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58화 (58/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유진입니다.”

목소리가 깔끔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유진이라고 하면 내가 이 성에 막 도착했을 때, 나와 마르사를 가장 먼저 맞이한 그녀의 수집품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보낸 이유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을 확률이 컸다. 그러자 내 처지가 문득 실감이 갔다. 나는 갇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유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그는 꽤나 마르사와 친한 것 같아 보였다. 마르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마 마르사가 나한테 먹인 술과 약 때문일 것이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 미색이기도 하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에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 하지만 제롬과 같은 인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유진의 눈에는 야망이 없다. 소유물로 길러진 자들의 맹목적인 충성과, 목적은 그저 주인뿐이라는 그런 흐리멍텅하고 독한 눈.

고된 삶을 살다 보면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그 사람을 조금이나마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냥 감이다. 그리고 그 감은 대부분 정확히 맞아떨어져 나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유진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르사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가득한 그 눈빛에 나에 대한 동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 쓸만한 정보는 뽑아낼 수 있겠지. 나는 그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동이 불편하실테니 도우라는 미스트레스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낮춰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빛이 빛나기를 밤의 에메랄드 호수 같다.

“침대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가 나를 조심스레 안아들고는 침대로 옮겨 주었다. 그가 나를 품에서 내려놓는다. 눈이 마주친다.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계산했다. 마르사가 분명 나더러 그녀의 인질이라고 했다. 인질. 그녀의 새 수집품이면서 인질. 그게 내 처지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최대한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가요?”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요?”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인상을 주기 위해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심심하니까 말동무가 되어 주세요.”

“…….”

“싫어요?”

“싫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을 거겠지만.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대답에 의지가 없다. 싫다, 아니면 좋다가 아니라 그저 ‘싫지는 않다’였다.

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저게 내 미래가 될까? 좋지도, 싫지도, 웃지도, 울지도, 힘들지도 않은, 마르사의 손에 손잡이를 내맡긴 마리오네트 인형. 속에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나는 상대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미소지어보이면, 제롬은 목소리를 높이려다가도 마음을 돌리고, 신사들은 목청을 큼큼대며 와인을 빠르게 들이켰다. 하지만 유진은 그저 무심한,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뭐? 같은 그런 반응으로. 무신경하게.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오신 거예요?”

“책을 좋아하시면 읽어드리겠습니다.”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딱딱한 목소리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좋아요. 여기에 책도 있었구나. 신기하네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어서 이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목이 탔다. 무서웠다. 그래도 나는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많이는 없습니다. 그나마 있는 책 중 대부분은 여기에 있는 리오네들이 쓴 겁니다.”

“리오네?”

“이곳에서 살아가는 마르사와 사용인이 아닌 모든 여자들을 리오네라고 합니다. 저와 같은 모든 남자들은 리오라고 하고요. 용어에 익숙해지십시오.”

수집품중에서 여자는 리오네, 남자는 리오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마르사는 소문난 수집가라고 하더니, 직접 사람을 수집해 거기다 '리오' 나 '리오네' 같은 해괴망측한 명사까지 지정해놓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돈. 이 저택을 유지할 돈에다, 사용인들 먹여 살리고, 거기다 여러 명의 리오와 리오네를 먹여 살릴 돈을 감당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부유해야 할지 정말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적이 있어서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무언가라도 말해야 했다.

“리오네들이 글도 쓰는구나. 대단하네요.”

“교육입니다. 리오와 리오네들은 마르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배우고, 인문학, 철학과 같은 학문도 배웁니다. 몇몇은 악기를 배우기도 하고, 조각공예에 힘쓰기도 합니다.”

“그 중에 유진은 어떤 것을 좋아하나요?”

“저는 주로 조각을 즐겨 합니다.”

“대단하네요.”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리오네도 익숙해지실 거니까요.”

마르사는 내가 제 인질이면서 새 수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옳다고 했을 때, 나는 이곳에 평생 갇혀서 유진의 삶을 닮아갈 수도 있었다.

