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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57화 (57/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땐, 아침이었다.

죄의식이 느껴지는 그런 아침. 눈을 깜박였다. 상황을 파악해보자. 어제 마르사에게 휘둘려서 술을 마시고 이곳에서 뻗었다. 머리가 쩡하게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렇게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잠에 들었던 것을 보면 마르사가 술에 약도 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수면제라던가.

그런데 왜? 마르사의 동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여러 생각에 잠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숨을 헉 들이켰다.

“옷.”

내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드레스는 마르사의 수집품들이 입고 있던 옷들과 똑같은 것이었다. 손이 떨렸다.

그러고 보니 마르사가 어제 제 수집품들과 했던 말이 기억났다.

‘미스트레스.’

‘응?’

‘이 여자도 저희와 동류인 겁니까?’

‘아니.’

그때 마르사가 붉은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미소지어보였지.

‘아직은.’

설마 마르사가 나를 '수집'하고 싶어서 이곳에 나를 데려온 걸까. 약까지 먹여가며. 가슴이 두려움으로 두근댔지만, 나는 침착하자고 다짐했다. 그녀가 내게 이 옷을 입힌 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여분의 옷이 부족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발코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구두 또각이는 소리를 쫓아 발코니를 보니, 해가 따사롭게 떠오르는 것을 배경으로 한 마르사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마르사!”

터질 듯 광활한 태양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여신처럼 미소지어보이고는 침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차분히 앉아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때요, 스위티.”

“괘, 괜찮은 것 같아요. 마르사.”

“그래? 한번 열을 재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녀가 손을 뻗으려는 것을 머리를 뒤로 훅 빼 피했다.

“마르사, 저 집에 가야 돼요. 오늘 오후에 카밀리아의 결혼식도 있을 거고…….”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내달렸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마르사의 목소리였다.

“오후? 세실리. 카밀리아 로즈의 결혼식은 이틀 전에 끝났어요.”

“네?”

순간 세상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틀 전. 이틀 전. 이틀 전. 그 목소리만이 내 머릿속에 웅웅거릴 뿐이었다.

“그러면, 저는…….”

“삼일동안 잠들어 있었죠. 아주, 죽은 듯이. 아마 내가 술에 탄 그 약 때문일 거예요.”

평생동안 기다려온 카밀리아의 결혼식을 놓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조심하세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약 때문에 적어도 한 두달 동안은 움직이는 게 조금 서툴 수도 있거든.”

“마르사!”

“그게 부작용이 많은 약인데, 눈은 보이는 모양이니까 다행이에요. 아까운 수집품을 버리는 건 늘 안타까운 일이라. 귀는 들리죠?”

“지금 저를…놀리시는 거죠?”

“놀리다니요, 그런 말을.”

그녀가 재밌다는 듯 입을 막고 까르륵 웃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주저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농담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주변인들이 나를 찾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내 동생은, 그러면 그동안 나를 찾지 않았나요?”

“찾았죠.”

마르사는 깔끔히 대답했다.

“특히 당신 남자가 엄청, 엄청, 화가 났죠. 그런데 당신은 인질이잖아. 공격하면 당신을 부숴버리겠다고 하니까 조금 조용해지더라고.”

“동생은…….”

“제롬 화이트가 못하는 일을 당신 동생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

정신이 멍했다. 비극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나를 덮친다. 사고가 한동안 충격으로 멈추었다. 비극이 나를 때릴 그 당시여서 그랬는지 그게 아프지 않았다. 상처에 곧바로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베이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그랬다.

하지만 비극이 찾아온 뒤 시간이 흘러 내가 결국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 내가 무엇을 후회하는지, 그렇게 현실이 짙게 당신의 폐부를 메우고 붉게 물들일 때 그때 문득 실감하게 된다. 내 어리석은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때부터 고통이 찾아온다. 그렇게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된다.

“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요?”

그녀의 동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생각이 이쯤 미쳤을 때,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름이 돋아 몸을 웅크렸다.

“당신 막, 지금 꽤나 어리둥절할 것도 알아요. 여기 이렇게 갇힌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그리고 생각하길, 제롬 공작이 당신 어떻게든 빼내줄거라고 믿고 있죠?”

그녀가 구두를 또각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붉은 손톱이 내 턱 속을 파고들었다. 따끔한 느낌이 났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힘에 이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 생각 그만 둬요. 아, 맞다. 아직 얘기 안 해줬구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제롬 공작은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당신 이전부터 내정된. 그와 격이 더 맞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죠. 그래서 당신 구하러 와도 무용지물일 거, 내가 공작한테 당신 포기하라고 했죠. 당신을 내 수집품에 추가하고 싶다고.”

“제정신이세요? 제롬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마르사가 피식 웃었다.

“내 그이, 벤도 항상 밤에 나를 안을 때 마다 사랑한다고 해요. 그런데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주지 않았죠. 그의 안주인 자리 말이에요.”

“……제롬은 나한테 청혼했어요.”

“아?”

마르사가 웃어보였다.

