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56화 (56/108)

<--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

“내릴 수 있겠어요?”

마르사가 내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힘없이 머리를 조금 저었다. 이미 와인이 온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정신은 흐릿했다. 그러니 똑바로 생각하고 걸을 수 있을 리가.

“그럴 줄 알았어, 유진.”

유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차 문 안으로 잘생긴 사내가 훅 들어왔다. 그는 심플한 정장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마르사가 귀히 여길법한 아름다움을 잘 갖추고 있었다.

“레이디,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나를 안아들었다. 마르사는 몇 잔 마시지 않아서 그랬는지 비틀거렸지만 잘 걷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포도 향기가 났다. 나는 생각하는 것도 잊고 그저 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나를 안아들고 걸었다. 나는 그에게 사심이 없었고, 그도 나에게 사심이 없으니까 이건 페어플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롬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일 말이다.

“마음에 들어?”

마르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가 조금 흩날리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아까 그녀의 이야기로 들었던 그 모든 일을 겪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못할 법한 깔끔한 미소였다. 나는 그 괴리에 잠깐 침묵했다.

“네?”

“내 수집품. 지금 널 안고 있잖아.”

나는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유진 씨요?”

그러자 그녀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유진 씨래, 아이고. 웃겨. 그냥 야, 나 너, 라고 불러도 되고 네가 마음에 들면 가져도 돼. 부숴도 돼. 그래봤자 한낱 나의 수집품인 것을.”

그는 동요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유진이라는 남자에게 동정심을 느꼈기에 별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가 딱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치맛자락이 펄럭이자 마르사가 몸을 빙 돌려 나를 보았다.

“이 곳에 있는 하늘부터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내 거야.”

그제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멋진 하늘, 그리고 멀리 보이는 구름 사이의 성, 그리고 그녀를 사이에 두고 쭉 펼쳐진 가로수, 멀리 보이는 호수. 정적, 하늘을 평화롭게 나는 새들이 보였다. 정말 평화로웠다.

나는 숨을 멈추기라도 할 듯 순간에 압도당해있었다. 더 이상 아무런 문제에도 귀속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이 시간 속에 녹아들어있었다.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 공간과, 이 정적과, 기분 좋은 새의 노랫소리까지.

그녀는 이 곳의 주인이었다. 그림같은 성의, 아름다운 여주인. 정말 동화 속 이야기와 같았다. 때로는 그녀가 말한 것처럼 현실은 이토록 잔혹한데, 어쩌면 치열한데, 이곳은 이렇게 아름다워서. 마르사가 앞장서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녀가 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마 이런 곳에 완벽히 녹아들기 위해서이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성년인 열여덟을 채우고, 우리는 더 이상 동화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나도 잔혹해서. 동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 스스로가 가진 것을 지키고 보호하고 살아가기 위해 〈오늘의 행복〉 이라는 동화를 덮고 이야기 없이 잠에 들었다.

그래서 완벽한 사회인인 우리가, 이런 동화 같은 곳에 다시 녹아들기 위해서라면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금 취기에 녹아내릴 필요가 있었다.

시간 속에, 끝없는 보이지 않는 시계 속에서 그것을 조금 잊고. 현실을 조금 잊고, 이곳에서 다시금 어릴 적처럼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오랜 격언 중에서 ‘술 속에 진리가 있다’라고 누군가가 그랬더라, 나는 끝없는 생각의 굴레 속에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

“정말 조용하죠. 그래서 성은 꼭 숲 속에 짓고 싶었어요. 아무도 못 오도록.”

마르사가 미소지었다. 어느새 가로수 정원을 지나쳐 호수 앞이었다. 호수 뒤로는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동화속에서나 볼 것만 같은, 제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줄을 지어 걸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호수가 보고 싶었다. 투명한 물에 있는 백조들과 놀고 싶었다.

“마르사.”

“으응?”

“호수에서 놀고 싶어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마르사라면 그러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는 유행가 〈Take my pain away〉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돼요, 세실리아. 날씨가 추워요. 여름엔 그러게 해 줄게요.”

“여름에요?”

“아, 그러니까 세실리아가 오면 말이에요.”

그녀가 휙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좋아요. 충분히 공평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요.”

“어서 와요, 보여줄 게 많아요.”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은 성문이 열렸다. 기사들이 그녀에게 경례를 해 보였다. 그리고 실내의 풍경이 내 앞에 펼쳐지자, 나는 순수히 감탄했다. 샹들리에 빛이, 주황색 빛의 무리들이 실내에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다. 눈의 여왕에게 납치당한 소년처럼, 나는 순수하게 모든 고민도 잊고 이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탄식을 내뱉었다.

천장에 걸려있는 태피스트리에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고대어 같았다. 나는 그것을 해석해보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나는 마르사를 바라보았다.

“마르사, 태피스트리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유진에게 물어봐요, 그 사람은 똑똑하니까.”

나는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가 너무 과묵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조차 잊고 있었다.

“유진, 태피스트리에 적힌 글을 해석해 줘.”

“아름다운 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입니다. 레이디.”

“저 글씨가?”