인형의 삶. 바깥에 있는 제롬은 분명 나를 돕지 못한다. 내가 여기 묶인 이상 공격적인 대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질이었다.

협상. 그런 게 가능했으면 나는 이곳에서 진즉에 벗어나 바깥생활을 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제롬이 물의 언어술사 뭐시기 때문에 나를 포기했을 거라는 가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리오라던가…리오네들이 자주 더 생기나요? 그, 그러니까. 저 같은 일이 흔한가요?”

“아닙니다. 처음 미스트레스께서 리오와 리오네를 대거 뽑은 뒤로는 ‘다음’ 리오네가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리오네께서 최초겠지요.”

그의 눈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놀랍지만, 질투……. 같아 보였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가요?”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경쟁 없이 그렇게 쉽게 리오네가 될 수 있었는지…….”

“잠시만요, 당신들 다 지원자예요?”

“그것도 모르셨다니. 마르사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것은 분노였다. 그는 노골적인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쉬십시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성큼성큼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멍하게 이불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득은 분명 있었다. 정보였다. 그것도 아주 값진.

나는 새삼 놀랐다. 이 마르사의 '수집품'이라는 사람, 다 지원자였구나.

옳다. 팔려온 노예라고 하기에는 외양이 귀족 영애나 영식처럼 곱다. 예술과 교양에 익숙하다니 분명 평민 출신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리오와 리오네들은 귀족 출신이었다는 것인데, 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마르사가 이렇게 많은 귀족들을 사거나 납치했을 리가 없다. 이렇게 많은 귀족들이 한꺼번에 몰락해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하나도 아닌 여러 귀족 자제들을 납치하는 것은 뒷감당이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 리오와 리오네는 단순히 마르사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나처럼 납치해 오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원자들을 경쟁시켜 최종으로 마르사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리오와 리오네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곳에 끌려오듯 해서 발이 묶인 나는 무엇일까. 확실히 무언가가 있었다.

정말로 마르사는 단순히 내가 물건으로서 탐이 나서 나를 이곳에 묶어둔 걸까? 이미 충분히 많은 리오와 리오네가 있는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마르사는 분명 똑똑한 사람 같아 보였다. 이런 비이성적인 짓을 단순히 ‘탐이 난다’라는 명목 아래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굳이 나를 가둬놓으면서 제롬을 자극하지?

내가 스스로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움직여야 했다. 홀로. 어떻게 해서라든지 이곳을 스스로 벗어나야 했다.

평생 리오네로 살면서 마르사의 행복인형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꿈이 아닐까 싶어서 내 허벅다리를 살짝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이게 현실이라면, 깨지 않는 악몽을 닮았다.

나는 몸을 못 쓴다. 약물 때문이다. 마르사가 한 달간 효과가 지속될거라 했는데, 영구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해독제가 있으면 구해야 할 것이다.

내 현 위치는 라리아 캐슬, 조력자는 없다. 현 상황, 스스로 성을 탈출해야 한다.

조력자가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모르는 것 투성인데, 알아야 할 것은 많았다.

하품이 났다. 약 때문인지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한참동안 잠에 빠져 있다가 눈을 떴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사람은 중요했기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아, 저 쪽이!”

목소리가 범상찮았다. 분명 저 목소리의 주인은 또라이거나 멍청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머리는 적갈색쪽에 가까웠고 눈 색도 같았다. 유진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을 입은 것으로 보아, 저 사람 또한 리오인 것 같아 보였다.

“요즘 라리아를 뒤흔든 새 리오네!”

그가 쪼르륵 달려와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히야아, 정말 예쁘다. 반짝반짝.”

손아귀가 내 턱을 으스러질 듯 쥐고-절대 호감은 아닌 듯 하다-감정하듯 흔들어보였다. 시선이 좌우로 빙빙 흔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겨우 팔을 들어올려 허우적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정말로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렇게 얼굴에 대놓고 ‘색기’ 써져있는 남자는 드문데, 그는 정말 별종이었다. 그의 미소에는 잔망이 서려 있고, 휘어진 눈에는 숨겨진 잔혹성이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마르사가 짐승 키우는 취미도 있는 줄 몰랐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예쁜아. 왜 웃어?”

