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69화 (69/108)

<-- 비가 내린 후에는 -->

언제부터 이렇게 연약해지고야 말았을까.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물러진 적이 없었는데. 그랬는데, 감정을 주체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무서워서 밖에 나갈 생각도 들지 않았고, 로즈블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르사와 노아, 그 끔찍한 기억들이 순간 떠오를까봐 감히 가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을 만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제롬이 내 가족들이 찾아오는 족족 막았던 거구나 싶기도 하고. 나도 내가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서 다이애나를 보러 간 것이었는데, 나는 역시 약했다. 제롬이 나를 꼭 껴안아오기에,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제롬의 손이 내 머리칼을 쓴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성년식을 치르고 2년이 지나, 스무살. 그런데도 마음속에 싹트는 이 감정을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연인의 사랑이 아닌, 가족의 사랑이 아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타인간의 형용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

그런 사랑을,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해 준 사람이 없었다. 잭이 죽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제 삶을 위해-물론 그녀를 탓하지는 않는다-집을 떠나셨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은 이해타산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믿었다. 사랑은 어쩌면 없다고.

그래서 그저 에로스적인, 육체적인, 성적인 사랑이 때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제롬에게.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제롬이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주위는 온통 어두웠다.

“세실리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요.”

“예, 세실리아.”

“그냥 문득. 나도 가족 같은 게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잭의 죽음을 보고 한참동안 느낀 그 감정이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어쩌면 내 인생에 많은 것이 빠져 있지 않았었나, 하고. 어쩌면 내가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더라면 그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 보지 않아도 되었을 지도 모르죠. 그래서…….”

“가족이 가지고 싶으셨습니까?”

“그래요.”

나는 쓸쓸하게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 되돌릴 수 없는 건 알아요.”

“세실리아.”

그가 나를 고쳐 안았다. 머리 위로 그의 턱이 느껴진다.

“제가 세실리아의 가족이 되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그를 더 이상 밀어낼 수 없는 것을 안다. 나는 폭풍을 맞이한 가지 꺾인 나무였다. 지지대가 필요했다. 지지대인 제롬이 떠난다면 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필요했다.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그가 필요했다. 절실하게.

“제게 청혼해 주세요.”

나는 그를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제게 청혼해 주세요, 공작 전하.”

“세실리아.”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내 이마에 입을 여러번 맞추었다.

“맹세코, 정말 훌륭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걸리는 게 많았다. 하지만, 복잡한 것은 생각하기 싫다. 그저 이기적이게 홀로 행복하고 싶었다. 한번쯤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타계하신 잭 제커시스 경의 몫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잭은 내가 평생을 슬퍼하며 그를 추모하며 보내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더는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삶을 살아가기로.

떠난 자들은 떠나고, 남은 자들은 여생을 살아간다. 그게 이 세상을 굴리는 법칙이었다.

“장례식이 내일이죠?”

“세실리아, 하지만…….”

“나갈 수 있어요. 평생 이곳에 틀어박혀 살 수도 없는 걸.”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 마지막으로, 잭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는 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저번에 말했었던, 발리타로크로 떠나는 여행 말입니다. 서로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요. 정말 즐거울 거예요.”

그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나는 머릿속을 비웠다. 그와, 나. 나와, 그.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무거운 눈커풀이 천천히 감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쏟아지는 잠에 내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가 옆에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그를, 그가 주는 안정을, 평온을 사랑했다.

이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잭의 장례식은 고요하고, 엄숙했으며 아름다웠다.

나는 제롬의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성당 안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예상 외로, 내게 쏟아진 건 야유가 아니라 탄식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을까요, 레이디께선.’

‘마르사 로렌스. 그 마녀. 어떻게 멀쩡한 귀족 영애와 영식들을 다 그렇게 잔인하게…….’

‘천벌받을 인간이죠, 마르사 그 여자. 레이디 세실리아께선 그동안 얼마나 고민이 많으셨을까, 얼굴이 수척해지셨네요. 저런. 로드께서 레이디의 옆에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 내 앞에 조심스레 걸어온 두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보니, 카밀리아의 푸른 두 눈동자와 내 것이 마주쳐 울지 말자는 내 결심을 어길 뻔 했다.

“카밀리아.”

“언니.”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남자들은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린힐 경.”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나는 감정에 벅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카밀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언니, 내가 조금 더 생각해봤어야 됐는데. 그때 언니가 마르사와 함께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욕심내서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미안해.”

“아냐, 네 잘못이 아니야. 카밀리아. 괜찮아.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 내가 못 가서 미안.”

“괜찮아, 언니. 아그니스 언니가 잘 도와주셨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거와 카밀리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에드거 경.”

나는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에드거의 남색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고마워요. 항상 에드거 경 덕에 마음이 한시름 놓이네요.”

“영광입니다.”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세실리아!”

아그니스였다. 그녀의 옆에는 프리츠, 아그니스의 오빠도 같이 있었다.

“아그니스. 프리츠.”

프리츠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아그니스는 부러 쾌활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세상에, 레이디가 되는 일이 이렇게 성가실 줄이야. 세실리아, 넌 참 정말로 대단하구나.”

“고마워. 로징턴은 좀 어때?”

“내가 잘 굴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이거 정말 갑작스럽다. ‘레이디’ 카터라니. 아직도 그렇게 불리면 내 두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니까.”

