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59화 (59/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마르사, 난 심심해요.”

마르사의 진한 눈썹 한쪽이 치켜올라갔다. 나는 일부러 내 말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할 듯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척을 했다. 다행히 하품이 잘 나와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당신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정말 지루해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빛 실을 써 반짝이는 흰색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그녀가 치맛자락 속에서 빨간 구두굽을 내밀어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침대에 앉고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 시야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웃는다.

“유진이 세실리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니. 이거 실망인걸요?”

“유진은 최선을 다한 것 같긴 했는데 말이죠…….”

나는 애써 그를 위해 방어했다. 마르사의 아름다운 금빛 눈에 어린 잔혹함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순간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심심하다고요?”

“네. 딱 그거예요. 침대에 누워 있자니 지루해요. 그리고 이제 저녁인데 배가 고파서 생존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라고요. 배부르게 먹고 사람들을 만나서 좀 놀고 싶어요.”

“라리아 성이 당신을 지루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아뇨, 전 이곳이 좋아요. 엄청. 마르사의 제안대로 할래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말 잘 들으니 정말 좋네요. 그럼 쉬어요. 식사는 유진이 거들 거예요. 그 이후에는 세실리를 여자애들한테 데려다 놓으라고 할게요. 그럼 됐죠?”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 구두를 또각이며 멀어졌다. 유진. 그녀가 분명 유진이라고 했다. 유진의 딱딱한 표정이 떠올라서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유진보다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노아랑 친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마르사.”

“응?”

“유진 대신……. 노아가 식사를 거들면 안 되나요?”

그녀가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한참의 정적 속에서 말을 잇지 않았다. 노아여야 했다.

“왜요?”

왜긴. 짤짤 털어내면 무언가 불을 것 같은 쪽이 노아니까 그렇지. 나는 속마음을 감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의적으로 미소지었다.

“노아는 귀여우니까요.”

“아?”

“들고양이 같아. 아니면 귀여운 여우나…….”

“흠. 그런가요.”

마르사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는 흔쾌히 답했다.

“그래요, 그럼. 노아를 보내도록 하죠.”

나는 노아랑 친해둘 필요를 느꼈다. 우선 그는 여기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만나자마자 급하게 반지에 눈독을 들인 것을 보아 나와 같이 탈출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깥에 나가려면 귀한 것들을 챙겨놓는 것이 좋으니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는 걸을 수 있었다. 잘 구슬리면 그는 내 운송수단이 되어 줄지도 몰랐다. 반지를 그에게 정말로 줄 생각은 없었지만, 반지를 미끼삼아 그를 움직일 수 있다면 이곳에서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마르사에게 직접적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피력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왜 여기에 데려왔는지, 그녀가 원하는 건 뭔지, 이 문제에 침착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불을 내려다보고선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트롤리를 끌고 노아가 들어왔다. 순간 그 모습에, 제롬의 것이 겹쳐보여서 속에서 뜨거운 것이 뭉쳐 울컥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정말, 정말, 정말 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가야 했다.

“무슨 생각 해?”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러니까 정말 들고양이 같다.

“그냥 생각.”

“슬퍼 보이는데.”

“배고파.”

순간 내가 너무 날카롭게 말한 것 같아서 멈칫했다. 정적이 일자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휘어보였다. 그가 자켓을 벗어 가까운 의자에 던져두고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가 좋아?”

그는 당돌하게 물었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상대방이 기뻐하는 지 잘 알고 있는 듯, 자신 있게 볼을 붉히며 광기어린 미소를 지어보인다.

“역시 유진같은 목석보다는 내가 취향인거지?”

거짓말을 할까, 그렇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건 죄악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제롬을 보고 싶었다.

그래, 노아. 당신이 누구건 상관없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내가 원하는 정보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 노아를 낚는 미끼가 반지가 아니라 내 애정이라도 상관없었다.

노아는 황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목덜미에 고개를 기울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숨결이 목에 닿아 온 몸이 몸살이라도 난 듯 얼얼했다.

“……향기가 좋아.”

“좋니?”

“으음, 편안해.”

“음식이 식어.”

