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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80화 (80/108)

<--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일 권리 -->

오후 내내는 소피아 부인이 찾아와 항상 그랬듯, 내 교육을 담당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머리에 책 얹고 춤 연습하기. 처음에는 못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날카로운 호령 소리와, 매서운 회초리에 나름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에, 그렇지요. 하나, 둘, 셋. 턴!”

하녀 브리젯이 남자 역할을 맡아 나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다시 턴!”

소피아 부인의 시종, 레오나르도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감미로웠다. 나도 현악기를 배워 볼까? 생각하던 중에 머리에 있던 책이 툭 하고 바닥을 굴렀다.

“레이디!”

“아. 미안해요, 소피아 부인.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아뇨. 죄송해해야 할 건 레이디가 아닙니다. 레지나!”

소피아 부인이 날카롭게 호령하자 구석에 서 있던 왜소한 소녀 하나가 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이름은 레지나. 매 맞는 아이였다. 회초리 소리가 나고, 억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지켜본다.

소피아 릴케 후작부인.

릴케 신성국의 공주로 현재, 이 나라 왕의 정부이다. 그녀가 사교계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은 크지는 않지만, 예법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저 회초리를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소피아 부인을 거스르지 못한다. 예법에 있어서 그녀는 나보다 뛰어났으며, 훌륭한 선생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제 다시 책을 올려볼까요?”

소피아 부인의 말에, 브리젯이 내 머리 위로 다시 책을 올려준다. 나와 브리젯은 손을 맞댄다.

“레오나르도, 음악!”

다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스텝들을 기억하려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지루한 역사 수업이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 다행인 것은, 소피아 부인이 내게 가르치려는 내용이 내가 예전에 성당에서 배운 것들과 겹친다는 것이었다.

소피아 부인 뒤에서 힘없이 떨고 있는 레지나, 매맞는 아이를 보며 나는 도전정신을 불태웠다.

“이 땅에는 크게 세 왕국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되죠?”

“율러 왕국, 카사로 제국, 그리고 릴케 신성국입니다.”

“좋아요.”

소피아 부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율러 왕국의 왕가는?”

“베르디게츠 왕가입니다.”

“훌륭해요.”

나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소피아 부인의 질문공세는 계속되었다.

“카사로 제국의 왕가는 어떻게 되죠?”

“서덴베르크 왕가입니다.”

“율러 왕국과, 카사로 제국의 왕위계승자에 대해 말해보세요.”

“율러 왕국의 왕세자는 알렉산더 베르디게츠, 그리고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는 세드릭 서덴베르크입니다.”

“옳아요.”

서덴베르크. 서덴베르크. 저 이름이 안 외워져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름도 어려워서.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제롬의 방에서 읽었던 그 쪽지가 생각났다. 물의 언어술사를 찾은 것이 서덴베르크 황태자였나. 내가 생각에 빠져들기도 전 책상을 내리치는 날카로운 회초리의 소리가 나서, 몸을 움츠리며 나는 소피아 부인을 보았다.

“레이디.”

“네?”

“카사로 제국의 상징이 무엇이지요?”

“…….”

아, 뭐였더라. 생각하다가 소피아 부인 뒤에 있던 매맞는 아이, 레지나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세실리아!

“아쉽게 되었군요. 레…….”

“바람!”

나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소피아 부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다시 잦아들었다.

“율러는 화염, 카사로는 바람. 그리고 릴케 신성국은 하늘입니다.”

“좋아요.”

소피아 부인이 책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네, 소피아 부인.”

“다음번에는 대화 예법을 배우겠어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레이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을 보니 어느새 어둠이었다.

“이리 온, 레오나르도.”

소피아 부인의 시종 레오나르도가 바이올린 가방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귀에 걸린 귀걸이 두 쪽을 빼 손에 쥐었다.

“자.”

그리고 레지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온통 흐리멍텅해있던 그녀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가, 감사합니다.”

레지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내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브리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레이디? 레지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봉급을 받고 있고……. 그 귀걸이는 로드께서 선물해 주신 건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라면 내 것이 아니지. 그리고 귀걸이는 제롬이 내게 선물해준 내 것이야. 안 그래. 브리젯?”

“아, 예. 레이디. 그렇고말고요. 제가 실언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녀 브리젯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언은 고마워, 브리젯. 나는 이만 쉬고 싶어.”