“예,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라니. 정말 마르사답다. 그 자체로 보배라는 라리아 고성. 나는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빛이 났다. 반짝이는 바닥부터, 그 아래서부터 하늘로 뻗어나가는 견고한 대리석 기둥, 그리고 그 위에 뻗어져있는 광활한 천장. 천장에는 탐미적인 화풍의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 하늘에서 포도 덩굴처럼 뻗어나오는 수많은 샹들리에, 그 샹들리에가 내뿜는 주황색 빛이 얼마나 따뜻한가. 마치 작은 태아시절로 돌아가 어머니의 배에서 살아숨쉬던 그 아늑함이, 포근함이,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되어 퍼져나간다.

“어때요? 나의 라리아가?”

마르사가 물었다. 역시 마르사와 어울리는 성이다. 마르사만을 위한 성이다.

“정말 아름다워요…….”

성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같았다.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옛날 그림책 속에 나타나는 생동하는 성 속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힌다. 천장의 그림이 춤을 추며 움직이며 말할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도 항상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항상 이곳에서 걸어나와 바깥 공기를 쐬면, 꿈에서 깨는 기분이에요. 잠을 자지 않고도 꿈을 꾼다는 의미가 이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면 마르사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정말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복도에는 그녀의 수집벽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 수많은 태피스트리, 그림과,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는 가끔 복도를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유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마르사, 복도에서 걸어다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모두 다…….”

“내 수집품이죠. 여자든, 남자든. 다.”

“아…….”

“인간은 정말로 가장 훌륭한 예술의 한 형태에요. 그렇지 않나요? 어느 예술품이라도, 조각상이라도, 그림이라도, 인간만큼 찬란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어요.”

“당연하죠.”

나는 의연하게 답했다.

“예술품은 인간의 모방인걸요. 인간이 신의 모방이듯 말이에요. 모방한다는 것은 결여되었다는 거예요. 예술이 고뇌를 담아도, 고통을, 시련을, 무조건적인 아름다움을, 서사를 담아도. 결국 인류의 아름다움을 초월할 수는 없는걸요.”

“으음, 그렇구나.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마르사는 제 옆에 있는 훌륭한 조각상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진은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도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레이디의 생각도 물론 옳습니다만, 제 생각은 인류가 가진 아름다움을 잣대로 예술을 감히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그림을 그렸을 때 예술가가 한 고뇌, 수없는 노력, 신념, 그로 인해 구현해낸 이상.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극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진의 말은 사람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이나 장르가 다르다?”

마르사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옳은 말이야. 좋아, 훌륭해, 마음에 들어.”

방긋 웃으며 이상을 논하는 그녀는 소녀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세실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유진이 너무 옳은 말을 했나요? 그래서 기분 나빴다면 유진을 마음껏 벌해도 좋아요.”

“아뇨. 괜찮아요.”

벌한다니, 음, 그런 취향은 아니었는데다가 그의 생각에 ‘감히’ 라는 단어로 제약을 걸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 순간이 좋았다. 소녀 시절, 수녀원에서 배움을 이어가며 친구들끼리 아무 걱정 없이 이상을 논했을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이곳에선 모든 것을 잊어도 좋아요.”

마르사가 매혹적으로 미소지어보였다.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우리.”

카밀의 결혼식, 제롬의 있을지도 모르는 진짜 약혼녀. 바깥세상의 고민이 지금이라는 행복을 비집고 막 위로 올라왔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요.”

지금을 즐기자, 지금을. 화려한 방 문이 가까워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파티가 한창이었다. 바깥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아무도 모를 파티. 여자들은 푹신한 소파에 누워있기도 했고, 바닥에 널브러져있기도 했고, 위스키를 홀짝거리기도 했다. 나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굉장했다. 굉장하고 은밀했다.

순간 소음이 뭉개져서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마르사가 피식 미소지어보였다.

“아예 다리를 쓰는 법을 잊은 건 아니죠?”

“으음, 네.”

“그럼 이제 방 안에서부터는 걸으세요. 여기에 남자는 못 들어오니까.”

그러자 유진이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마르사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겼다.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 하나가 마르사의 수집품이었다.

나는 내 몸을 담을만큼 거대하고 푹신한 쿠션에 몸을 뉘었다. 마르사는 그 넓은 공간중에서도 가장 높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내 맞은편에서 서로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 두 여자들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눈부시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들이 마르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스트레스.”

“응?”

“이 여자도 저희와 동류인 겁니까?”

“아니.”

마르사는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아직은.”

“네?”

“농담이에요, 세실리.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었잖아요.”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배의 닻이라도 되는 듯 무거웠다. 정신이 몽롱하고 아늑했다. 나는 폭신한 쿠션에 머리를 부볐다. 좋은 향기가 났다.

“정신이 아득해요. 나 내일 동생 결혼식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요, 레이디. 미스트레스가 잘 돌봐주세요.”

발음이 어색한 것으로 보아 외국인이었다. 혼혈? 짙은 피부의 여자가 내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루이즈, 이 머릿결좀 봐. 정말 비단결 같아.”

“어머, 나도 만져볼래.”

다 귀찮았다.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꿈속에서 달리려고 했을 때 그 무거운 꿈 속 중력에 내리눌려 발을 어눌하게 떼는 사람처럼, 나는 이 순간에 강하게 짓눌려 있었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 마르사. 이제 제롬에 대해서…….”

“쉬이.”

루이즈라고 불린 붉은 머리 여자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내리눌렀다.

“쉬세요. 졸립잖아.”

그녀가 내 눈을 감겨주었다. 이불!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리고 따뜻한 것이 내 몸을 덮는 것이 느껴졌다.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아,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레이디는 안전해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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