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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83화 (83/108)

<--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은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여자가 뭐라도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인입니다.”

“…….”

미소짓는 그녀는 정말 태양이라도 될 듯 찬란하게 미소지어보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브로치를 더듬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리아.”

샬롯 왕세자비였다. 나는 흔들리는 시선 속에 그녀를 담는다. 샬롯은 제가 내 구원이라도 되는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샬롯은 내게 손을 뻗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샬롯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롯이 내 뒤에서 속삭인다.

“진짜 무도회는 지금부터야.”

물의 언어술사, 제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행한 서덴베르크 황태자와 무언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제인의 시선이 내 주위로 향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로 고정되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정확하게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인이 동행한 황태자의 손을 놓고,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제인이 향한 곳은 역시나. 제롬의 앞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제인이 제롬에게 아름답게 미소지어보인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본다.

“만나고 싶었어요. 전하의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어왔답니다.”

“반갑습니다. 물의 언어술사는 정말 드물다고 들었는데, 영광입니다.”

물과 불. 마치 그림 같았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서로에게 동화처럼 빠져드는 것만 남을 것일까? 나는 어찌할 도리를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달리고 있었다.

“제롬!”

내 목소리. 그리고 제인은 나를 말간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눈치였다. 나는 제롬과 레이디 제인 사이에 껴서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제롬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웅성인다.

“아, 세실리아.”

제롬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아까의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싸늘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사무적으로 미소지어보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이럴 리가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가. 이렇게 물의 언어술사의 출현으로 한 순간에 분위기가 바뀔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제인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레이디…….”

“세실리아.”

내 이름을 말한 것은, 내가 아니라 제롬이었다.

“이 레이디의 이름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제인이 까르르 웃는다.

“그럼 레이디 세실리아. 잠깐 실례해 주시겠어요? 제가 이 멋진 신사분께 춤을 신청하려고 해서요.”

“아뇨, 안 돼요.”

나도 내 말에 놀랐다. 하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제롬의 옆자리는 내 것이었다. 이 분위기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 잠시 나가요. 실내 공기가 어지러워요.”

제롬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레이디 제인을 눈에 담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그때, 종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울려 퍼지는 여덟 번의 종소리. 여덟 시였다. 나는 제롬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제롬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세실리. 이쪽은 율러의 귀빈입니다.”

말도 안 돼. 제롬은 나에게 한 번도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제롬이 제인의 손을 잡고 멀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인이 잠시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미소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르사가 언젠가 말해준 예언이 떠올랐다. 언젠간, 물의 언어술사라고 불리는 여자가 나타나 내 자리를 뺏어 갈 거라고.

제롬은 물의 언어술사에게 운명적으로 마음을 빼앗기게 될 거라고.

물과 불. 나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인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제롬도 마찬가지였다.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파티장 바깥으로 달렸다. 쫒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등을 돌려 바라보면 일렁이는 수면 위에 달이 흔들린다. 돌을 던지면 깨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 나와 닮았다.

그때 느린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앞을 바라본다.

“여기 있었구나. 가여운, 가여운 세실리아.”

샬롯이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무너질 것 같은 나를 꼭 품에 안아 주었다.

“제롬은 아직도 그 여자와 있나요?”

내 눈에 눈물이 맺혀 앞이 흐릿했다. 샬롯은 내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며 속삭였다.

“예언은 예언이니까. 예언에 따르면…….”

“저도 예언이 뭔지 알아요!”

내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샬롯의 품에 파고들었다.

“물의 언어술사가 나타나면, 제롬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랑 사랑에 빠질 거라고 했어요. 운명처럼. 두 사람은 마치 물과 불이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오, 세실리아.”

“그 두 사람이 서로한테 끌리는 건 본능이라 했어요. 서로는 서로를 알아보고, 결국 찾아내 평생 함께 할 거라고.”

“쉬이.”

샬롯이 나를 토닥여 주었다. 나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 제롬이 그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샬롯도 봤어야 했어요.”

