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60화 (60/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빨리 대답 안하니?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냐니까?”

“유진! 그건 유진이야. 유진이 그러겠다고 했어.”

“거짓말.”

“아니야!”

“네 말을 수습한다고 네 친구를 모함하니? 유진은 절대로 마르사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그건 유진을 5분만이라도 보고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유진이 마르사의 새 수집품인 나를 질투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그 이유만으로 나를 해칠 리가 없었다. 그게 마르사의 심기를 거스를 테니까. 그리고 그건 이 집에 있는 모든 사용인과 그녀의 수집품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그들은 마르사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을 때, ‘나를 죽인다’ 는 자유행동이 허락되는 사람은 이 지붕 아래 하나였다. 마르사. 이 지붕 아래 노아가 말한 ‘나를 죽이려는’ 유일무일한 사람은 바로 마르사여야 했다. 그래야 말이 됐다.

그때 노아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두 손과 고개를 재빨리 흔들었다.

“그건 그냥 허세였어. 그냥 세실리아 너를 떨게 하려고 했단 말이었단 말이야. 누군가가 널 죽이려고 한다니, 마르사가 알면 정말 놀랄거야. 세실리아, 믿어 줘. 마르사는 내가 그런 나쁜 말을 했다는 걸 알면 안 돼. 정말이야.”

나는 주위를 살폈다. 문은 완벽하게 닫혀 있고, 사람은 없다. 발코니는 한적.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노아를 보고는 구세주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널 믿어.”

“정말?”

“응. 네 입에서 잘못 튀어나온 말이겠지. 내가 과민반응한거고 말이야.”

“아아, 세실리아.”

“하지만 그런 나쁜 말을 내게 한 건 네 잘못이야. 내가 곧 ‘죽을’ 사람이 된다니. 그게 리오가 가질 말버릇이니? 마르사가 정말 실망스러워할거야.”

그러자 창백한 안색이 된 노아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동정하게 할 생각이었는지 구슬같은 눈물도 눈에 주렁주렁 매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세실리아, 제발. 이걸 마르사에게 말하지 말아줘.”

내 추측이 맞다면, 마르사는 모종의 이유로 나를 죽이기 위해 이 성에 데리고 왔다. 나와 그녀와의 원한관계가 없다고 봤을 때, 그녀는 나를 통해 제롬에게 보복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가 내게 실수로 발설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리오의 덕목을 핑계로 노아는 그것을 마르사에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입 다물어 주라고? 나는 그의 청에 기쁘게 응했다.

“당연하지.”

“아아, 고마워. 너 정말 착…….”

“물론 공짜는 아니야. 이곳을 내게 구경시켜줘.”

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의욕 있게 안아올렸다.

탈것이 생겼다. 기분이 좋았다.

노아가 방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두 병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멈춰라.”

그들이 나와 노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지금 리오네 세실리아를 데리고 어딜 가는 거지?”

“여자들 있는 데로. 마침 얘가 심심하대.”

미심쩍은 눈빛을 교환하는 병사들에게 노아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비켜. 안 그러면 너네들도 말 안 듣는 애들이랑 똑같이 혼내줄거야.”

그러니까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서 길을 내어주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복도를 그저 타박타박 걸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노아의 손은 유진의 것과는 꽤 달랐다. 거칠었다. 거칠고 컸다. 그러고 보니 얘는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노아.”

“응?”

“노아는 뭘 해? 그러니까 유진이 조각을 하면 노아는…….”

“난 그런 거 안 해.”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분명 표정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안 해도 돼? 그러니까 유진 말로는 리오랑 리오네들은 인문학도 배우고, 철학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그런다는데.”

“난 안해. 다른 거 해.”

그의 목소리가 문득 서늘했다. 나는 분위기를 무마하려 웃어보이며 물었다.

“아아, 그럼 너는 뭐 하는데?”

“말 안 듣는 애들 혼내주는거.”

“그러니까 리오와 리오네들의 정신적 지주나, 선생님 같은 거구나?”

그러자 그가 기분 나쁘게 큭큭대며 웃었다.

“그것보단 기술자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거든, 흠이 나지 않게 하려면.”

너 고문관이었구나.

처음 얘 목소리를 듣고 멍청하거나 또라이중 하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였다니, 맙소사.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추워?”

“그으래, 좀 춥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방에 다시 가기 귀찮아.”

“견딜 수 있어, 고마워.”

그리고 나는 얘를 내 발닦개처럼 쓰려고 했다니. 반성하지만 회개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그저 나를 들고는 정처 없이 복도를 떠돌고 있는 듯 했다. 아까 봤던 조각상을 벌써 세 번째로 다시 보고 있었다.

“우리 그럼 지금 다른 리오네들 만나러 가는 거니?”

“바깥 구경하고 싶다며.”

“목적지 없이 복도를 떠도는 게 구경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아.”

“리오와 리오네는 이 층을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그래.”

“밖에 정원으로도 못 나가?”

“마르사, 또는 나나 유진이 동행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곤란해.”

노아와 유진이 이곳의 간부급 리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노아가 마르사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간부인 만큼 아는 정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 그의 약점을 잡다니 월척이었다.

나는 최대한 순진하고 무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리오랑 리오네 만나러 가고 싶어.”

“리오네만 만날 수 있어. 너 같은 여자 수집품들만. 여자는 여자 방에만, 남자는 남자 방에만 있는게 룰이야.”

“넌 내 방에 들어오잖아. 유진도.”

“나나 유진은 예외야.”

역시 둘은 간부급이라 이건가.

