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76화 (76/108)

<-- 비가 내린 후에는 -->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오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갑갑했다. 제롬이 갑갑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곧 일어나려고 하고 있는데 그 일의 당사자인 제롬은 도움이 안 될 것이었고, 내가 내 스스로 해결을 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쳐도 늘 원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가려고 하면 그 앞에 제롬이 있다. 나를 데리고 꼭 원점으로 향한다.

내 기억 조각을 퀼트라도 되듯 짜맞추어본다. 나를 도울 의향이 있는 사람은 목적이 맞는 왕세자비. 그리고 도울 듯 하다가 갑자기 관조의 자세를 취하는 애매한 조력자 오스카.

그런 오스카와 나와의 아무것도 아닌 사이를 의심하는 율리아. 그래도 디자이너로서의 야망을 버리지 못해 내 옆에 불안하게 맴도는 율리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복잡하다.

이럴 때 왕세자비가 뭐라고 했더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쉰다. 내쉰다. 제롬은 역시 화가 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입을 떼었다.

“율리아 슐츠 양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율리아가요?”

“예.”

“왜요?”

“소문이…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즘 오스카 경과 레이디 다이애나의 불화로 두 분의 관계가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오스카 경과 세실리아가 같이 시간을 보내서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제롬의 목소리는 꽤 진중했다.

“오스카 슐츠 경과 자꾸 할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잭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럼 샬롯 왕세자비와 최근에 어울린 것은 또 무엇입니까. 샬롯 왕세자비와 오스카 슐츠 경이 사촌이라서 그렇습니까?”

“제롬!”

그의 눈빛에서 보인 그것은 무엇일까. 제롬이 처음으로 나에게 보여준 싸늘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만 말을 잃는다.

내가 그를 안심시키면, 내가 그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된다. 하지만 그가 정한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면 이 사람은 이를 세운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물의 언어술사를 죽여 이 사람 옆자리에 머물고 싶은 만큼. 하지만 이 사람은 나를 그것보다 더 아낀다.

하지만 그가 물의 언어술사를 보고 첫눈에, 운명처럼 반해 물의 언어술사를 사랑하게 되면?

“샬롯과 나는 친구예요. 좋은 친구. 그래서 친구끼리 시간을 보냈을 뿐이에요. 그리고 오스카는 잭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을 뿐이고요.”

“제가.”

제롬은 나를 바라보았다. 바깥은 어두웠고,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 눈앞엔 어둠뿐이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은 온기 없이 싸늘한 채로, 정중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요.”

“죄송합니다.”

“그런 소문이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창밖을 보았다.

“요즘 저와 오스카 경이 자주 어울렸던 건 사실이니까. 우리는 가진 게 정 뿐인 벗이었지만 이야기가 잘 통해서, 또 잭의 일로 자주 대화했어요. 하지만.”

나는 팔짱을 끼고 제롬을 보았다.

“제롬. 이건 내 일이잖아요. 제롬이 궁금한 게 있었더라면 내게 물은 다음, 내 말을 믿었어야 했어요. 제롬이 불안한 건 알아요. 그런데 나를 믿지 못하면 안 돼요.”

양심에 찔리긴 했다. 온전히 잭의 일로 오스카와 대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온전히 친분을 쌓자는 목적으로 샬롯과 같이 어울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당신이 사랑할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나의 선善을 위해서. 그렇지만 내가 그걸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나에게 미쳐있는 당신이, 이런 내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다가도 물의 언어술사를 만나게 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첫눈에 반해버려서,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려는 나를 비웃고, 되레 그 화살을 내 심장에 겨눌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럼 정말로 불행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롬은 정중히 사과했다.

“제가 너무 예민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정확하다. 당신의 동물적인 감각은 내가 놀랄 정도로 정확했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 주세요.”

나는 아양을 부리듯 제롬의 팔에 내 것을 끼워넣었다. 제롬이 나를 가만 내려다보자, 나는 부러 예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소문을 지워주세요. 저와, 오스카에 대한 추문 모두. 불쾌해요. 그런 식으로 얽히는 건. 그리고 율리아에게도 민폐인걸요.”

“흐음.”

하지만 제롬은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앞을 바라보았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그러겠습니까.”

“네?”

“이번 무도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롬, 지금 뭐라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그대로 두면 수그러질 소문을, 왜 굳이 건드려 더 크게 만들겠습니까. 억지로 지우려고 하면 더 커지는 것이 소문입니다.”

