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74화 (7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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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이 밝자, 율리아가 왔다. 물론 율리아는 부티크를 운영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비즈니스 차로 온 것이었다. 율리아는 차기 공작부인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며 꽤나 이 시간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왜,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디자이너다.’ 라는 말도 있잖아.”

율리아가 말을 마치고서는 까르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부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차기 레이디 화이트.”

“글쎄. 다 마음에 드는데. 되도록 흰색이 많이 섞인 드레스로 입고 싶어.”

“흰색과, 빨간색. 흰색이 주가 되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아니.”

나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냥 흰색만.”

“좋아.”

율리아는 급하게 무언가를 메모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보았다.

“와, 세상에. 세실리아가 빨간색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니. 이건 마치 악마가 이카로스를 할부로 주고 입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게 무슨 이야기야?”

“그러니까, 새삼. 네 드레스에서 붉은 끼가 빠진다는 게 신기해서. 넌 항상 붉은 계통 옷을 즐겨 입었잖아.”

“아. 난 더 이상 로즈가 아닐 거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율리아도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그저 으쓱하며 메모한 것을 북북 긋고 그 아래 새로 무언가를 메모하는 듯 했다.

“그래, 너무 빨간색만 고집하는 것도 좋지 않지.”

“그러게.”

옷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는, 그저 평범한 친구들 사이의 이야기였다.

“오스카는 잘 지내?”

“아, 물론 그렇지. 그런데…….”

율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고는 내게 고개를 낮춰 이야기했다.

“다이애나랑 사이가 좀 안 좋아.”

“정말? 왜?”

“물론 그렇겠지. 너도 생각해봐. 예를 들어 공작 전하께서 옛 짝사랑이 있는데, 음. 이름을 대강 캐서린이라고 해 보자. 그래. 그러니까 캐서린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하가 밤낮으로 슬퍼하기만 하면 너는 어떤 기분이겠니?”

“안…좋겠지?”

“그래! 그거야! 잭이 죽은 뒤로, 다이애나가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슬퍼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스카 속이 어떻겠냔 말이야.”

그쪽 사정도 퍽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머리 아프겠네.”

“그렇지, 그렇지. 뭐 산다는 게 안 그럴 때가 얼마나 많겠느냐마는.”

율리아가 거들었다. 그녀가 차를 음미하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연애사업은 좀 어때? 괜찮아?”

“나쁘지 않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율리아는 오히려 제 이야기라도 되는 듯 신나 있었다.

“참, 이번 무도회만 끝나면 발리타로크로 간다고 했었니?”

“응. 제롬이랑 여행 꼭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어.”

“세실리아!”

율리아가 눈을 빛내며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그건 그냥 ‘여행’ 이 아니잖아. 자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주로 화이트 가문 사람이 발리타로크로 제 연인을 데려가는 건, 결혼을 하기 위한 거의 마지막 절차 비슷한 거잖아. 그래서 발리타로크의 별칭이 괜히 ‘용의 둥지’ 가 아닌 거라고. 세상에, 세실리아. 너 정말 몰랐구나.”

“아, 그래. 상기시켜줘서 고마워. 율리아.”

나는 손가락에 있는, 내 반지를 바라보았다. 한 때에는, 족쇄처럼 여겨졌던 반지. 지금은 무언가가 달랐다. 나는 레이디 화이트가 되고 싶었다. 제롬의 옆에 오랫동안 있고 싶었다.

상념을 방해한 것은 율리아의 들뜬 목소리였다.

“세실리아. 그러고보니 나, 요즘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어. 이번 무도회에는 분명 카사로 제국의 서덴베르크 황태자도 올 거라고 해!”

“서덴베르크?”

서덴베르크, 서덴베르크, 내가 이 이름을 어디에서 봤더라. 그러다 나는 떠올려냈다. 그래. 그때 본 전서구용 쪽지. 제롬의 책상 위에서 내가 찾은 쪽지에 적혀 있었던 이름이었다.

‘요나단 화이트 경과, 그의 잔당들 그리고 세드릭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물의 언어술사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 그 쪽지였다. 분명 이번 무도회에 물의 언어술사가 나타날 것이었다면 그와 관련되어있는 황태자 또한 모습을 드러내겠지. 나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응?”

“요나단 화이트라는 사람이 누구야?”

요나단 화이트. 서덴베르크 황태자와 나란히 이름을 올린, 물의 언어술사를 찾았다는 사람이었다. 율리아는 그 이름에 꽤나 놀란 것 같은 눈치였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 제롬 화이트 공작전하의 형제이잖아. 그러니까 화이트 가의 장남 되시는 분.”

