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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64화 (64/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눈물이 쏟아져 내려 잠시동안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둠속에서 빛을 등지고 일렁이는 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그의 인영이 흐려졌다 선명해진다. 눈물이 도르륵 볼을 가르고 구른다. 나는 그만큼 이 순간에 압도당해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안 그러면 소리지를 거야.”

“세실리아…….”

“감히 내 이름 부르지 마. 넌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침대 옆에 이 줄만 당기면, 이곳의 사람들이 와.”

“…….”

“좋네.”

나는 비웃듯 냉소를 흘렸다.

“우리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나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 않겠어.”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알아, 하지만 맹세코.”

“듣고 싶지 않아. 기회 줄 때 꺼져.”

“진심이었어.”

그가 적막 속에서 말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네가 내 친구인 줄 알았어. 믿었는데, 뭐?”

“그래. 너한테 접근하라고 한 건 마르사가 시킨 게 맞아.”

“…….”

“건국제, 그 때 공작이 너한테 미쳐있었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으니까. 공작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마르사는 너한테 손 하나 못 댔어. 그리고 그건 다른 위협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공작의 경계망에서 너를 빼오려고 마르사가 나를 이용했어.”

“됐어. 빨리 내 눈 앞에서 사라져.”

“하지만 진심이었어. 정말, 다. 하나도 빠짐없이. 널 사랑한다는 건…….”

“소리지를 거야. 3.”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였어. 네 옆에 있었던 내 순간순간이…….”

“2.”

“빛나고 아름다웠어. 처음으로…….”

“1.”

“세실리아, 제발.”

그 순간에 나는 이성을 놓았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눈물 때문에, 목이 꺽꺽거려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는 무릎에 내 머리를 묻고 떨었다. 턱이 떨릴 만큼 눈물이 나왔다.

사람이 너무 울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혹시 아시는지. 속에 북받친 그 감정이, 눈물이, 목을 갑갑할정도로 막고 있었다. 그가 내게 천천히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찬 옷깃이 나를 감싸며 나는 숨을 그만 쉴 수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당신이 싫으면서, 머리는 또 이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서툴게 내 등을 토닥였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귀에 스쳤다.

“나 원래 이런거, 못해. 원래 안 해봤거든.”

“…….”

“할 필요도 없었어. 치열한 인생이었거든.”

그가 나를 놓아주고서는 나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너를 만나고 내 인생에 즐거움이라는 게 생겼어.”

“…….”

“원한다는 게 없는 삶, 얼마나 공허한지 너는 모를 거야. 상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목표를 잃은 다음에 삶이 공허했어. 무채색이었어. 평생 최고가 되는 법을 배웠는데, 최고였을 때 행복한 법을 배운 적은 없었거든.”

눈물이 흘렀다. 내 두 팔을 잡은 단단한 두 손이 따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파도같이, 거센 해일처럼 몰려와 내 마음 속의 둑을 부순다. 정적이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언어적인 게 10퍼센트라면 비언어적인 요소는 무려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댔나. 아, 갑자기 이 생각이 왜 나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이마에 천천히,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내가 파티에서 했던 말 기억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는 제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했다. 숨이 가빠졌다. 미친듯한 힘으로 내 마음에 밀어닥치는 그의 진심이, 마치 파도처럼. 그래 파도처럼 그에 대한 배신감과 미움을 쓸어갔다. 그리고 파도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눈에 전기가 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나는 말했다.

“한번만, 믿게 해 줘요.”

“세실리아…….”

“날 제롬에게 데려다 줘요.”

그는 한참동안 입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겨우내 입을 떼, 나를 보며.

“그럴게.”

답했다.

그가 나를 안아올렸다. 부유감이 느껴진다. 머리카락이 뒤로 늘어진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분명 문쪽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안 돼요. 바깥에 분명히 병사가 있을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

그가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미 돈으로 다 매수했거든.”

“당신, 정말 잭 제커시스네요.”

그가 피식 웃었다.

“레이디를 위한다면 무엇이든지.”