그가 흡족하듯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제롬의 눈에 맺힌 야망이 대단했다.

“레이디께서도,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좋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번 무도회에 가야 했다.

내가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물의 언어술사가 죽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제롬은 물의 언어술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예언처럼.

이렇게라도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제롬이 내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제 생각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인상 찌푸리고 불안에 떠시는 것을 보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내 턱을 놓아주고, 그의 힘에 밀려 몸이 뒤로 넘어간다. 이곳에는 나와 제롬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위에 있는 제롬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텁텁한 마차의 실내 공기, 그리고 내 위에 있는 황홀하게 아름다운 사내. 눈이 마주치자, 욕정이 어린 그의 눈이 내게로 향한다. 원해진다는 기분. 특이했다.

내가 고개를 돌린다. 그는 내게 고개를 기울인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벌입니다.”

“앗.”

목에서 고통이 몰려온다. 그는 조각이라도 하려는 듯, 내 턱을 꽉 붙잡고, 목에 제 흔적을 새기기 시작했다. 힘이 없었다. 머리는 복잡했고, 제롬은 나를 무도회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데 내가 무슨 말을 할까.

나는 숨을 헐떡인다. 그는 내 쇄골을 지분대다, 나를 내려다본다. 그의 큰 손이 내 뺨을 감싼다. 눈이 마주친다. 그가 소매로 제 입가를 훔친다.

“이렇게 치사한 짓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둠 속에서, 그의 푸른 눈만 보인다. 나를 원하는, 내 인생을 진창으로 끌어내려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나의 빛. 나의 사람. 나의 안식처.

“탐하고, 탐해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다. 때맞춰 마차가 멈춘다.

무도회에 가지 못하게 된다니. 나는 그것에 대해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냥 침묵했다. 그게 운명인가 생각도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 물의 언어술사가 내 자리를 꿰차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므로 운명 앞에 한없이 나약한 나는, 그저 순응하기로 했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제롬은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손빗질해보기도 하고, 제 멋대로 그것을 들어 입을 맞추기도 한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세실리아.”

제롬이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는 내가 그의 영역 안에 있을 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완벽한가. 나와 제롬은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물의 언어술사가 끼어들 여지가 아주 아주 많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픕니까?”

그가 나를 달래듯, 내 옆자리에 누워 허리를 슬슬 쓴다.

“저를 보십시오.”

나는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내 목덜미를 본다. 제롬이 얼마나 제멋대로 키스마크를 새겨 놓았는지 온통 붉어 내일은 멍자국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무도회에 가고 싶습니까?”

그의 말에 내가 몸을 일으켜 그를 본다. 제롬이 눈을 곱게 휘어 보인다.

“그런 눈치인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당치도 않는 소문 때문에 무도회에 불참하라니, 너무해요.”

“그래서 지금 기분이 상한 겁니까?”

“그래요. 먼저 잘 거니까 제발 귀찮게 하지 마요.”

나는 다시 등을 돌려 눕고 이불을 한껏 끌어안았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내가 다시 몸을 일으켜 그를 보았다. 제롬은 나른한 미소로 침대 벽에 기댔다. 그의 수려한 반라가 드러난다. 그가 여유롭게 나를 보며 입술을 휘어 보였다.

“레이디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무도회에 가는 데 당신 허락은 필요 없어요.”

“단순히 무도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선을 둘 곳을 모른 채로 침을 꿀꺽 삼킨다. 제롬이 가끔씩 저렇게 작정하고 나를 유혹하려고 하면 아무리 화난 마음이라도 쉽게 누그러지고 말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그가 내 턱을 들어올려 나를 보았다.

“당신이 싫어하는 그 소문도, 제국에서 떠돌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제롬의 시선이 네글리제 뒤의 내 맨 살로 향한다.

“심술궂으시네요, 공작 전하.”

귀에 꽂은 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시선을 가린다. 머리카락으로 옆이 조금 가려진 시야,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꼬며 제롬을 바라본다. 앞니로 깨문 입술이 스르르 제 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마음에 들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는 마주본다. 내 손길이 제롬의 귀를 쓸고, 볼을 쓸고, 턱을 쓸어 아래로 향한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그가 내 쇄골을 다시 한번 탐한다. 쾌락으로 시야가 흐려진다.

아, 나의 에로스.

누가 나에게 그를 앗아갈 수 있단 말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