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71화 (71/108)

<-- 비가 내린 후에는 -->

오스카와의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하늘은 정말 어두웠다. 나는 오스카가 이야기해준 것들을 잘 기억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렸고, 나는 익숙하게 제롬의 성으로 걸어들어갔다. 모자 끈을 꼭꼭 싸매고는 힘있는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공작부인이 되는 것이. 처음에는 나는 그것을 그저 할 수 없다고 피하기만 했었고, 숨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솔직할 수 있었다. 제롬을 원했고, 그의 사랑이 계속 나에게 향했으면 좋겠고, 내가 속하는 공작부인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내 삶을 받아들이고 솔직해져야 한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했고 조금 더 생각해야 했다. 머리를 감는 바람이 좋고 폐부를 메우는 신선한 공기가 좋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병사들이 창을 거둔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성 안으로 향한다. 집사장이 따라붙는다.

“늦으셔서 걱정했습니다. 공작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고마워요.”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과감히 내던졌다. 더 이상 나를 속박하는 것은 없었다. 이제 조금 익숙해진 복도를 지나, 방들을 지나, 익숙한 문을 열면 그가 있다.

제롬은 서재의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바쁘게 깃펜을 놀리고 있었고, 나는 침대에 가서 앉는다.

제롬이 나를 바라본다. 내게로 천천히 걸어온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내 손을 잡아 입을 맞출 뿐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내게 말한다.

“늦으셨습니다.”

“오스카와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레이디 주변에는 항상 사내들이 많습니다.”

“오스카는 괜찮아요. 오스카는 다이애나를 좋아하고 있고…….”

“그래도 싫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피식 웃는다.

“화나셨나요?”

“제발 저를……. 그만.”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다.

“됐습니다.”

그가 뒤돌아선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본다.

“편지를 받았어요.”

그가 뒤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들린 흰 봉투를 만지작거린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뭘요?”

“이제 저를 떠나실 겁니까?”

“그게 무슨…….”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제가 왜 그래요, 제롬? 이 편지가 뭐라고 생각한 거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억만장자이든, 아니든 저는 당신을 똑같이 사랑해요.”

“아.”

그의 굳은 표정이 천천히 풀어졌다.

“오스카는 그저…친구로서 그냥 잭의 유언을 전했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문득 올려다본 그의 표정이 온화하다.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문제였다. 항상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아는 그는 빙산의 일각인 것만 같아서. 그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막강한 사람 같아서 멈칫하게 된다.

“돈이 상황을 바꾸진 않아요. 나한텐 그래요. 제롬도 그렇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오스카 경께서 다른 말은 없으셨습니까?”

“당연하죠. 없었어요. 그저 이 편지를 전해주었는 걸요, 뭐.”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서재의 책상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그의 무릎에 앉는다. 그의 푸른 눈이 훑듯 나를 천천히 살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그가 입술을 맞부딪쳐 온다. 정신이 흐릿해질정도로 격한 키스였다.

여태껏 내가 그에게 해온 키스는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키스는 해갈이라도 하듯 짜릿하고 숨막혔다. 배려가 없이 혀를 희롱하는 그가 버거워 밀어냈더니 나를 꽉 붙들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로 향한다. 강한 손아귀가 내 어깨의 끈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나는 그를 강하게 밀어냈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내 것과 마주친다.

“제롬.”

나는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들어올리며 말했다.

“왜 그래요?”

그가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바라본다.

“제롬.”

나는 그를 나지막하게 부른다. 그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꼭 껴안는다. 그의 체향이 느껴진다. 숨이 느껴진다. 가슴이 뛴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사랑합니다.”

갈피를 찾지 못하는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제가 감히 욕심을 내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만약 새로 생긴 자산이 다른 생각을 하게 하거나, 또는 레이디께서 제가 두렵다고 해도. 또는 오스카 슐츠가 당신에게 어떤 말로 당신을 현혹하든 저는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불안하셨군요.”

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데도 안 가요.”

나는 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그가 고분고분한 짐승처럼 내 손길에 반응한다. 나는 그의 뺨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가 천천히 내 손에 제 것을 깍지낀다.