“그런데 저번에 마르사가 유진더러 여자들 방에 못 들어가게 했던 것 같은데.”

“예외는 있어도 그건 예외인 거지, 저 룰을 지키는 건 에티켓이야.”

“좋아. 그럼 남자 방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리오네도 있어?”

“없었어. 원래는.”

“원래는?”

“응. 없었어. 그러다 삼사일 전인가 새로 생겼달까.”

“그게 나야?”

“그게 너야.”

“아까는 안 된다며.”

“그래도 되도록 가지 마.”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선 잔망스럽게 미소지었다.

“너는 내가 좋잖아.”

“그으렇지.”

양심에 털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남자들 방 가지 마.”

그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르사 귀에 내가 노아를 구워삶았다는 소식이 전해져서는 안 됐는데. 그게 잘못된 방식으로 제롬 귀에 전해지면 상황이 매우, 매우, 매우 곤란해졌다.

제롬이 내가 바람이 났다고 오해하는 건 정말로 사양이었다. 어쨌든 생과 사, 생존과 멸절의 순간에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나도 참 대단하다.

“안 가. 안 가.”

그가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멈춰섰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익숙한 문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처음 이 곳에 올 때 본 문이었다. 그리고 학습한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리오네, 그러니까 마르사의 여지 수집품들의 방이었다.

“나 못 걸을 것 같은데…….”

그를 힐끗 바라보자 그가 웃었다. 그리고서는 문을 제 발로 쾅쾅 차댔다. 그러자 방 안이 일순 소란스러워졌다가 또 조용해졌다. 방 안의 목소리가 뭉개져 들려서 뜻은 알아듣지 못했다.

“노아!”

문이 벌컥 열렸다. 문 뒤의 리오네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무슨 일이야?”

“비켜.”

노아는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략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에라 모르겠다. 대략 열, 아 여덟 명이구나. 대략 여덟 쌍의 눈이 나와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새 친구야. 모두 안녕 해.”

“안녕.”

여덟 명이 어색하게 미소지어보였다. 노아는 그 싸한 분위기에서 혼자 웃었다.

“와, 세실리아. 너 정말로 친구 만드는 거 못하겠구나. 우리 리오네들이 네가 오니까 다 떨고 있잖아. 저 애들 봐봐.”

진지하게, 너 때문인 것 같은데. 나는 목구멍까치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는 웃어보였다.

“그러네. 이제 내려주고 나가지 않을래, 노아?”

“그래. 그러지 뭐.”

그는 대충 바닥에 있는 쿠션 하나를 찾아-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누운 그 쿠션-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어졌다.

“얘들아 재밌게 놀아!”

그는 해사하게 미소지어보이고서는 문 뒤로 사라졌다. 아홉명의 리오네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떨어졌다.

“어, 안녕하세요.”

나는 손을 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꺅! 너무 귀여워!”

그걸 시작으로 리오네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때 그 분이다! 레이디, 우리랑 계속 있는 건가요?”

“여기에 쭉? 레이디도 리오네인가요?”

“마르사님 말이 맞았어. 이 분은 애초에 그저 방문객이 아니었던거야!”

경악에 찬 목소리,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이어졌다. 나는 몸을 겨우 일으켜 허리를 세워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졌다. 내가 목청을 고르자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사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구요?”

“맞아요. 일단은 여기에 리오네로 머물고 있는 것 같네요.”

이미 노아와 유진한테서 뜯어낸 정보가 많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진 정보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친근하게 웃어보였다. 그때 적대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신도 리오네라니,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 우리는 엄청난 시험과 경쟁을 거쳐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요!”

“맞아. 게다가 이 체제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10년을 어떻게 내가 버텼는데 당신이 갑자기 끼어들어요? 게다가, 레이디는 남자들 방에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잖아요! 그건 특혜예요. 불공평해요.”

몸에 힘이 빠져서 자세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허리를 더 꼿꼿이 펴고 리오네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시선은 내게 마지막으로 투덜거렸던 리오네에게 멈추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리오네로 사는 게 힘들다면 왜 지원하셨나요? 그저 궁금해서요. 수집품으로 사는 삶도 귀족의 삶에 비하면 순탄한 길만은 아니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끼어들었다.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조금만 참고, 스물여섯에 마르사에게서 ‘졸업’ 하면 억대의 금화와, 성을 선물 받으니까. 열 살에 그 말만 믿고 수십의 경쟁자와 맞붙어 이겼어요. 그리고…….”

아야! 열변을 토하다 옆 여자에게 발을 밟힌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녀 옆에 서있던 여자가 눈빛을 받아치며 눈치를 주었다.

“열 살부터?”

그러니까 이 여자들은 열 살부터, 적어도 십년은 더 넘게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마르사의 수집품으로서.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다른 목소리였다. 아까 그 리오네의 발을 밟은 여자였다.

“우리는 마르사 로렌스님의 기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배우고자 이곳에 들어왔어요.”

“스물여섯 살에 나간다고요? 그러면 결혼은…….”

“리오와 리오네는 인원수가 같아요. 그 이유는 대략 짐작이 가시겠죠.”

그녀가 차분히 답했다. 애초에 리오와 리오네의 수가 같다면 그것은 마르사가 충분히 재미를 본 다음에, 그 둘의 짝을 맺어주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인 듯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나는 마르사의 수집용으로 이곳에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제 수집품 중 지금도 남자, 여자 짝이 딱 맞는데 굳이 거기에 사람을 한명 더 데리고 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게 내가 방금 전 세운 가설을 강화했다. 마르사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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