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65화 (65/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

나는 가만 어둠속에서 노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죽이기 전에, 홀로 보낼 순 없으니까. 저승길 친구도 만들어줬어. 그년이 끔찍이 아끼던 ‘수집품’들 모두 하나, 하나, 천천히 죽였어. 그 년 앞에서 편애하는 순서대로.”

그러고 보니, 점호 때. 유달리 조용했다. 노아는 점호 때 단순히 불을 끄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태연하게, ‘불을 끄고 있다’ 라 말하며 사람들을 한명, 한명씩…….

“그럴 수 있어서 행복했어. 마르사의 끝, 그 끝에는 그럼 나만 있게 된 거잖아. 응? 그녀도 기뻐하는 것 같았어. 아주. 죽으면서 웃더라고.”

“…….”

“나쁜 년이었어. 아주, 나쁜 요망한 계집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년은 라리아 성이 제롬 공작의 불에 모두 불타버리길 바랐어. 너를 죽이고, 제롬 공작의 불길 속에서 죽을 계획이었나 봐.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끝에 함께할, 아름답고 아름다운 수집품들이었지.”

그가 실성한 듯 웃어재꼈다. 바닥을 짚은 내 손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듯 얼얼했다.

“애초에 우리한테 약속한 성이나, 수십만 골드 따위는 다 거짓말이었어.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를…….”

“거짓말쟁이.”

내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도 차가운 목소리.

“나오는 길에 분명 유진을 봤어. 네 말은 거짓말이야.”

끝나지 않을 새벽, 그때, 구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을 가르고 걸어오는. 새벽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저 달을 닮아, 하얗고, 하얗고, 새하얀 빛의 여자가 걸어나왔다.

“똑똑하네, 세실리아.”

마르사였다. 그녀는 피처럼 새빨간 구두로, 잭의 피를 밟고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짓궂기도 하지, 노아. 장난을 치고.”

“장난감 가지고 장난치는 게, 나쁜가요. 마르사?”

노아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빛으로 마르사에게 미소지어보였다. 방금 잭을 무표정으로 죽인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무해한 미소였다.

“장난감이 아니야, 노아.”

마르사의 미소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내 신성한 죽음을 위한 제물이지. 옮겨.”

나를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것 보듯, 내려다보는 노아의 눈빛. 떨리는 내 눈빛이 그의 것에 가 닿자,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조오금, 뻐근할 지도 몰라.”

턱, 목에서 둔통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그렇게 내 세상은 암전.

눈을 떴을 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기둥에 묶여있었다. 온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눈꺼풀이 유독 무거워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에 기름이 들어갔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그럼에도 차가운 바깥바람이 얼굴을 할퀴는 게, 이곳이 어디인지 혼란스럽게 했다.

“기름 냄새…….”

읊조렸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기름 냄새가 나야 할 거야. 성에 모두 기름칠을 했거든.”

마르사가 내 앞에서 밤하늘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날 원망하지 마. 모두가 다 공평하게, 모-든 리오와 리오네가 오늘 밤 타 죽을 거거든.”

“그게 무슨…….”

“아, 봐.”

그녀가 비켜섰다. 그러자 화려한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래 난간. 이곳은 라리아 성의 발코니였다.

“이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야, 세실리.”

그녀가 황홀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내리깔자 수많은 병사들이 보였다. 수없이, 수없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분명…….

화이트 공작가의 것.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재미있는 얘기 해 줄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상념을 방해했다.

“세실리아 당신이 적어도 왜 죽는지는 알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

“저번에, 이곳에 올 때 해준 얘기 기억하지?”

“당신과 그 정원사 이야기?”

“응, 맞아. 기억력 정말 뛰어나네. 세실리.”

그녀가 까르륵대며 웃었다. 문득 마주친 그녀의 눈빛에는 겨울 숲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순간이 평생 같았다.

“그 날 밤. 덴버와 내가 벤 칼라일 대공으로부터 도망치던 날 밤 이야기야.”

그녀의 눈빛이, 그 반짝이는 눈이 천천히 슬픔으로 물들었다. 말투는 덤덤했다.

“우리는 숲 속을 내달렸어. 말? 사치였지. 밤이 내리고, 숲 속 하늘은 우리를 집어삼키듯 검푸르렀어. 나는 돌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몰아쉬었어.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어. 나무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고 나를 쫓던 병사들이 언제 우리를 찾아낼지 몰랐지. 가슴이 두근거렸어. 보름달이 우리의 죄를 비추듯 하늘에 높게 솟아 있었지. 숨이 막혔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세상에, 우리는 달렸어. 사냥개 컹컹 소리가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밤. 마음 한켠은 두려움으로, 한켠은 처음으로 맛보게 된 자유로 두근거리며 뛰고 있었지. 그리고 숲을 넘어 드디어 항구에 다다랐을 때, 그때 배를 묶은 사람이 있었어. 결국 나를 찾아낸 사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설마.”

턱이 떨렸다. 마르사의 고운 볼을 눈물방울이 빠르게 가르고 흘러내렸다.