“제가 이렇게 완벽한 남자를 두고 어디에 가겠어요. 네?”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내 빨간 구두가 휙휙 올라갔다 내려간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내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술을 천천히 누른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손가락에 입맞춘다.

“조급한 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해요.”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세뇌하듯 그의 귀에 그것을 속삭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내게 나지막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화가 납니다.”

“그래요?”

내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크라바트를 희롱한다. 그는 붉어진 귀로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감정이 제멋대로인적이 없었는데. 당신 때문입니다.”

“누가 언제 저에게 말해줬어요, 이성이라는 천칭을 깨부수는 게 감정이라고.”

잭이 내게 해줬던 말이었다. 제롬은 나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 담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삶에 들이닥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익숙해져야 해요. 그리고 우리가 가진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요.”

그가 한숨을 쉰다. 내 이마에 천천히 입술을 누른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진다.

“사랑합니다.”

그의 눈빛이, 나를 볼 때는 마치 푸른 불처럼 일렁인다. 열정으로.

“무엇이든 레이디가 원하신다면 이루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러니…….”

그가 나를 꼭 끌어안고 숨을 깊게 들이마쉬었다.

“제발.”

눈이 마주쳤다.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그럴게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가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약속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전 진심이에요. 제가 선물 받은 부는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거예요. 잭도 분명 그걸 원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좋습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어요.”

“예.”

“그러니까 저는 일찍 자고 싶어요. 피곤해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건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무엇이든지.”

“그래요. 혼자는 잠들기 싫어요. 오늘은 저랑 같이 일찍 잠에 드는 거예요.”

“좋습니다.”

그가 나를 들어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목에 내 팔을 감는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그쪽이 침대가 아닌 것 같은데…….

“아, 잠깐만요. 어디 가는 거예요?”

“일찍 잠들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나는 버둥거렸지만 그는 미소지으며 나를 능숙하게 제 방으로 데려갔다. 문이 닫히고는 그는 묵묵하게 욕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 하녀들의 도움을 받을게요! 네?”

“싫습니까?”

“오늘은 일찍 자고 싶다구요!”

“그럼 빨리 시작하면 되겠군요.”

그가 욕조 턱 위에 나를 내려주고는 천천히 내 볼을, 그리고 입술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정말 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시군요! 짐승도 아니고, 정말!”

분노를 담아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지만 그는 그것을 앙탈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에게 내 주먹은 정말로 무해하다. 억울하다. 내 뾰로퉁한 표정에 그가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번만이에요. 지쳤으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은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잡아먹힌다. 벽에 밀쳐진다. 입을 맞추며, 정신이 흐릿해지고 눈을 감으면 맞닿은 혀 사이로 느껴지는 쾌락이 진해진다.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가 서툰 손길로 내 드레스끈을 풀려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의 버클을 풀며 그와의 키스에 집중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했다. 간절하게 그랬다.

새벽이었다. 나는 늦게까지도 잠에 들지 못했다. 피곤했지만, 여러 복잡한 상황에 사로잡혀있다보니 잠이 선뜻 오지 못했다. 새벽 특유의 차가운 공기. 나는 한숨을 쉬며 옆을 바라보았다. 천사같은 얼굴로 잠에 든 사내. 나는 제롬의 뺨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오스카의 오역 때문에, 잭은 내가 돈 때문에 제롬의 옆에 있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런 건 맹세코 아니었다. 아니, 잭도 내가 진심으로 제롬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그랬기에 그렇게 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위협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을 거니까.

그는 내가 제롬 옆에서 안전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천천히 방을 둘러본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가운을 주워입고, 천천히 제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간다.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종이였다.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는 제롬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요나단 화이트 경과, 그의 잔당들 그리고 세드릭 서덴베르크 황태자가 물의 언어술사를 찾았다고 합니다.’

종이가 내 손에서 툭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물의 언어술사를 찾닸다, 라니. 나는 다시 한 번 제롬을 확인하고 종이를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았다.

가슴이 빨리 뛰었다. 여행. 나는 생각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제롬에게 여행 일정을 앞당기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롬과 물의 언어술사는 만나면 안 되었다.

심란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