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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78화 (78/108)

<-- 물의 언어술사 -->

어제와 다르지 않은, 그 똑같은 밤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단지 화이트 공작의 성채가 아니라, 어느 낡아빠진 여관 안이었었는데 그곳은 온통 조용했다. 장내에 있는 것은 넷.

화이트 공작가의 탕아 요나단 화이트,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 세드릭 서덴베르크, 망토를 쓰고 있는 키가 작은 그림자 같은 사람과, 한 창부.

요나단 화이트가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들어 태웠다. 그러자 그를 줄곧 힐끔거리던 창부가 교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요나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서는 겸연쩍게,

“나도 하나 줘요.”

요나단은 헛웃음쳤다. 그리고서는 시리도록 푸는 눈을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꺼져.”

“물의 언어술사한테, 너무 박한 거 아니에요?”

창부의 말에 요나단 화이트가 떫게 웃었다.

“네가 정말 물의 언어술사였다면 줬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물의 언어술사라고 부를 거예요. 당신들 덕분에.”

창부는 낡아빠진 침대에 기대듯 섰다. 요나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그녀를 두 눈에 담았다. 창부는 그의 시선을 받는 것을 오히려 즐기는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희롱하며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그녀의 흰 앞니가 붉은 입술을 놓자, 요나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제인.”

창부가 색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요나단은 그녀를 희롱하듯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제인’. 하룻밤은 얼마지? 방금 조금 구미가 당겨서.”

“당신 같은 고운 나으리라면 공짜로 해 줄 수도 있어요.”

제인은 요나단의 목에 걸린 얇은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탐이 났다. 아무리 요나단이 제 동생에게 밀려나 공작이 되지 못했다 해도 화이트는 화이트. 귀족이었다. 평소 거리에서 만났더라면 그녀는 그의 발끝조차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겨보고 싶었다.

제인이 혀로 그녀의 입술을 훑을 때, 요나단이 제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됐어. 방금 식욕 떨어졌거든.”

“그러시던가. 나는 어차피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제인이 턱을 위로 치켜올리며 말했다. 세드릭 서덴베르크,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일이 잘 풀리면 말이지.”

세드릭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실내를 비추는 유일한 광원은 거의 끝이 다가오는 짧은 촛불 하나. 남은 양초의 키보다 불꽃의 키가 더 큰 것만 같았다. 촛불이 흔들리고, 네 사람의 그림자 또한 한 번 더 흔들렸다.

순간이 마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현과 같이 날카롭다. 하지만 무엇이 방 안을 그렇게 눅눅하게 만드는 것일까. 밖에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비가 오기 전, 그 딱 애매한 정도의 어두움과 우울.

“무도회 날에 비가 올 것이라는 게 확실한가, 벨?”

세드릭 서덴베르크의 시선이 망토를 쓴 인영에게로 향했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람. 요나단은 저 꼬맹이도 있었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인영의 키는 세드릭의 허리에 올 정도로 크고, 골격으로 봐서는 꼭 어린아이 일 것 같다. 하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원숙했다.

“맞아.”

후드 속에서 작은 손이 튀어나와 후드를 넘겼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덴베르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요나단 화이트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진심이냐, 서덴베르크? 이 열 세 살짜리 꼬맹이 말만 믿고…….”

“릴케 신성국의 열 네 번째 공주시다, 화이트. 말을 조심해라.”

요나단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세드릭은 그에게 눈짓으로 경고했지만 요나단은 완강했다. 냉소의 정석. 수많은 실패가 어우러진 요나단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열 네 번째라니, 정말 릴케의 왕도 대애-단하시군 그래. 여러 가지 의미로.”

“화이트.”

“릴케의 왕인지, 정력의 왕이신지. 하여간에 씨 뿌리는 솜씨 하나는 참.”

서덴베르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후드를 쓰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대신 사과하지. 질이 좋지 않은 사내라. 혈통값을 못 하는 걸로 유명하지.”

소녀의 금빛 눈동자가 요나단 화이트에게로 향했다. 요나단은 허세라도 부리듯 시가를 꼬나물며 소녀를 내려다보았지만, 소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왜 당신 대신 당신의 동생이 공작이 된지 알겠어.”