“그럼 나는 왜 아직까지 두 분이 결혼한다는 얘기를 못 들어봤죠? 내가 알고 있는 건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거, 그 뿐인데.”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제가 얘기했으니까요.”

“헛소리.”

마르사는 비웃음을 입에 걸고는 와인을 들이켰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어서 참담한 심정만 들었다.

“세실리아가 약속을 지켜주었으니까, 나도 그래야겠죠. 제롬 공작과 진짜로 결혼할 여자에 대해서 말해주는 거요. 궁금하지 않나요?”

“…….”

“역시 궁금하긴 한 가 보죠? 현 공작이 여섯 살 때 쯤, 신탁이 있었어요. 교황은 정확하게 제롬을 가리키며 그가 차기 공작이 될 거라고 예측했죠. 그 신탁은 결국 옳은 것으로 밝혀졌어요. 하지만 세실리, 중요한 건 그 다음의 일이에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말이 사실이고, 내가 평생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면? 그 끔찍한 감상에 속이 울렁거렸다. 무서웠다.

“교황께서는 이 땅에 머지않아 물의 언어술사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제롬 공작이 그녀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덧붙이셨죠. 신탁에 의하면, 공작은 결국 물의 언어술사와 결혼할 거래요. 그리고 두 사람은 율러 제국을 받치는 두 기둥이 되어 나라를 풍요롭게 하겠죠.”

마르사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 이야기에 당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요. 아시겠죠, 세실리? 약속이 아니라 신탁이에요.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신께서 땅땅 못을 박아두셨다고요.”

“……교황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 거겠죠.”

“그만 해요, 세실리. 지금 당신이 조금 불쌍해지려고 하고 있으니까. 물의 언어술사가 율러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신탁이 퍼지고선 그녀를 찾기 위해 움직이려는 세력들이 많아요. 뭐 그 상황에서, 물의 언어술사를 율러에 붙잡아 두려면 잘생기고 능력 좋은 제롬 공작이 그녀와 결혼하는 게 맞죠.”

혼란스러웠다. 물의 언어술사? 그건 그저 전설이었다. 몇 백 년 전에 씨가 말라버린 물의 언어술사 이야기와, 그녀가 곧 율러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신탁까지 모두 다 그랬다.

그녀가 말하는 그 신탁이 있고 매년에 한번 물의 언어술사를 찾는다는 국가 규모의 축제까지도 생겨났지만 그건 그저 의례였다. '주신 우니베르 내리시는 날' 같은 게 정말로 주신이 율러에 내려오는 날이 아닌 것 처럼 '물의 언어술사를 찾는 축제' 또한 진짜 물의 언어술사가 찾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여는 축제가 아니었다.

언어술사 이야기들은 모두 그저 신화의 일부이자,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스토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라고 믿고 있다니. 또 다른 언어술사 광신도였다. 아니면 정말로 그 힘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귀족들이 한꺼번에 미쳐버린 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다 같이 언어술사라는 사기극에 취해 있는 걸지도.

그때 마르사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 눈동자가 떨렸다. 이 여자는 미쳤다.

“처음에는 분명 화를 내실 거예요, 공작 전하께서.”

마르사가 내 어깨를 쥐고 싱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랍니다. 잊고 말아요. 당신도, 그렇게 잊혀가겠죠.”

“그 사람은 내게…….”

나는 공허한 표정으로 내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달콤한 밀주라도 되듯, 내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고 믿고 싶겠죠. 그래, 그러면 이참에 그 사람의 사랑을 시험해보고 싶지 않아요? 그는 결국 당신을 위해 어디까지 해 줄지. 신탁을 거스르고 당신을 찾아와 당신 남자가 되어 줄지, 이런 거 궁금하지도 않아요?”

내가 고개를 천천히 들자, 그녀가 싱긋 미소지어보였다.

“그는 어쩌면 이 나라의 안위 따위, 궁금하지 않을 지도 모르죠. 사랑에 눈이 멀어 물의 언어술사를 죽이고선 그 옆자리에 당신을 앉힐 지도 모르죠. 신탁 따위 거짓이라며.”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맞아, 만일 정말 그런다면?

“아니면 반대로, 찬란한 물의 언어술사. 그녀를 보고서는 첫눈에 반해 당신 따위 잊어버릴 수도 있고 말이에요. 그럼 당신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잖아. 그럼 여기서 내 수집품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요?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 사이에 낀 반지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제게 선택권이 있나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짙게 웃어보였다.

“즐거운 시간이 될 거예요, 세실리. 나가지만 않는다면 해치지 않아요. 아이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여기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탐해도 좋아요. 물론, 그들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나가지만 않는다면 이 지상낙원은 모두 당신 것이랍니다. 즐기세요.”

그리고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는 한동안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멍청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제롬은 나를 찾으러 올까, 아니면 나를 포기하고는 물의 언어술산가 뭔가 하는 그 여자를 기다릴까.

카밀리아는, 그 눈물 많은 아이는 잘 있을까. 에드거와 그린힐 가문이 옆에 있으니 참 다행인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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