“예. 알겠습니다, 레이디.”

브리젯이 레지나를 힐끔 보았다.

“너도 레이디 말 들었잖아. 어서 나가자.”

나는 그들이 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침대에 누웠다.

그 뒤에는 정해진 절차라도 되는 듯, 책을 좀 보다 침대에 누웠다. 이미 목욕은 오늘 하루에도 두 번을 해 몸에서는 좋은 향이 나고 있었고, 식사는 소피아 부인에게 예절을 배우며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은 일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인지. 사람이 행복하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 걸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어둠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샹들리에의 불을 아예 꺼 두었는지 실내가 어둡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침대 옆, 촛대 위에 타오르는 촛불들. 제롬이 왔다.

“깼습니까, 나의 세실리아.”

그가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바쁜 일들이 밀려서 늦었습니다.”

“으음.”

나는 다시 배게 위로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머리 밑,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느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는 베개를 정돈하는 척 하며 베개를 뒤로 뒤집는다.

제롬이 침대에 앉는다. 나를 바라본다.

“소피아 부인과의 수업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으음. 네. 정말 유익해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소피아 부인께선 정말 좋고…엄격한 선생님이세요.”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이 낮게 웃었다.

“너무 칭찬만 하는 교사는 성과를 만들기 힘들죠.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레이디께서 귀걸이를 잊으신 듯 해 제가 다시 가져왔습니다.”

제롬이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분명 매맞는 아이에게 주었던 것인데요.”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제롬은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세실리아, 아무리 그 아이를 가엾게 여겨도 이런 것들을 섣불리 줘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탐욕을 가벼이 여기는 자세는 좋지 않습니다.”

그는 엄격하게 말했다. 충분히 납득가능한 말들이었지만 서운한 감정은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 아이에게 준 선물이었어요.”

“사람은 하나를 주면 두 개를 바랍니다. 그리고 레이디께 똑같은 ‘선물’을 바라는 시종인들이 늘어나겠지요. 레이디가 그 아이를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아 그 아이의 봉급을 높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물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처럼 훈육당하는 게 좋지는 않았지만 옳은 소리는 옳은 소리였다. 나는 생각에 잠겨있다 불현 듯 무언가가 떠올라 제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에게 귀걸이를 준 걸 어떻게 안 거죠? 브리젯이었나요?”

“세실리아.”

“제가 너무 예민한 건가요, 아니면 브리젯이 제 사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맞는 걸까요? 제롬. 말해보세요.”

“세실리아.”

제롬이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하녀가 주제넘었어요.”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래요. 꼭 그래주세요.”

나는 팔짱을 꼈다. 제롬은 내 옆에 와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에게 기댄다.

“요즘 친구들이 갑자기 멀게만 느껴져요. 다이애나는 저에게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고요, 율리아는 얼굴 볼 틈도 없고요, 걱정돼요.”

“그렇군요.”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내 팔을 천천히 쓸었다.

“하지만 레이디에겐 제가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제겐 제롬이 있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제 눈에 담는다. 나는 입을 달싹인다.

“빨리 무도회가 끝나고, 발리타로크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레이디 화이트가 되고 싶어요. 아직도 당신 지붕 아래 있으면서 로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이상하죠.”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미소지어보였다. 나도 따라 웃었다.

“세실리아.”

“네?”

“세실리아에겐 저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가 내 뺨을 천천히 쓸었다. 나는 그의 손길에 나를 맡겼다.

“세실리아에게는 저 뿐이니까. 친구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밖에도 나가고, 무도회 전에 친구들도 자주 보고…….”

“세실리아.”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바깥은 세실리아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제롬, 그렇지 않아요. 최근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제롬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괜찮은걸요.”

“흐음, 제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시선을 맞춘다. 그의 거친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희롱한다. 가슴이 떨려서 집중할 수가 없다. 그의 입술과, 내 것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나를 빨아들일 것 같은 그 눈빛과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현혹한다.

“바깥은.”

그가 미소짓는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를 담는 빛의 방향이 수시로 변한다. 그리고 내가 보는 것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나는 숨을 들이킨다.

“세실리아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그가 입을 맞추어 온다. 나는 정신이 또 아찔해져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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