그는 문을 조심스레 발로 밀고는 나갔다. 그리고, 아. 나는 새벽의 그 빛에, 복도를 타고 내려오는 밝은 새벽의 달빛에 탄성을 내뱉었다. 차가운 바람이 창 사이를 너머 커튼을 흔들었고, 그 바람은 나를 간질였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순환했다.

자유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몸이 그의 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흔들렸다. 마음이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이곳을 나가면, 곧 제롬을 본다. 제롬을. 그는 계속해서 걸었고, 복도는 역시 그가 말한 대로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 명의 병사도 나는 볼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금발머리, 그리고 싸늘한 녹안이었다. 나는 잭의 옷깃을 세게 거머쥐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잭은 동요하지 않았다.

“깨끗이 비워 놓았습니다.”

유진이었다. 마르사의 간부 리오. 잭은 유진의 말에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고서는, 그를 지나쳐 갔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잭의 존재가 이토록 더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잭이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끝없어 보이는 복도를 지나, 빛무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 곳이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기대로 부풀었다. 잭의 발걸음이 가빠졌다. 나는 그의 옷을 꼭 붙들었다.

환한 빛무리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광활한 하늘, 그리고 어둠, 그리고 달. 드디어 바깥으로 나왔다. 손이 흥분으로 떨렸다. 이곳이 뒷문이었는지, 내가 본 것은 화려한 정원도, 호수도 아닌 넓은 공터였다. 머지않은 곳에 마차가 있었다. 가슴이 희망으로 뛰었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그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인사를 보았다.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역시. 노아였다. 그는 횃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그의 적갈색 눈이 화염이라도 되듯 일렁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노아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미소해보였다. 가슴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분명 무언가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행복한 여행 되시길.”

그 목소리를 신호로, 사방에서 호령소리가 들렸다. 내 눈이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수풀을 짓밟고, 사방에서 병사들이 쏟아져나와 우리를 둘러쌌다.

“노아, 제발!”

“여자 내려 놔.”

노아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려놓지 마!”

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체념하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내려놓았다.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몸 아래로 단단한 땅이 느껴진다. 잭이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정신을 겨우내 붙잡자, 나는 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모든 게 너무나도 느리게 천천히. 세상이 슬로우모션같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배신자.”

노아가 쓰게 웃고서는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들었다. 비명이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노아의 칼이 잭의 배를 찔렀다. 나는 손을 뻗고 무력하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잭의 굳은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잭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내 눈이 흔들렸다. 피로 칠갑되어있는 얼굴로, 노아는 무릎을 굽혀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쁜아.”

그의 얼굴이 불 뒤로 일렁였다.

“우리 성녀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

“어쩌지?”

그의 깔끔한 턱 아래로 잭의 피가 굴러 떨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였지만, 일어날 수 있었다. 아니, 일어나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나를 위해 잭이 죽었다. 그래, 그랬다. 그런데 내가 내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내 자신이 작게 느껴질 때, 그의 불 아래 일렁이는 나의 그림자는 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턱을 조금 치켜올린 채로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있잖아.”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언젠가 궁금하다고 했지?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 너만을 봐주고 사랑해주는 느낌말이야.”

“…….”

“난 알아. 내 발 밑에 흐르는 피가 그걸 증명하거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불쌍해. 나는 여기서 행복하게 죽겠지만, 너는 평생 그걸 모를 테니까. 그러다 비참하게 죽을 거니까. 라리아는 망했어. 그리고 너도 내 처지와 곧 크게 다르지 않겠지. 저승에서 만나자고. 죽이려면 죽여. 안 말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별이 이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미친 듯이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광기어린, 초점 없는 눈동자가 잔인하게 휘어져 나를 담았다. 쩔그렁. 그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툭.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의 횃불이 바닥에 굴렀다.

“그럼 그 분야에서 전문가이신 것 같은데, 네가 가르쳐 줘.”

그가 내 턱을 억지로 잡고 입을 맞췄다. 낯선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억지로 들어왔다.

“아.”

그가 나를 밀어냈다. 내팽개쳐진 나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셔츠자락으로 그것을 거칠게 훔쳐냈다.

“아프잖아, 예쁜아.”

노아가 입을 곱게 휘어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는,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나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그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마르사는 죽었어. 내가 죽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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