 공작님께는 그 이야기를 하지 말아줘. 내가 오스카와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다는 얘기. 네가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걸 공작 전하께서 알면, 그는 진노할거야.”
“왜?”
나는 다이애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얘기했다.
“왜, 내가 그 사실을 몰라야 하는데?”
그러자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야 공작님께서는 네게 그의 본모습을 들키지 않고 싶어하니까.”
“그게…무슨 소리야.”
“제롬 화이트 공작은, 정말 제대로 미친 사람이야. 세실리아. 너한테 미친 사람. 너 빼고 모두가 그걸 알아.”
“그래. 그랬었어.”
나는 깔끔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그 사람은 제인을 사랑해.”
“누구?”
“오늘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 여자 있잖아. 물의 언어술사.”
“일시적인 관심이겠지. 공작은 너한테 미쳐 있어. 제정신이 아니야.”
“이젠 아니야.”
내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다이애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스카가 오늘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 했어. 아주 끔찍한 일…….”
나는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은 물의 언어술사, 제인이 죽을 뻔 했던 날이긴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조소했다. 다이애나가 나를 바라본다.
“세실리아. 난 오스카와 결혼하는 게 나쁘지 않아. 내 마음은 평생 잭 제커시스 경에게 있을 거겠지만, 그래도 남편감 중에서 최선을 고르라면 그건 오스카겠지.”
다이애나는 쓸쓸한 눈빛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억지로, 이렇게 내가 마음조차 정리되지 않았을 때에. 단순히 너와 관련되어있는 나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결혼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 미안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괜찮아. 어차피 모두를 위한 결혼일거야. 사실 귀족들은 사랑으로만 결혼하는 게 아니잖아.”
그녀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귀족 영애였던 제 자신을 가장 싫어했던 다이애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제발 말하지 말아줘, 공작 전하께. 부탁이야.”
“알았어. 그럴게.”
“고마워. 세실리아. 내가 심술 부려서 미안해.”
다이애나가 제 눈물을 닦아냈다.
“정말 고마워.”
다이애나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났다. 그녀가 다시 뒤돌아 멀어진다.
독이 든 와인을 어떻게 폐기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 제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제인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정원에 난 수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마지막으로, 와인을 버리고 모든것을 정리하기 전에 제롬을 보고 싶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드디어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확실히 제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상대편 목소리는 조금 취한 듯한 제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수풀 뒤에 숨어서 멀찍이 그들을 지켜봤다. 집중을 하면 목소리가 잘 들릴 것 같았다.
“……우리 가문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신탁이죠.”
제롬의 목소리였다. 유리처럼 선명한 제인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나는 수풀을 헤치고 그 틈으로 흐릿한 그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인이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제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제롬은 소름끼치게 침착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게 어떤 예언이죠?”
“언젠가. 물의 언어술사가 율러 왕국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저네요.”
제인이 까르륵 웃는다. 제롬이 따라 웃는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의 언어술사인 당신에게 반하게 될 거라고 선지자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물과 불으로,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이 나라의 번창을 가져올 거라고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옳네요.”
제인이 수줍게 땅을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저는 공작 전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반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제롬의 말에 나는 숨을 헉 들이킨다. 다행이 두 사람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에 쥔 황금 잔을 꽉 쥐었다.
“모두가 당신의 위대한 힘을 두려워해요. 경외해요. 그리고 올려다보죠.”
제인의 손길이 제롬의 어깨를, 팔을 쓸어 손을 잡는다. 제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견제할 가장 훌륭한 수단이라고들 하죠. 카사로 제국, 릴케 신성국도 모두 나를 원해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제인이 제롬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당신을 원해요.”
그리고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내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진 일은 나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제롬이 제인을 밀어낸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잡아.”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원의 사방에서 까만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제롬이 나를 발견한 줄 알고 도망가려던 차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제인이 그 사내들의 손에 결박되어 바닥에 쳐박힌 것은 찰나였다.
제롬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내 손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황금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담긴 와인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쳤어요! 소리 지를거야!”
제인의 독기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롬은 비웃듯 응수했다.
“지르려면 지르십시오. 이곳은 어차피 정원 깊은 곳이라 인적이 드뭅니다.”
“…….”
“그 말은.”
제롬이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당신을 구해줄 사람은 없다는 말이겠지요.”
