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린 후에는 -->
나는 새벽을 뜬 눈으로 보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자, 어느새 아침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당한 이 자리의 주인, 물의 언어술사가 오고 있다니 무서웠다.
애초에 알고 있었다. 이 자리는 내게는 너무나도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름도 모를 여자한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숨도 못 쉬게 괴로웠다.
그렇게 정신을 까마득한 어둠 속에 놓고, 잠이 든 뒤에 눈을 떴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오후, 두 세시쯤이나 되었을까나. 나는 바깥을 보았다. 온통 밝은 빛이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깨질 듯 아픈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침대 옆 줄을 당겼다. 하녀들이 곧 올 것이었고, 생각이 명료하게 한 곳으로 흘렀다.
나는 오스카를 봐야 했다. 그와 상의를 해야 했다. 그러면 이 상황에 대한 현명한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문이 열려서 나는 시선을 그 쪽으로 고정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하녀들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하고 치장을 했다.
“그동안 관리를 한 게 효과가 있나 봐요! 레이디의 머리카락이 정말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거울 뒤로 갈색 머리 하녀, 브리젯이 미소지어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피붓결도 이렇게 고우셔서, 모시는 즐거움이 있다니까요!”
그녀와 같이 다니는 앤이라는 하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재갈도 없다, 브리젯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앤의 안부를 물을까 하다가 칙칙한 기분에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종이와 깃펜을 가져다주렴. 편지를 쓸 까 해.”
“네, 레이디.”
그녀는 재빨리 문 뒤로 사라졌다. 나는 드레스의 레이스를 정리하며 화장대 앞에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나는 천천히 제롬의 방을 거닐다 그의 책상 앞에 멈춰섰다. 근사한 목재 책상을 쓸며 그 앞에 앉아보았다. 쓸만한 종이와, 그가 쓰던 깃펜이 있어서 집어들었다.
“이상하네.”
혼잣말을 했다. 그의 책상이 이렇게 가까운데, 종이를 가지러 어디까지 간 걸까. 제롬은 제가 그의 것을 만지는 것을 싫어하려나?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브리젯이 가져온 건 종이가 아니라, 제롬이었다.
“세실리아.”
제롬이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브리젯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일어나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습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한 쪽 어깨로 넘겨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얼굴보다는 내 손을 유심히 살피는 듯 했다.
“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해요, 제롬. 당신의 종이와 깃펜을 쓰려고 했는데. 괜찮죠?”
“물론 괜찮습니다만.”
그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누구한테 쓰려는 것인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편지 쓰려던 건 어떻게 아셨어요?”
“……종이를 찾고 있는 하녀가 있길래 물어봤습니다. 누구에게 쓰는 편지입니까?”
오스카에게 쓰려는 것이 그에게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을 바꾸었다.
“율리아한테요. 그러고 보니 율리아를 본 지 오래되었네요. 다이애나는 최근에 봤는데, 그러고 보니 율리아가 카밀리아 드레스도 해 줬고 그래서……. 인사도 할 겸 블리시스에 놀러가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가 내 턱을 들어 그의 눈을 보게 했다. 내 눈이 흔들렸다.
“아, 레이디 율리아라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스카 백작의 누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죠.”
제롬은 한참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잘 됐군요, 그럼. 굳이 레이디가 블리시스까지 갈 것도 없겠습니다. 레이디 율리아를 이곳으로 초대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요. 그럼. 무도회 드레스 얘기도 해야 했는데 잘 되었네요.”
나는 글씨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제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혹시.”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가만 내 뺨을 쓸었다.
“제가 모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가 진중하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물의 언어술사에 대해 그에게 말하고 싶어서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려는 것을 꾹꾹 누른다. 지금이 좋았다. 그래서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아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아닙니다. 제가 레이디의 시간을 방해했군요.”
그는 고개를 돌려 걸어나갔다. 나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물의 언어술사에게 가지 말라고 단단히 신신당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감히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범람하는 그 감정의 흐름에 좌절하게 된다.