“그냥.”

“안녕, 난 노아야.”

“노아.”

“넌?”

“세실리아.”

“아아, 세실리아.”

그리고 그는 웃어보였다.

“그 세실리아.”

“세실리아에도 종류가 있니?”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듯, 기분 나쁘게 웃어보였다.

“있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너는 곧 불에 타서 목이 뎅강 달아날 종류이기도 하고.”

“뭐?”

그의 표정에 ‘아차.’ 비슷한 것이 순간 스쳤다. 손이 떨렸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린 건 그였다.

“당신이 공작의 여자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나야. 지금까지는.”

그때 그가 내 손가락을 다시 힐끔 바라보았다.

“있잖아, 그럼 우리. 거래 할래?”

“좋아.”

“넌 내게 궁금한 게 많을 거야, 그렇지?”

확실히 원하는 게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정보.

“맞아.”

“그럼 네가 궁금해하는 건 다 말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그래.”

“내 이야기를 조건으로…….”

그가 뜸을 들였다.

“그 반지를 줘. 네가 끼고 있는 거.”

그가 원하는 게 반지였나.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는 노아의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반지는 제롬이 내게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마음 속 무언가가 팍 빛났다. 나는 노아를 놓칠 수 없었다.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은 길들이기도 쉽다. 그리고 나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부러 생색을 내며 물었다.

“마르사가 이 궁에 있는 모든 진귀한 것이 내 것이라고 했어. 그건 리오인 너한테도 똑같겠지. 이곳의 모든 진귀한 것이 다 네 거야. 그런데 이 시시한 반지가 필요할 게 뭐야? 밖에 나가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는 한참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반짝이는 돌이 좋아.”

단순한 소유욕이라고 변명하지만, 그 아래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이곳에 널린 게 보석인데, ‘소유’ 의 의미가 빛바랜지 오랜데, 목적 없이 이 반지를 탐내리라고 볼 수 없었다.

공작의 약혼자를 상징하는 반지다. 함부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니?”

“없어.”

“안 된다고 하면 나한테서 빼앗아 갈거니?”

“응.”

“솔직하구나.”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고. 소란을 일으키면 마르사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래. 보석이 좋으면 마르사한테 보석 많이 달라고 해. 넌 리오잖아.”

“난 그 반지가 가지고 싶어. 꼭 그거여야 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소중한 사람이 준 거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네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지.”

그는 한참동안 침대에 앉아 나를 머뭇거리며 바라보았다.

“난 이해가 잘 안 돼. 너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갖는 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좋아.”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나는 힘껏 몸을 일으켜 겨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내 왼손이 통제를 벗어나 그의 팔을 쓸며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해독제.”

“응?”

“몸에 힘이 안 들어가. 혹시 내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돕는 약이 마르사한테 있는 거니? 너는 혹시 이런 비슷한 약 먹어본 적 없어?”

“약?”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 그의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어떤 이유라든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을 움직이지조차 못한다면 꼼짝없이 죽을 게 뻔했다. 내가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약이 존재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난 제롬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을 준 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내 수집품들이 말을 안 들을 때면 쓰는 약이야.”

문가에 기대 서 있던 마르사였다. 그녀를 발견한 노아의 미소가 커졌다.

“수면 후, 마비. 아주 훌륭하게 기능하는 약재지. 노아, 네 방으로 가.”

“네, 미스트레스.”

그가 웃음을 내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리오네의 물건을 탐내다니, 정말 나쁜 아이야.”

노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꼬리를 축 늘어트린 개를 닮았다.

“세실리아, 그런데 갑자기 해독제가 필요해진 이유는 뭘까? 나는 좀 듣고 싶은데.”

그녀가 매혹적인 입매를 슥 끌어올렸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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