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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82화 (82/108)

<--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

한참 샬롯과 깔깔거리며 웃다가 돌아올 때 내 표정은 어두운 하늘처럼 음울했다. 이런 큰 책임감과 무거운 마음이라니. 물의 언어술사를 죽인 나를, 제롬은 뭐라고 생각할까? 미워할까, 싫어할까, 무섭다고 생각할까……. 그는 신탁의 당사자인 만큼 신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죽인다는 일이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이렇게 디저트를 먹으면서,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이냐고. 나는 끝없는 자책과 회의의 늪에 빠진다.

마차는 밤길을 가르고 있었고, 나는 숨이 막힌다. 밖을 바라보니 그것은 초승달이었다. 초승달이 기울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다.

바깥에 보이는 풍경. 정처 없이 흔들리는 갈대. 비현실적이다. 나는 마부를 부른다.

“마차 돌려요.”

“레이디?”

“마차, 돌려요.”

“그게 무슨…….”

이성이 마비된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야 했다. 나의 빛. 환한 아가페. 그것이 있는 곳은, 이 넓은 율러에서 한군데뿐이었다. 공동묘지였다.

“난 공동묘지로 가야 해요.”

“……레이디!”

“제발!”

나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먹먹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떠 보니 나는 싸늘한 공동묘지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는다.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갈대밭이 있다.

나는 그 갈대밭으로 걸어들어간다. 까마득한 밤하늘, 그리고 별, 그리고 달. 나를 감싸는 갈대. 나는 눈을 감고 갈대 사이를 가른다. 숨을 들이마쉰다. 하지만 폐부로 들어오는 것은 신선한 것이 아니라 온통 텁텁한 공기.

나는 천천히 눈을 떠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간다. 춤을 추듯 걸어나간다. 그곳에는, 공허한 땅 위에는 묘비가 있다. 나는 묘비의 글자를 읽지 않아도 그것이 잭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앞에 무릎꿇는다. 기도를 한다.

내 어깨를 잡는 손이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흰 옷을 입은 교황이 내 뒤에 있다. 나는 무릎을 꿇었고, 그는 나에게 성스러운 향유를 부어준다. 거룩하다.

“세실리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낮고 깊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안다.

“세실리.”

그 목소리와 함께 내 세상이 흐려진다. 그리고 암전, 천천히 현실이 내게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온다. 이번에 나는 진짜로 눈을 뜬다. 주위를 둘러본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눈을 두어번 깜박인다. 이곳은 마차 안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였다.

어디서부터 꿈이었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샬롯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잠시 마차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다.

“마차에서 주무셨던 모양입니다.”

오늘은 무도회 하루 전날 밤이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혀 제롬에게 그대로 안겼다.

“또 나쁜 꿈을 꾸셨습니까.”

그가 내 등을 천천히 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내일 무도회인데, 어서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내 목소리는 물에 젖은 듯 눅눅했다. 제롬이 나를 안아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실리.”

“고마워요.”

“샬롯 왕세자비와는 좋은 시간 보냈습니까.”

“그랬죠.”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라도 보듯 황홀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밤하늘, 그리고 보름달이 겹쳐보인다.

“내일 당신이 선물한 루비 목걸이도 하고 가야겠어요.”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겁니다.”

“제 드레스를 봤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예. 흰 빛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붉은 루비를 더욱 돋보이게 할 겁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잭과 내가 함께했었더라면 내가 무슨 드레스를 입었을지 생각도 해 본다. 아마 붉은색이었겠지.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머릿속을 비운다.

침대에 누워서는 너무 피곤해 눈을 감았다. 제롬은 나를 품에 넣고는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눈이 절로 감겼다. 제롬의 따스한 손이 나를 가만 쓴다.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내일 무도회가 정말 기대됩니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려 제롬을 본다. 그가 미소짓는다.

“저도요.”

나는 눈을 감는다.

다음 날 아침이 밝는다. 오늘은 무도회 날이었다.

나는 온 오전과 오후를 치장하는 데에 보냈고 이제 곧 왕궁으로 떠나야 했다. 방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천천히 전신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내가 보인다.

나는 순백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제롬이 내게 준 루비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가슴에는 수수한 브로치를 했다. 그것은 제롬이 내게 선물해준 보석 중에서 찾은 것이었는데, 로켓 형태로 디자인이 되어 있어 안에 사진과 같은 것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브로치 뚜껑을 열고, 그 빈 공간에 샬롯이 내게 준 약 가루를 종이에 싸 집어넣었다. 가루의 양이 많지도 않았고, 약포지를 조금 찢어내자 독약은 브로치 안에 안정적으로 들어갔다. 흰 드레스 위에 놓인 붉은 보석의 브로치가 유달리 새빨간 빛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나는 제롬에게 미소지어보였다. 제롬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나는 그런 충동이 들어 제롬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걸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앗, 자국 났다.”

내가 제롬의 볼에 손을 올리자. 제롬이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입술 자국이라면 오늘 밤 내내 그렇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 장난치시고, 손수건 빌려주세요.”

나는 그의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볼을 닦아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해 바깥으로 이끌었다.