“그렇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사람들은 제롬 공작 앞에서 그 사람 이야기를 많이 안 해.”

“아, 아냐. 그냥 역사책에서 읽은 이름 중에서 기억이 나서.”

“세실리아.”

율리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현재 역사책에서 ‘요나단 화이트’ 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은 없어. 패자의 이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거거든.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든…….”

그때 문이 열렸다. 우리 둘은 화들짝 놀라 문 뒤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롬!”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일어났다. 제롬은 나를 보며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레이디들의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이제 갈 시간입니다.”

나는 구석에 놓인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간이 이렇게 된 줄 정말 몰랐네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율리아는 수첩과 카탈로그를 챙겨 예를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멀어졌다. 정적이 있고, 나는 제롬의 에스코트를 받아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제롬은 어제보다는 조금 더 ‘안정적인’ 표정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만 남게 되자 그가 내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예전부터 이렇게 함께, 무도회를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저도요.”

그러고 보니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그는 나에게 같이 건국제에 가자며 초대장을 보냈고, 나는 어린 마음에 또 그것을 거절했었지. 그는 아마도 이 순간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려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애틋한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얼마나 애탔었던가. 그는 나의 감정보다 몇 걸음 앞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먼저 좋아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항상 조급했다. 나를 항상 바라보며 갈구했다.

그러던 지금은 무언가, 그 천칭이 어마어마한 힘의 상충으로 균형을 찾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서로를 원하는 사랑이 깊어서, 같이 깊어서 그래서 균형이다.

우리는 성을 나와, 화이트 가문의 마굿간에서 제롬의 애마를 보고 있었다. 그 말은 보통의 말보다는 조금 더 크고 체격이 우람했는데, 푸레질하는 그 발의 근육이 어마무지했다.

“아버지께서 제게 선물하신 말입니다. 망아지적부터 제가 돌봤습니다.”

“근사하네요.”

나도 조심스레 말에게 손을 데어 보았다. 말이 놀라며 히히힝 울음소리를 냈다.

“조심하십시오.”

제롬이 말의 볼을 쓰다듬어 안심시키고는 나를 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아름답다.

“썸머는 낯선 사람에게 면역이 거의 없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땐, 주로 당근을 쓰죠.”

“당근이요?”

그가 구석의 양동이에서 빛깔고운 당근 하나를 꺼냈다. 그가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천천히, 입에 가져다 주면 됩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며 말의 코 근처에 당근을 가져다 주었다. 말의 촉촉한 코가 벌름대더니, 조금 순박해진 눈으로 내 당근을 훑었다. 그는 조금 탐색하는 듯 싶다가 당근을 와삭 베어물었다. 썸머는 놀라울 정도로 맛있게 당근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 기분이 좋은지 기분좋은 울음소리를 내고는 내가 그를 쓰다듬는 것을 허락 해 주었다.

“보석점이 멀지 않으니, 말을 타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 명이서 말을 탈 수 있을까요?”

“멀지 않은 거리이니 괜찮을 겁니다.”

그가 철제 잠금쇠를 풀더니, 썸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능숙하게 안장에 앉고는 썸머를 안심시켰다. 그때, 마굿간지기가 구석에서 계단 비슷한 것을 가져와 썸머 옆에 두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제롬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제 허리에 팔을 꼭 감으십시오.”

나는 제롬의 말에 그의 허리에 팔을 꼭 감았다.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대자 그의 체향이 느껴진다. 제롬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허리를 속박한 나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탄탄한 등에 머리를 기대는 게 좋다.

“움직이는 도중에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혀를 깨물 수도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제롬.”

“출발하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마굿간지기가 모자를 멋어 제롬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자, 나는 말없이 제롬에게 꼭 붙어 몸을 밀착했다.

우리가 오래 달리지 않아 도착한 곳은 제롬의 공작령에 있는 보석 가게였다. 제롬은 내가 왕궁에서 걸고 나온 장신구들을 기어코 샬롯에게 모두 반송했고, 그래서 내가 무도회에서 착용할 보석을 약속대로 골라주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었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소란스러울 줄 알았던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또 바깥과의 빛이 차단되어 있어 조금 어두웠다.

“공작 전하, 그리고 레이디.”

보석점의 직원인지, 그는 우리에게 차분하게 걸어와 예를 표했다.

“저는 란셀롯 보석점의 오너 한스 란셀롯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직원이 아니라 오너였다. 그는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40대 쯤 되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나는 그의 멋들어진 수염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제롬은 차분히 답했다.

“아, 직접 맞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예약해두었던 보석들을 보러 왔습니다.”

“물론입니다요, 전하. 이 곳으로 오시지요.”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층계를 오르면, 오를수록 반짝이는 빛무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2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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