“그날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사람. 그날 병사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만든 화염의 진정한 주인. 숲을 태우고, 배를 묶고 결국 나를 찾아낸 사람은 제롬 화이트 공작. 벤 칼라일의 훌륭한 조력자였지.”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타오를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자유로웠을 거야. 이 삶도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나는 벤 칼라일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했어. 그 자유를 박탈한 건 벤이 아니라 제롬 공작이야. 그래서 조용히 숨죽여 살며 평생 이 죽음만을 기다렸어. 죽지 못해 살아갔다고!”

“이해가…….”

“세실리아.”

그녀의 목소리가 놀라우리마치 차분했다.

“그 사람은 태양이고, 율러의 용이자, 파멸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화염의 주인이야.”

“하, 하지만 언어술사 얘기는 전설이야. 그걸 믿는 사람이 멍청한 거라고.”

“모르겠니? 나는 그 힘을 직접 보았어. 당신 남자도 멍청하지, 불을 쓰면 이리 쉬울 것을. 당신이 겁먹을까봐, 당신이 그 사람 무서워할까봐 무력으로만 부딪혀 오고 있잖아. 충분히 힘을 쓸 수 있었는데도 말이야.”

“…….”

그녀는 화려하게 웃어보였다. 그것은 마치 꽃이었다. 끝을 알고, 끝을 알기에 한 순간 치열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꽃 그 자체. 굳이 꽃 중에서도 종류를 꼽자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죽어줘요. 그렇게 잠자듯, 조용히.”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마냥 달콤했다. 칙, 하고 그녀가 쥔 성냥에서 불꽃이 타오른다. 흰 드레스 사이로 구두가 또각이고, 불꽃을 머금은 술병이 난간 너머로 떨어졌다. 칙,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성냥은 방 안으로 던진다. 매캐한 내가 번져나가고, 땅 아래서는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전진하라! 성 문을 부숴라!”

눈물이 흐른다. 마르사는 달밤을 배경으로 한 채, 고개를 돌려 황홀하게 미소지어보인다.

“당신이 가장 행복할 순간에, 내 장소에서 죽었다고 하면 나는 편안히 이 삶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칼라일 대공에게서 나를 빼앗는 거고, 제롬 공작한테서는 당신을 빼앗는 거야. 덴버와 아기가 죽었을 때부터 이런 죽음을 꿈꿔왔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과, 진귀한 그림들과, 사람들 곁에서 최후의 콜렉션인 당신이랑 죽는 거.”

그녀의 금빛 눈에 불길이 일었다.

“역사책에도 나는 최고의 탐미주의자로 기록될 거야. 당신이 이렇게 아름답게 죽으면, 제롬 공작은 분명 이곳을 확실하게 불태우고 나를 죽여주겠지. 정말 아름다운, 나다운 죽음이야.”

“…….”

미친 듯이 떨렸지만, 한 편으로는 내 두 발 아래에 제롬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 만으로 안도한다. 나는 시리듯 흰 달을 바라본다. 바깥에서 어렴풋이 턱, 턱, 덜커덕.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자, 죽어줘요.”

그녀가 마지막 성냥에 불을 붙였다.

“불에 타는 건, 제가 듣기로. 조금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나를 보는 두 금빛 눈이 불꽃처럼 황홀경에 절어 타닥타닥 탄다. 눈을 꼭 감는다.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그때, 쾅.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세실리아.”

제롬의 목소리였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푸른 불꽃이 나를 감싸고 있는 밧줄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기름에 절어 있는 나는 태우지 않고, 다치지 않게 섬세하게 밧줄만을 깔끔히 태우고 있었다. 모든 속박이 풀리고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활 내려. 아니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마르사가 픽 고꾸라졌다. 그녀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피가 천천히 퍼져나가 그녀의 드레스를 물들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롬이 천천히 제 활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놀라우리마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넓은 방 안에는 그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그림자…….

“제롬, 피해요!”

찰나였다. 그가 제 허리춤의 칼을 빼 들고 몸을 돌려 등 뒤 그림자를 베어버린 게. 비명소리, 그리고 몸이 땅에 구르는 소리. 바닥에 나뒹구는 노아 주위로 그의 피가 바닥에 퍼져나갔다. 제롬이 그의 숨을 끊기 위해 칼을 높이 들었을 때였다.

“성녀님, 살려줘!”

그건 노아의 비명소리였다.

“죽이지 말라고 해줘, 제발!”

“노아.”

나는 읊조렸다. 제롬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거냐는 눈빛이었다.

“죽이지 마요.”

나는 차분히 답했다.

“아, 아, 세실리아. 정말 자비로운 나의 히로인. 세실리아…….”

사람이 극한의 고통에 놓이면 온 몸에 마약 성분의 물질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노아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제롬에게 걸어갔다. 제롬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걷는 것은 힘들어서 이마에서 땀이 굴러가는 느낌이 난다. 나는 숨을 내쉬며 겨우 제롬의 옆에서 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노아.”

“아아, 세실리아…….”

노아가 황홀하게 웃어보인다. 나는 제롬의 칼을 뺏어들었다. 무겁다.

“그리고 내 손에.”

푹. 그 느낌을 형용할 수 없었다. 검이 노아의 복부에 정확하게 박힌다. 순간 그가 피를 토해낸다. 한번 더. 그의 눈이 흐려진다.

“죽어줘서, 정말 고마워.”

웃었다. 꺼져가는 그의 눈동자에 내 황홀한 미소가 담긴다.

“잭의 복수야.”

마지막으로는,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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