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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63화 (63/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손님이 왔다고 했어.”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너도 그 잭인가, 뭔가 하는 사업가 보러 가는 거야?”

“그래. 그게 그 사람 이름인가보구나.”

“하지만 그 사람은 남자잖아.”

“문제 될 거라도?”

내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노아는 시선을 피했다.

“너는 안 가면 안 돼?”

“나는 성녀야, 노아. 나는 널 아껴줄 수 있지만, 이성으로 좋아할 수 없어.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어쨌든…….”

나는 팔짱을 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싫단 말이야. 그런 거.”

“나는 그저 손님이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리오네들처럼 말이야.”

“그 사람 얼굴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 내가 듣기론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뭐.”

“돈도 많다고 하고, 그리고 리오네들도 그 사람만 오면 다들 더 못봐서 안달이란 말이야.”

“잠깐만.”

나는 노아의 손목을 급히 잡아챘다. 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잭, 아니 그 손님이라는 사람. 이곳에 자주 왔다는 말이니?”

“그게 무슨 소리야?”

“리오네들이 그 사람만 오면 더 못 봐서 안달이라며. 그럼 그 사람이 이곳에 온 적이 이번 말고도 많았다는 말이잖아.”

“그런 셈이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희망이 사그라졌다.

“그 손님이라는 사람……. 마르사랑 많이 친한 모양이네.”

“마르사는 잭 사업의 후원자야. 한마디로 뒤를 봐준다는 모양이지.”

“왜 뒤를 봐주는데?”

“이해관계가 맞아서. 설마 그렇게 큰 사업을 벌이는 사람이 뒷배에 권력자 하나 없겠어? 마르사는 최신 유행 옷과 보석들을 좋아하고, 잭은 블리시스 다음으로 가장 큰 항구를 가지고 있어. 그럼 이해타산이 딱 맞지 않아? 한 쪽은 권력이 필요하고, 한 쪽은 최신 유행품이 필요해. 그런 거야.”

잭이 마르사와 친하면, 섣불리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었다. 그는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롬이 오기 전에, 상황이 조금이라도 덜 복잡해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곳을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잭이 나를 돕는다면 정말 완벽했다. 나는 마르사의 수집품이자, 인질이다. 내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면 전세가 제롬에게 더 유리하게 기울게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내가 움직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노아를 보았다.

“노아, 난 그 손님이 보고 싶어.”

“그럼, 키스해 줘.”

그의 집요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바라도 되잖아. 응? 성녀님. 제발.”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나는 손님을 보고 싶어, 응?”

“그럼, 다른 사람 알아봐.”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뒤돌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리 와.”

그러자 그가 눈을 빛내며 뒤돌았다. 침대에 앉아 그 고운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내 손이 그의 두 뺨에 닿자 그의 깊은 눈커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뜨였다.

“내 최선이야, 노아.”

“알아.”

그는 답했다.

“그거면 됐어. 이번에는.”

그러고서는 나를 들어올렸다.

“내가 비밀 통로를 알아. 거기라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참동안 한적한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촛불이 복도마다 겨우 한두 개 켜진 것을 보아 이곳은 그가 말한 비밀 통로가 맞는 것 같았다.

어두웠다. 어둡고 고요했다. 그의 숨 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이곳의 정적을 내리누르는 전부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이 복도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 복도의 끝에 빛무리는 없었다. 문도 없었고, 길도 없었다. 복도는 그저 벽돌로 꽉 막혀있을 뿐이었다.

“거짓말 한거야, 노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착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여기 환풍구가 있어. 환풍구 뚜껑을 열면 마르사의 밀실을 엿볼 수 있어.”

그가 나를 내려주었다. 차가운 바닥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내 앉은 키 높이쯤에 낡은 철제 덮개가 보였다. 손잡이를 잡고 그 작은 덮개를 들어올리자, 그 어두운 공간에 빛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기 전에 눈을 조금 찌푸렸다.

촘촘한 철망 너머로 환한 실내가 엿보였다. 그리고 그 안은 방이 아니라, 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호화스러운 실내에, 마르사의 금빛 뒤통수와, 잭이 보였다. 숨을 죽였다.

“옛 정이 있어서. 더 이상 후원 못 해준다고 불렀어요.”

마르사의 목소리였다.

“……소식은 들었어, 마르사. 대공이 당신한테 이별을 고하고 지원을 끊었다는 거.”

잭이었다.

“난 이해가 안 돼. 벤 칼라일 대공은 당신 정말로 사랑했잖아.”

“코르티잔은 그래봐야, 그와 그의 가족, 가문보다는 못한 존재이니까. 그는 나와, 그의 가족중에서 선택을 한 거고 답은 명백했어.”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마르사, 내 돈이 필요하다면…….”

“됐어요. 당신 돈 가지고 해결될 게 아니니까.”

마르사가 답하고는 자세를 고쳤다. 잭은 떨리는 눈으로 마르사를 바라보았다. 그 긴장감이 환풍구를 넘어 느껴져서 나는 숨을 겨우 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거야, 마르사? 옛 일은 잊어도 되잖아. 안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어, 잭. 더 이상 동정하는 척 하지 마요.”

“화이트 공작한테는 잘못이 없어. 그는 그저 그 때 대공을 도왔을 뿐이야.”