“세실리아.”

그녀가 악마라도 되듯,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당신은 나랑 약속한 게 있잖아. 모든 게 예언처럼 되지 않게 하겠다고. 응?”

그러자 나는 브로치 속에 넣어온 독약을 생각해냈다. 내가 물의 언어술사의 와인에 넣을 가루. 그러자 흐릿했던 생각들이 명료해진다. 이성이 제자리를 찾는다.

“당신은 아직 제롬의 약혼녀야.”

샬롯이 내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모든 걸 행동에 옮길 때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샬롯이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아홉시 사십분쯤 되는 시간이었다. 제롬은 제인과 떠난 뒤로부터 나를 찾지 않았고, 나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인과 말을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녀에게 독이 든 잔을 건넬 수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제롬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제롬과 제인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제롬과 제인이 가까워졌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책상 위에 있는 와인을 집어 마셨다.

물의 언어술사, 제인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다시 인사드리게 되었네요, 레이디 세실리아. 레이디가 제롬의 약혼녀인줄 몰랐는데…….”

“제롬?”

내가 그 말과 함께 제롬을 바라보자, 제롬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제롬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제인에게, 제롬이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실리아.”

제롬이 내 말을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은데, 뭐가 괜찮은 거지. 제인은 꽃처럼 웃고 있었다.

“제롬과 저는 제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제롬?”

“그렇습니다.”

제롬이 미소를 지으며 제인을 눈에 담았다. 제인은 뽐내듯 이었다.

“제가 율러에 비를 내리는 걸, 보고 싶지 않나요. 세실리아?”

“그래요.”

나는 싸늘하게 답했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겠죠.”

그 말에 제인이 예쁘게 미소지었다. 나는 눈썹 한 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당장 그 위대한 힘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 레이디 제인?”

“세실리아. 무례합니다.”

제롬이 제인 옆에서 내 말을 저지했다.

“물의 언어술사, 레이디 제인께서는 율러의…….”

“귀빈인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제롬.”

우리 사이의 공기가 싸늘해지자, 제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제 능력을 보여드리고 싶지만, 물의 언어를 구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한 염원’이랍니다. 레이디 세실리아께서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알고 있어요.”

예전에 오스카가 친절하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요?”

“물의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꽤나 힘이 든답니다. 특히 비를 내리는 일은, 정말 어렵죠. 거의 최상위 레벨의 물의 언어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를 위해 잠시 힘을 아껴 두겠어요. 저는 율러에 비를 내리려 하고 있거든요.”

“대단하시네요.”

내가 빈정거리자, 제롬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속으로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제롬과 제인은 운명이라니까.

그때, 왕세자비 샬롯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나와 샬롯의 눈이 마주쳤다. 샬롯이 안심하라는 듯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하신가요, 공작.”

“왕세자비 전하.”

제롬이 샬롯의 손을 받아들어 입을 맞추었다. 샬롯이 부채를 퍼덕이며 말했다.

“여기에 내가 찾는 여자들이 딱 모여있네요. 내 세실리아와, 그리고 레이디 제인.”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세자비 전하.”

“반가워요.”

샬롯이 제인에게 예쁘게 미소지어보였다.

“여자들끼리 시간을 좀 보내려고 하는데 공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제롬이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였다. 제인이 말을 가로챘다.

“아, 잠깐만요.”

나는 지루해져 시계를 흘끗 올려다본다. 아홉시 오십오분.

“보여드릴 게 있어요.”

제인이 미소지었다.

“사람들의 주목이 필요해요. 제가 곧 율러에 비를 내리겠어요.”

“비라니. 정말 기대됩니다.”

제롬이 제인을 보고 미소지어보였다. 샬롯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감추고는 환하게 미소했다.

“우리 모두가 마침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이네요. 제인 양이 내리는 비라. 정말 기대되네요. 그렇지 않나요, 세실리아?”

“네.”

나는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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