“소피아 부인께 자수 놓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제가 당신 손수건에 자수를 놓으면 어떨 것 같아요, 제롬?”

“훌륭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웃었다. 오늘 밤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사람치고는 꽤나 태연하게.

“타시지요.”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가 뒤따라 타며, 문을 닫았다. 마차가 움직이며 출발한다. 드디어 무도회였다. 평범한 무도회가 아니라, 내 남자가 사랑할 여자가 모습을 드러낼 무도회였다. 장갑을 끼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서 긴장으로 땀이 났다.

내게 묻는다면, 무도회는 정말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왕이 축사, 그러니까 축하하는 말을 했고.

“……주신 우니베르의 뜻을 받들어, 이번 해에도 여러분께 기쁘게, ‘물의 언어술사 찾는 날’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이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말들을 주고받았고.

“잘 지내셨습니까, 로드 화이트.”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필리아스. 이쪽은 제 아내 될 사람 세실리아입니다.”

시종인이 봉을 쾅쾅 내리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왕 전하와, 왕비께서 첫 춤을 추겠습니다.”

음악이 내렸고, 그 두 사람이 훌륭한 첫 춤을 선보였다. 나는 왕과 왕비를 원으로 둘러싸고 있는 군중에 섞여 제롬의 옆에 서 있었다.

순간 건너편에서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샬롯과 눈이 마주쳐 몸을 움찔했다. 제롬이 나를 바라보았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가 낮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정말 무난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사람들은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평범한 무도회처럼.

나는 속으로 물의 언어술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생각했다. 초조했다.

“춤, 추시겠습니까.”

제롬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받아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는 내 허리를 부드럽게 잡았다.

우리는 춤을 추고 있는 여러 커플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흘러나온 노래는 낮은 첼로소리로 시작하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

현악기들이 각자의 소리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나는 음악 속에 취해들어 제롬의 리드에 따라 춤을 췄다. 드레스의 레이스가 내가 도는 데로, 나보다는 느리게, 하지만 예쁘게 팽그르 돌며 소용돌이쳤다. 나는 순간에 심취해 숨이 멎을 듯 그와 춤을 추었다.

“잘 추십니다.”

내가 돌아 제롬의 손을 잡았을 때, 그가 속삭였다. 나는 미소지었다. 음악이 바뀌고, 파트너 또한 바뀌었다. 그 다음에 내 손을 잡은 것은, 왕세자 알렉산더였다.

“궁금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웃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받아들며, 뒤를 힐끔 보았다. 제롬과 샬롯이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 때문이었을까, 샬롯의 지루하다는 눈빛이 그 순간만큼은 별을 갈아넣은 듯 빛나고 있었다.

“공작을 사로잡은 당신이 말입니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왕세자 알렉산더가 미소지어보였다. 장내를 매우는 첼로 소리가 그 순간만큼 웅장했다. 나는 바닥을 바라보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샬롯은 당신이 훌륭한 레이디 화이트가 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는 그럴 거예요.”

알렉산더가 음악에 맞춰 내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나를 다시 땅에 내려주었다. 나는 스텝을 기억하려고 하며 그와의 춤에 집중했다.

“온 율러의 사람들이, 당신을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꼽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르사도 죽었으니,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샬롯이라고 생각해요.”

“겸손하시군요.”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롬의 관심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주지 않아요.”

“하지만 그의 사랑은 그러했죠.”

“…….”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레이디 세실리아. 아니면 이제 곧 레이디 화이트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그래요.”

나는 빙글 돌아,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나와의 왕세자와의 간격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왕세자 전하는 그 호칭에 익숙해지셔야겠죠.”

“알렉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내 말과 함께 음악이 천천히 끝났다. 첼로가 그 웅장한 몸체를 울리며 내는 마지막 현의 울음소리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그리고 내가 다음 파트너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딱, 딱. 둔탁한 소리가 나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종인이 큰 목소리로 고했다.

“대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 전하, 세드릭 서덴베르크, 그리고 그분의 파트너. 레이디 제인입니다.”

시선의 끝, 왕궁 정문에는 한 사내와 그리고 여자가 서 있었다. 음악이 잦아들었다. 나는 내가 소피아 부인께 배운 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저 사내는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이자 ‘물의 언어술사’를 찾은 사람.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모두의 탄식과 함께, 그들이 층계를 걸어내려왔다. 나는 황태자의 옆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금발에 벽안을 하고 있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저 여자가 물의 언어술사겠지. 가슴이 뛰었다.

“반갑습니다.”

층계를 내려온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일까. 미소와는 달리, 황태자의 눈에는 광기가 찌들어 있었다. 나는 저런 빛을 띈 눈을 잘 안다.

열망. 욕망. 그리고 집착. 그의 눈빛은 노아나, 마르사의 것을 닮았다.

“저는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 세드릭 서덴베르크입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였다. 왕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옆나라의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한 불빛 아래서, 물의 언어술사가 입고 있는 푸른 드레스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이쪽은, 여러분이 궁금해 하셨던 물의 언어술사. 레이디 제인입니다.”

웅성임이 거세졌다. 하지만 서덴베르크 황태자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화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 주저앉았다. 저 여자였다. 물의 언어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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