그때, 쾅. 굉음이 났다. 마르사였다. 꼭 쥔 그녀의 떨리는 주먹이 책상 위에서 하릴없이 떨리고 있었다.

“감히.”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감히 나를, 내 행동을 멋대로 평가하지 마. 그때 화이트 공작만 아니었어도, 나는 덴버와 도망칠 수 있었어! 내 배에 아기가, 아이가……!”

그녀의 목소리가 어그러졌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에 제 머리를 묻고 그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긴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헉, 나는 숨을 들이켰다.

잭이 정확하게 내 쪽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손이 떨렸다. 마르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잭의 시선이 바삐 마르사에게 향했다.

“너도 덴버의 친구였잖아. 내 남편 될 사람의 친구였다고. 그런데 어떻게 화이트 공작이 죄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사람만 없었어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그녀가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잭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녀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마르사…….”

“신경써주는 척 하지 마. 비참해지니까. 네가 여기에 온 이유도 사실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 그 여자, 세실리아 걱정돼서 왔을 거 아냐.”

“…….”

“부정 못 하네. 어쨌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잭 너한테.”

마르사가 티테이블을 잡고 힘없이 일어났다.

“너는 네 역할 충분히 다 해줬으니까.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여자 머리카락 한올도 만져볼 수 없었겠지. 가면 무도회 날도, 건국제 날도. 네 역할 다해줘서 고마워.”

잭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마르사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뭐, 어쨌던 그 여자는 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죽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최대한 안 아프게 죽일게. 어차피 망가트리고 싶은 건 화이트 공작 쪽이라.”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 잭을 언제 처음 만났더라. 건국제 주점에서였다. 어쩐지 수상했다. 그런 거물급 인사가 나에게 아무 목적 없이 좋아한다며 접근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었다. 눈물이 흘렀다. 내 날카로운 시선이 떨어진 곳은 노아였었다.

“유진이 나를 죽일 거라고 했다고?”

하지만 되돌아 온 것은 그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래,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어. 마르사가 널 죽이려 하고 있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네. 이제 네가 잡고 있는 내 약점도 없으니까, 목소리를 높일 쪽은 그 쪽이 아니지.”

그가 차게 웃어보였다.

“어차피 그 반지가 아니었으면, 당신한테 접근하지도 않았을 거야.”

“무슨 말이야. 반지라니…….”

“그 붉은 다이아몬드. 단순히 ‘보석’ 따위가 아니야, 성녀님.”

“…….”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스스로 찾아.”

“하지만 너는 분명히…….”

“이곳은 곧 망해.”

“…….”

“그리고 세상이 무너져내리기 전에, 가져보고 싶었어. 사랑. 그리고 사랑받는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어. 넌 여기 여자들중에서 제일 예쁘니까 너한테 배워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는 나를 들어올렸다.

“네가 아니었어도 사실 상관없었겠지만 말이야. 조용히 하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고 싶으면.”

잭이 준 배신의 상처, 그리고 무거운 마음에 나는 침묵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를 안전히 방에 데려다 주었다. 그가 뒤돌아 떠났을 때, 나는 무릎에 머리를 묻고 흐느꼈다. 모든 희망이 부서져 무너져내렸다. 나는 탈출하자는 의욕을 버렸다. 희망이 없었다.

제롬이 오기 전에 마르사는 나를 죽일 것이다. 그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숨이 막힐 듯 아파왔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흰 이불보 위에 늘어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멀리 보이는 발코니 창 너머로 해가 지려고 했을 때 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성녀님! 저예요. 롤라! 꼭 할 말이 있어요!”

나는 답하지 않았다. 죽게 생겼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순간 목소리가 멎어든다. 그리고 정적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아주 한참. 아주 한참이 지나고서야 나는 침대 옆의 줄을 당겼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노아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갔다. 발코니 너머 창으로 지는 태양이 보였다. 나는 애꿎은 약을 탓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저 발코니를 타고 탈출이라도 할 텐데. 성은 많이 높지 않았다. 언젠가 창밖을 내려다 본 적이 있었는데, 이곳은 높아봐야 2층이었다.

눈을 감았다. 한동안 힘없이 그러고 있었다.

‘자, 자. 다들 방에 들어갔지? 복도 불 끌거야.’

점호를 하는 노아의 목소리였다. 그 말은 이제 완전히 밤에 가까워진다는 말이었고.

힘없이 눈을 떠 바깥을 바라보니 해가 완벽하게 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본능에 충실한 배는 배고프다고 꼬르륵거렸다. 무시했다. 그저 그 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때, 발코니의 완벽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여서 몸을 움찔했다. 무언가가 발코니 난간에서 분명히 꿈틀대고 있었다. 턱이 떨렸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쩡-하고 울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바람이 불어 발코니 문이 열러 덜컹거렸다. 어둠 속의 인영은 찬란한 달을 배경으로 나를 보고 똑바로 섰다. 발까지 내려오는 후드를 입고 있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내가 아는 사람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가 알고 있는 키, 알고 있는 분위기, 어둠 속에서 형형히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시리도록 눈부신 달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내. 마르사가 태양이라면, 그는 달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후드를 벗었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잭.”

나는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는 제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댄 채, 나를 어르듯 낮게 쉬이- 소리를 냈다.

“널, 구하러 왔어. 세실리아.”

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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