그래서 물의 언어술사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나는, 최선을 다해 모든 감정의 경로를 차단할 것이다. 그리고 오스카는 나를 도울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사는 내가 불행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예언을 막을 것이었다.
그가 불을 다루는 불의 언어술사라고 해도, 그게 나를 무섭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나의 것이라는 게 좋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것이라는게 좋다.
어느 여인이 싫어하겠는가. 아름다우면서도, 타 죽을 걸 알면서도 부나방은 불 속에 제 몸을 던지는데.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저 남자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만 내가 쓰고 있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수신인은 율리아. 나는 편지를 구겼다. 이래서는 예전과 다를 게 없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조언자였고, 제롬이 내가 율리아를 통해서 오스카와 어울리려고 하는 것을 알고 못마땅해 하는 거라면 다른 조언자를 구하면 되었다.
여자 조언자.
나는 새로 편지를 적어내려갔다. 그리고 곱게 접은 뒤 걸음을 옮겼다. 제롬의 서재는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에게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조금 사무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태연히 응수했다.
“편지를 보내고 싶은데 로즈 가문의 인장이 없네요.”
“제 것을 쓰십시오.”
“저는 아직 화이트가 아닌데요?”
“지금껏 제 인장을 사용해오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겸연쩍은 목소리로 부러 말했다.
“그때는 그런 것 따질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아직 화이트가 아니니까, 제 인장을 쓰는 게 맞죠. 안 그런가요?”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가 진중하게 나를 바라본다.
“레이디가 원하신다면 지금 당신을 당장 레이디 화이트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은, 절차를 따랐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레이디 화이트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당신을 누구보다 정당한 레이디 화이트로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걱정돼요.”
나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까봐서.”
“레이디.”
그가 내 팔을 천천히 쓸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가만 감았다.
“제가 레이디를 얼마나 아끼는지, 레이디는 상상도 할 수 없으실 겁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시선을 맞춘다.
“저도 같아요.”
우리는 서로를 원한다. 서로를 너무 지독하게 아낀다. 그런데 이런 불과 같이 타오르는 관계에 누가 감히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일까. 그게 물의 언어술사라서 가능한 걸까?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는다. 서로가 옆에 있는데 무언가가 충족되지 않는다.
여자 조언자. 나는 결국 제롬의 인장을 사용해 샬롯 왕세자비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샬롯 왕세자비는 길 잃은 어린양을 맞이해 시간을 보내 줄 정도로 친절했다.
곧 샬롯이 주최하는 무도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온통 바빠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 중인 듯 했다. 똑같은 세이지 궁, 똑같은 그녀의 방에서 나는 차를 마셨다.
“아, 잘 왔어. 안 그래도 곧 부르려고 했거든.”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샬롯.”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마르사 그 정신 나간 여자 때문인지 정말 그렇지.”
그녀가 찻잔을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나는 끔찍한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며 애써 웃어보였다.
“무슨 일이지? 용건 없이 찾아온 건 아닐거고.”
“별 일은 없고, 샬롯이 잘 지내시나 해서…….”
“나는 이 방 안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여자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밀고자들을 거느린 사람이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일들 중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 그리고 다들 내 정보가 필요할 때, 너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이 방으로 걸어들어와.”
그녀가 매혹적으로 미소지어보였다.
“너는 귀여우니까, 네게 도움이 되어 줄 의향이 있어.”
“…….”
“게다가 제롬 공작이 미쳐있다는 그 여자라니. 당신 정말 대단하잖아.”
“그래요.”
나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저는 당신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줄 수 있어요. 제가 레이디 화이트가 된다면요.”
“아?”
그녀가 아름다운 눈썹 한쪽을 곱게 끌어올렸다. 그리고서는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깔깔대며 웃다가 입술을 끌어올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좋아. 아주 좋아. 난 야망이 있는 사람이 좋아. 재미있거든.”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천천히 기울인다. 나를 본다.
“자, 당돌한 차기 레이디 화이트. 내게 궁금한 게 뭐지?”