그때 제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분이 로징턴의 새 레이디 되시는 분이시군요.”

“아그니스 카터입니다, 군주시여.”

“반갑습니다.”

그가 아그니스의 손을 받아들어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나와 제롬은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 걷기 시작했고, 아그니스가 내 옆에서 천천히 보폭을 맞춰 걸었다.

“다들 사랑이셔, 다이애나도, 너도, 카밀리아도. 기사 작위 받고서는 평생 바람처럼 세상을 여행하다 죽고 싶었는데, 레이디라니. 괜찮은 남자는 찾을 수 있으려나 몰라.”

“아그니스, 넌 분명 좋은 사람 만날 거야.”

“고마워. 오스카가 남자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니스는 그저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없는 거 알아. 내 친구의 애인이 너무 내 취향일 건 뭐람.”

그녀가 태연하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나풀거리는 머리로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미소 짓고는 성당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불행에서 나도 철저한 방관자였더라면, 저 관에 있는 사람이 내 신실한 벗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잭이 벌써부터 그립다. 아마 그가 먼저 떠나 내 가슴에 남긴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을 지도 몰랐다. 마음이 아프다. 나는 적당히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제롬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앞을 본다. 잭은 살아생전에 친구가 많았는지, 온 좌석이 모두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잭과 사업을 함께한 신사들이었다.

멀리서 시선이 느껴져서 그 쪽을 바라보았다. 오스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꽤나 난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그니스가 그의 옆에서 바쁘게 말을 걸고 있는 듯 싶었다. 나는 제롬에게 시선을 옮겼다.

“잠시 실례할게요.”

제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까만 드레스 자락을 보며, 아무와도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고 재빨리 오스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그니스는 가고 없었다.

“오스카, 그러니까…….”

“레이디.”

“오스카 경이 먼저 말해요.”

“레이디.”

대충 아그니스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스카의 표정은 상당히 진중했다. 그의 안색이 오늘따라 더 창백해 보였다.

“레이디께 전할 말이 있어서 레이디 아그니스께 도움을 청했습니다만, 만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식이 끝나고 단둘이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제롬을 바라본다. 제롬이 옆에 앉아있던 모 부인과 이야기하다가 나를 바라본다. 그가 시선을 돌려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웃어보인다. 문제 될 건 없겠지. 나는 다시 오스카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오스카의 눈빛이 진중하고 언어는 단호했다.

“단 둘이서 해야만 할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좀 내 주십시오.”

“혹시 그 이야기가…….”

“잭 제커시스 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슴에 무언가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제롬에게 미리 말해둘게요.”

“감사합니다.”

오스카가 예를 표하고 멀어졌다. 나는 그의 시선의 끝을 탐색한다. 다이애나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많은 귀부인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오스카가 그녀에 곁에 가 앉는다. 다이애나가 오스카의 품에 머리를 묻는다. 나는 이만 고개를 돌려 내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오르골 소리,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는 교황의 흰 옷자락을 바라본다.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제롬이 나직이 묻는다.

“아, 안 그래도 말하려 했어요. 식 끝나고 먼저 돌아가세요. 오스카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게 제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옆얼굴에 시선을 느끼지만 나는 그를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자 나는 그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속삭였다.

“잭에 대한 거예요.”

제롬은 불만족스러워보였지만 그저 고개를 천천히 두어번 끄덕였다. 나는 앞을 바라본다. 화려한 늦오후의 햇빛이 양옆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 흰 빛으로 쏟아져 내린다. 웅장한 성당의 정면에는 화려한 양식의 성스러운 그림이, 잭을 닮은 환한 빛이 부서져 찬란하다.

그 아래는 흰빛과 금빛이 섞여 난 듯한 화려한 돔이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은촛대 사이에 소박한 관이 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마음이 무겁다.

“우리는 모두 훌륭한 신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이 곳에 함께 모였습니다.”

교황이었다. 그는 이 성당을 닮아 새하얀 빛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이 용감한 젊은 사내는, 용맹한 마음과 핏속에 흐르는 기사도 정신으로, 악인 마르사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니베르 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그를 추모했다. 나는 상념에 잠겼다. 오스카가 말한 ‘잭의 이야기’ 라는 것이 무엇일지. 나는 그것으로 내가 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마음속의 생각을 했다가 급히 감추었다.

나는 앞을 바라본다. 잭이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그리고 그의 좋은 부분을 더 알게 되면, 아파할 내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 힘들다.

스무살, 내게 의미있었던 첫 이별이란 이랬다. 그것은 비였다. 땅에 비가 내려 한없이 물러졌다가 비가 굳어 단단해진다. 그리고 선명해진다. 이 고통을 딛자,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 보인다. 나는 더이상 눈을 내리깔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환한 빛이, 그의 관을 덮는다.

“위대한 주신 우니베르님께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다시 받아들여, 영원으로 이끌어 주시고. 위대한 땅의 어머니 테스티아께서는 그의 육체를 품어 새 생명을 주소서…….”

나는 진심으로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가슴이 따스한 햇빛과는 다르게 빠르게 두근댄다. 내 삶을 선물해준 귀한 사람들이 나의 뒤에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 길이 어떤 것이라도 웃으며 걸어나갈 것이다.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번쩍 떴다. 찬란한 햇빛에 먼지가 섞여 따스한 오후마냥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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