“뭐, 쪼끄만한 게 말 다 했냐?”

“눈 아래 깔린 다크써클, 셔츠에 묻은 립스틱자국, 입가에 눌러붙은 위스키. 천재로 태어났지만 비틀어진 성정 탓에 사람들을 모두 잃고, 패망한 그 유명한 화이트 가문의 장남.”

소녀는 오히려 당돌하게 웃어보이며 요나단을 올려다보았다.

“디어뮈르 전쟁이 났을 때는, 가장 잘하는 일을 하고 계셨다지? 비 쫄딱 맞은 개마냥 집을 지키기. 제 동생이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때 말이야.”

“……닥쳐.”

“아, 더 말해야 할까? 당신 같은 사람이 이 계획의 일부라니 정말 구역질나.”

방금까지만 해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요나단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의 눈이 공허했고, 턱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요나단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비틀대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벨은 그에게서 뒤돌아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황태자 서덴베르크를 보았다.

“비는 정확히 무도회가 열리는 날 열시에 내릴 거야. 그리고 우리의 뛰어난 여배우 제인 양이 그 때에 맞추어 물의 언어술사를 연기하면 되는 거지.”

“확실합니까.”

“나는 우리 신성국에서 제일가는 하늘의 언어술사야. 내 말은 항상 옳아.”

“좋습니다. 자, 그럼 계획은 이러하니 화이트 너는…….”

서덴베르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이트?”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화이트!”

방에 남은 인영은 오직 세 개. 세 개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창부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젠장, 화이트!”

세드릭은 그제야 열린 방문을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문을 열어젖힌 뒤 밖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그는 걸었다가, 뛰기 시작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요나단이 있어야 했다. 세드릭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 * *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두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방에 남은 것은 릴케의 공주 벨과, 그리고 창부 제인. 어둠 속 제인의 푸른 눈동자가 벨을 담았다. 저 여자가 릴케 신성국의 공주. 그리고 가장 뛰어난 하늘의 언어술사. 하늘의 언어술사는 하늘의 기운을 읽었다. 그야말로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재능. 타고나기도 어렵다는데, 그 많고 많은 릴케 신성국의 공주중에서도 최고라니.

‘27, 26, 25…….’

벨은 바닥에 발을 톡톡 치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제인은 그녀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을 연신 꼼지락댔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쭉 웃으며 아까부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두 남자가 아까부터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물의 언어술사를 연기해 주십시오.’

작전이 잘 먹힐까. 제인은 황태자의 말을 곱씹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말려든 게 아닐까. 그녀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돈과 공작의 아내 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부나방처럼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를 키워갔다. 같은 창부 친구들끼리 웃으며 돈을 세고 걱정 없이 보냈던 밤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번쩍, 꽈광! 실내가 반짝이더니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

“고, 공주님.”

제인의 목소리는 끝이 갈라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둥이 무서웠다.

“쉿.”

벨은 제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다시 세는 것을 계속했다.

“곧 폭풍이 몰려와.”

벨이 양초 위에서 타는 환한 불빛을 바라보고는 웃어보였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광기에 절어 있었다. 한없이도 무미건조했던 얼굴이 저렇게 광기에 절어 물러질 수도 있구나. 제인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안 오지, 그나마 남은 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

할 수만 있다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저 여자도, 요나단 화이트라는 사람도, 황태자라는 사람도 다 이상했다.

그때, 공주 벨의 낮고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3, 2, 1…….”

“꺄악!”

콰광. 제인의 비명소리와 함께 파스스 양초가 수명을 다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벨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비…….”

어둠 속에서 제인은 주저앉아 귀를 막고 떨기 시작했다. 천둥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실내에 가득 찼다. 벨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저벅, 저벅 소리가 제인에게 가까워진다.

위를 올려다보자 온통 암흑이었다. 제인은 어둠을 견딜 수 없었다. 순간 번쩍, 다시 번개가 치고 꽈광 천둥이 내리꽂히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반짝이며 공주 벨의 광기어린 미소가 반전된다. 순간, 목에 내려앉는 차가운 감촉. 창부 제인은 위를 천천히 올려다본다.

릴케의 공주, 유능한 하늘의 언어술사. 벨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가여운 것.”

그녀가 황홀경으로 미소지었다.