나는 입을 틀어막고는 주저앉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저것이 제롬의 진짜 모습이었다. 다이애나가 아까 내게 말해 주었던, 그의 진짜 모습.
나는 다시 수풀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제인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난 물의 언어술사라고요!”
“압니다.”
제롬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 잘 봤습니다. 레이디께서 내린 비 때문에 아직도 땅이 젖어있군요.”
“하.”
제인이 핏발어린 눈동자로 제롬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데 나를 죽이겠다고? 나는 물의 언어술사인데?”
“당신이 살아서 제게 좋을 게 뭡니까? 다들 당신을 손에 넣어서 내 숨통 조금 막아보겠다고 안달이신데. 당신이 없는 편이 제게 더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당신 옆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제롬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응수했다.
“저는 당신 도움따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건 카사로나, 릴케의 왕들이겠죠. 당신이 죽어주는 편이 오히려 제게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건 율러에 있는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안녕히 가십시오.”
제롬이 손짓했다. 그때 제인이 급하게 소리쳤다.
“예언! 예언이 있었잖아! 예언에 따르면 나는 당신 옆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어! 이건 옳지 않은 거라고! 당신과 나는 운명이야. 그런데 나를 이렇게…….”
“말 다 했습니까?”
제롬은 표정없는 얼굴로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울며 떨고 있었다. 제롬은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이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반하기라도 하기 전에 말입니다. 제 레이디가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는 슬슬 지루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
“죽여.”
제롬이 손짓하고는 단말마가 뒤따랐다. 그것은 제인의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제인은 조용히 목이 잘려 죽었다. 그 단말마는…….
나의 것이었다. 제롬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굴러 내 볼을 가른다.
새하얀 보름달, 그리고 광활한 밤 하늘. 그리고 그 아래 제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런.”
흰 셔츠자락에, 그의 얼굴에 피가 묻어 있다. 제인의 피였다. 그는 개의치 않다는 듯 거칠게 제 소매로 피를 훔쳐 내고서는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접고 앉는다.
‘도망쳐야 해.’
이성이 도망치라고 말한다. 온 몸에 있는 세포가 이 곳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허나,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태양.
내 앞, 저 남자는 마치 그 태양과 같아서. 나는 부나방처럼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의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이 장소를, 그의 앞을 떠나지 못한다.
“세실리아.”
그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담으면 미친 듯이 불안한데, 그런데 왜일까. 내 혈맥 속을 기묘한 안정감이 물들인다. 그가 그녀를 죽이고 내 앞에 있었다. 소름끼치게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그.
내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피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는. 이 밤 하늘에 떠 있던 시린 달마치 소름끼치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내 태양이자, 달이요. 낮과 밤이었다.
“떨고 계시는군요. 이런 제가 무섭습니까. 레이디?”
“아, 아뇨.”
내 목소리가 떨린다. 그가 낮게 웃는다.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
그가 내 턱을 들어올려 나를 본다. 내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물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진다. 나를 보고 미소짓는 그가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숨을 쉬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손에 황금 잔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런데.
“아, 안돼요! 독이에요!”
순간, 제롬이 내가 들고 있던 황금 잔을 빼앗아 마셨다. 내가 그에게서 뺏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잔을 깨끗이 비우고는 바닥에 내려놓는다.
“제, 제롬.”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황홀하게 웃으며, 제 입가를 훔친다.
“이 독은. 저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레이디.”
“이, 이게 무슨…….”
“독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가 내게 키스해왔다. 나는 그가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키스로, 그와의 키스로 온 몸의 세포가 반응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혀가 내 입천장을 간질이면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감정에 매몰되어 숨을 쉴 수가 없다. 키스만으로 목이 마르다. 더 원하게 된다. 그와, 나와의 화학작용. 혀가 얽힌다.
입술이 떨어지고, 그리고 엉켜 늘어난 침을 그가 제 손가락으로 닦아 준다.
“레이디는 항상 숨기고 싶은 것들을 베게 안에 숨기는 습성이라도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정말 귀엽습니다.”
“…….”
“그 독, 제게 주려던 것이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의 미소가 커진다.
“그러면?”
“물의 언어술사에게.”
내 말에, 제롬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의 금욕적이면서도, 동시에 광기어린 웃음이 그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다시 입을 맞춰와 나는 눈을 감았다.
이 남자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 가루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걸까.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