그 말에 그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역시 마르사가 고른 리오여서 그랬는지, 그의 장난스럽다가도 짙어지는 미소는 뭇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가장 반짝이는 사람은 제롬이어서 그의 미소는 내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침대 위에 작은 테이블을 차리고서는 그 위에 양철 덮개로 가려진 접시를 올려놓았다. 그가 덮개를 거두자마자, 고기의 좋은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래서 하마터면 나는 이성도 놓은 채로 포크와 나이프를 버리고 손으로 칠면조 다리를 뜯을 뻔했다.

“나이프질은 서두르면 안 돼. 마르사가 싫어해.”

그는 내가 재빨리 칠면조를 먹어치우는 걸 느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로 칠면조에 집중했다. 내가 죽은 듯이 잠들어있었던 3일,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굶었다.

“더 없어?”

“안 돼. 식단이 짜여 나오는 거라서 더 못줘.”

그렇다면 이곳은 더 이상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마음껏 먹지도 못한다니. 갑자기 로즈블룸이 그리운 마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배고픈데…….”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럼 내가 빵이라도 더 가져올 수 있는 지 물어볼게.”

“그래 줄거니?”

“응. 맡겨만 둬.”

그가 재빨리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

역시 그는 민감했다. 상대방이 실망하는 것에 민감했다. 그럴 법도 했다. 그의 일은 마르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자, 동시에 마르사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이년의 교육이 사람을 저렇게 민감하게, 또는 유진처럼 맹목적이게 만들지 않았다. 꽤나 긴 시간동안 그들은 이 지붕 아래 있었을 것 같았다. 삶을 박탈당한 채 새장 속의 새처럼 길러졌을 것 같았다. 수년간의 마르사 중심적인 교육을 거쳤을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체제에 잘 길들여진 그녀의 완벽한 행복인형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길 실패한다면, 저 사람의 모습은 내 미래가 된다.

“세실리아!”

그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들고 있는 접시 위에는 따끈따끈한 빵이 있었다.

“빵 가져왔어. 쉐프한테서 겨우겨우 받아온 거야.”

“잘했어.”

그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정말?”

“으응, 그래. 정말 그렇단다.”

나는 빵을 건성으로 씹어 삼켰다. 배는 불렀지만 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와인 줄래?”

“와인.”

그가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향 좋지?”

“응, 그렇다.”

“그래. 그럼 네가 마셔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잔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곧 ‘죽을’ 세실리아라고.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흘려들을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모든 측면에서 경계를 낮출 수 없었다.

“마셔?”

“왜, 뭐라도 들었니?”

“내가 마셨던 와인잔으로 마실 수 있겠어? 잔 하나만 들고 왔어.”

“마셔.”

그는 잔을 제 입에 가져다 대고 잔을 비웠다. 목울대가 울렁였고, 그가 입을 뗐을 때, 잔은 비어 있었다. 그는 제 입을 냅킨으로 닦고는 나를 멀뚱히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맛은 깔끔해.”

그는 눈치 없이 덧붙였다.

“그래, 시음해줘서 고마워. 나도 줘.”

그는 와인을 잔에 따라서 내게 건넸다. 나는 조심스레 한 모금을 마시고는 갈증을 느껴 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 여기서 죽어?”

나는 물었다. 그는 그저 말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체향이 훅 끼쳤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미간을 조금 구기며 뒤로 물러나자 그는 말없이 내가 기댄 등 뒤의 배게를 양옆으로 툭툭 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등이 불편해 보여서.”

“그래, 고마워. 이제 다른 얘기 하자. 내가 혹시 여기서…….”

“내가 가까이 가는 거 싫어?”

“아니, 아니야. 그냥 놀랐을 뿐이야.”

“그렇구나.”

그제야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허락 받으면 가까이 가도 괜찮아?”

“그래. 나는 네가 허락을 구해줬으면 좋겠어.”

“응.”

그가 내 무릎 위의 작은 식탁과 접시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노아.”

“응?”

그가 눈을 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랑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아까 전에 네가 한 말 있잖아.”

“무슨 말?”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거. 목이 잘리고 불에 탄다는....”

그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등을 돌리려 하자 내가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낚아챘다. 두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그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나는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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