“어쩜 이렇게, 생명의 빛이 이렇게 옅을 수가 있을까.”

벨은 깔깔대며 웃었다. 제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에 참여하는 대가로 받은 돈은 다 써버린 지 오래. 퇴로는 없었다.

‘그래. 나, 나는 곧 공작부인이 될 수 있다고 황태자가 말했어. 제롬 공작의 옆자리를…….’

창부 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가 앞, 후드를 쓴 인영을 바라보았다. 번개가 쳤다.

‘물의 언어술사는 없어. 어차피 없을 거라면 내가 될 거야.’

제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팔짱을 낀 채 시린 양 팔을 쓰다듬었다.

* * *

“화이트!”

서덴베르크 황태자는 빗속을 가르며 뛰고 있었다. 그는 젠장,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리를 뒤졌다. 소나기이려나, 이미 비가 거세게 오고 있었기에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서덴베르크는 핏발이 오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덴베르크는 걸음 속도를 낮췄다. 어느 낡은 좌판 아래 요나단 화이트가 웅크려 있었다. 서덴베르크는 무릎을 짚고는 가쁜 숨을 삼켰다.

“화이트.”

두 사내의 눈이 빗 속에서 마주쳤다.

“젠장할.”

요나단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서덴베르크의 고운 턱 아래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곧 무도회가 다가온다고.”

“집어쳐.”

요나단이 싸늘하게 말했다.

“화이트! 난 지금 네 도움이 절실하다고. 정신 차리고 일어나.”

“어차피 처음부터 다 미친 짓이었어. 물의 언어술사는 없어. 너도 알 거 아냐. 그러니까 되도 않는 하늘의 언어술사를 불러서 이 일을 꾸민 거 아니겠어.”

“…….”

“다시는 네 나라로 안 갈 테니까 이제 나를 좀 내버려 둬. 더 이상 연루되고 싶지 않으니까.”

요나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빗속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물의 언어술사가 없다면 만들면 돼.”

그 말에 요나단이 뒤돌았다. 요나단은 인상을 구기며 처절하게 소리질렀다.

“물의 언어술사 따위는 어쨌든 없다고!”

비가 흥건한 돌바닥을 요나단의 낡은 구두가 타박타박 밟았다. 요나단은 세드릭의 멱살을 힘껏 움켜쥐었다. 두 사내의 시선이 만났다.

“내 동생이랑 엮이지 마. 그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너보다는 최소한 제정신이겠지.”

서덴베르크는 요나단을 거칠게 떼어냈다. 요나단이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그 새끼는 내 아버지를 죽였어! 나와 그 새끼의 아버지를!”

“그래서?”

“그래서? 그래애서? 그 새끼는 괴물이야. 제롬 화이트, 그 놈은 괴물이라고. 그 잘난 신사적인 프레임 뒤에서 제 본성을 숨기고 있는 괴물! 그런데 진짜 물의 언어술사도 아닌 가짜로 내 동생새끼랑 뭘 해보려 한다고? 제정신이 아닌 건 너야, 서덴베르크!”

그때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요나단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고, 서덴베르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서덴베르크의 입술 사이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래, 난 제정신이 아니야.”

서덴베르크는 싸늘하게 응수했다. 요나단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잘난 황태자 전하. 그럼 혼자 잘 해 보시던가. 어차피 내 타깃은 내 동생이 아니거든.”

그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붉은 피가 바닥의 빗물에 아지랑이지며 스며든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 데, 너네 그러단 싹 다 죽을거야. 잘 죽어.”

요나단은 힘없이 손을 들고는 멀어졌다. 서덴베르크는 그런 그가 점이 될 때 까지 가만 바라보며 빗 속에 서있었다.

‘진짜는 누구인가.’

서덴베르크는 잠시 생각했다.

‘진짜 물의 언어술사는 어디에 있다는 거지?’

쏴아-. 비내리는 소리. 그는 숨을 헐떡인다.

‘아니, 진짜는 없다. 내가 찾지 못한 것이라면 차라리 진짜는 없어야 한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젓고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비가 그의 얼굴을 톡톡 때린다. 그는 그것으로 이성을 씻어내듯 세수 하고서 뒤돈다. 서덴베르크의 까만 망토가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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