“맞춰보세요. 그쯤은 알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그 말에 샬롯이 깔깔대며 웃었다. 광기어린 미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천천히 미소를 지우고 멈춘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잡는다.
“너 재밌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물의 언어술사보다는 더 재밌겠지. 그래.”
역시 내가 물의 언어술사 문제로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움찔하자, 샬롯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정말 긴, 긴 역사였거든. 화이트 공작가에 베르디게츠 왕가가 짓눌려 살아온 게.”
“…….”
“그런데 물의 언어술사라니, 얼마나 단비같은 이야기야? 그 여자, 물의 언어술사라면 확실히 화이트 공작가를 견제할 훌륭한 수단일거야. 응? 당신 남자 때문에 왕가 체면이 말이 아니었는데, 물의 언어술사라면…….”
그녀의 두 눈이 꿈에 젖어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악력이 강해졌다.
“그럼 여기서 확실해지네요.”
내가 깨끗이 잘라 말했다.
“당신은 물의 언어술사가 필요하고, 나는 제롬을 원해요.”
하지만 무언가를 더 말하기 전에, 내 말이 가로막혔다.
“틀려.”
샬롯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내가 원하는 건 물의 언어술사가 아니라, 물의 언어술사의 죽음이야. 아주 확실한.”
“방금 샬롯이 물의 언어술사로 제롬을 견제한다고…….”
“아니.”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샬롯의 눈동자가 불이라도 될 듯 강렬하게 빛난다.
“그것도 좋아. 그런데 그 물의 언어술사가 카사로 제국으로라도 건너간다면? 안 그래도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그녀와 접선했다던데? 그녀는 공작부인보다는 황후가 되고 싶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우리 왕국에 위협이잖아. 물의 언어술사가 카사로에 있다면.”
“그래서 원하는 게 뭐에요, 샬롯.”
샬롯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실크 옷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샬롯은 구두를 신지 않은 채로 그녀의 방을 조용히 거닐었다. 괜찮은 햇빛이 방 안에 내리고 있었고, 상념에 잠겨 있는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천사와도 같았다. 살아움직이는 조각상 같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 높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글쎄요.”
“혁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바뀌는 거, 그걸 싫어해. 저들도 한번 이 나라를 흔들어 그 자리에 앉았으면서, 한번 기득권이 되고는 체제가 바뀌는 것만큼은 지독히 싫어한단 말이지.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왕가가 공작가에 눌린다고 해도 그게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라 견딜 수 있는 거야.”
샬롯의 미소는 마치 설탕처럼 달콤해 보였다. 그녀가 내게 천천히 걸어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짙은 향수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물의 언어술사가 오면, 좋은 쪽이나 안 좋은 쪽이나 변화가 생겨. 물론 좋은 쪽으로의 변화라면 왕가에도 좋을 일이지. 하지만 나는 도박은 싫거든. 누구와는 참 달라서.”
“샬롯.”
“유감이야, 잭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어쨌든 그날 밤의 일로 모든 게 분명해졌단 말이야. 제롬 공작은 이상할 정도로 당신한테 미쳐 있어. 그리고 그 공작 옆에 있는 여자가 교활하거나, 제 위치 이상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한테도 참 다행이지.”
샬롯이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훌륭한, 훌륭한 무도회가 될 거야. 그 날은.”
샬롯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 우리는 함께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는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샬롯이 나를 보고는 미소지어보였다.
“긴장을 놓지 마, 물의 언어술사가 그 날 무도회에 오기로 했거든.”
무도회. 곧 샬롯이 여는 무도회에 물의 언어술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리고 샬롯은, 그녀의 말대로라면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겠지. 샬롯은 물의 언어술사가 가져올 변화가 싫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이익관심이 같아서 참 다행이네요.”
내가 말했다. 샬롯은 나를 보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미래의 공작부인께 미리 건배하지.”
“감사합니다, 샬롯.”
우리는 고개를 돌려 똑같은 일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