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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54화 (5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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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어둠을 부수고 불타오르라

The Break of Dawn

몽롱한 기분, 의식이 돌아온다. 눈을 천천히 떠 보면 옆자리에 그는 없다. 몸을 일으켜 물끄러미 침대 옆 서랍 위를 본다. 이번엔 편지도 없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푹 고꾸라진다.

“하긴, 6시에 일어나고서 열두시까지 침대에 누워있을 사람은 별로 없지.”

나는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쭉 켰다. 눈 앞, 저 멀리에는 어제 제롬이 바닥에 툭 떨어트린 동화책도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율러의 건국신화〉, 맞다. 그 책이었지.

“좋은 아침이에요, 로즈블룸.”

나는 익숙하게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발이 차가운 바닥을 몇 번 더듬거리다 슬리퍼를 찾아 꿰어 신었다. 바닥에 내 옷만이 엉성하게 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목욕가운을 찾아 입고는 침대 옆 끈을 당겼다. 곧 하녀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아가씨. 레이디 카밀리아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하녀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카밀리아가?”

“네에! 내일이 레이디의 결혼식이니 말이죠. 그래서 온 로즈블룸이 오전 내내 바빴답니다. 리지와 타냐가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곧 작은 아씨를 만나 보셔야죠.”

“와, 세상에. 정말 오랜만이구나.”

나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카밀리아에게 곧 간다고 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목욕을 끝내고, 대충 옷을 챙겨 입은 뒤에는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덜 마른 머리가 흔들렸고, 내 두 다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층계 아래에서 본 건…….

다름 아닌.

“언니!”

카밀과, 선물꾸러미였다.

엄청, 엄청 많은 선물꾸러미였다.

나는 층계 손잡이를 잡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카밀리아, 설마 저거 다 네가…….”

“아니.”

카밀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공작가에서 왔어. 공작가의 집사가 음, 그러니까. 리처드, 로이? 아 맞다! 랄프! 랄프 파커라는 사람이 왔었어. 그리고 대신 내 서명을 받고는 떠나시더라고.”

“허어.”

“다아-, 언니 꺼래. 이거 다.”

나는 박스의 고풍스럽거나, 멋들어진 포장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카로스, 솔, 레상, 미세로……. 전부 다 비싼 수입품이었다.

먼저 릴케 신성국의 패션의 얼굴이라고 불리는 브랜드 ‘이카로스’. 그곳의 목걸이 하나라면 율러의 성 열채를 샀다.

카사로 제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솔과, 레상, 그리고 미세로. 하나만으로도 비싼데, 이건 상자로 쌓아 만든 내 허리까지 오는 탑이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사람이 이걸 전해주랬어.”

카밀리아가 내게 곱게 접은 편지 하나를 건네줬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서 그것을 받았다. 화이트 공작가의 인장이 섬세하게 밀랍에 양각되어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는 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드를 펼쳐 보니 멋들어진 필기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일찍 로즈블룸을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 카드로 아침인사를 갈음합니다.

레이디께 어울리는 것들을 선물로 보냈는데,

오늘 아침 쯤이면 도착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저녁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제롬 화이트.

다 읽었을 때 쯤, 카밀리아가 내 팔을 덥썩 잡았다.

“언니, 뜯어보자. 같이 뜯어보자!”

“그래. 카밀리아.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도 좋아.”

“아니야, 언니. 난 그냥 구경만 할래.”

카밀리아가 큭큭대며 웃었다.

“공작전하께 선물 받은 거잖아. 선물 받은 걸 선물할 순 없어.”

“맞아, 맞아. 그래.”

그리고서는 나는 카밀리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촘촘한 흰 보석이 예쁜 히아신스 꽃을 만들고 있었다. 은은 녹이 조금 끼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기 충분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유서 깊은 반지인 것만 같았다.

“카밀리아, 그건…….”

“에드거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정원에서 내게 프로포즈했어. 에드거가 증조할머니께 받은 반지래. 벌써 내일이 결혼식이야, 언니! 결혼 준비로 정말 바빠서 편지를 못했어. 그건 미안.”

“벌써 내일이라니. 그러고 보니까 청첩장이 왔었구나.”

“맞아. 어제 밤에 설레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린힐 가는 잘 보살펴 주니?”

“세상에,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일 거야, 언니.”

카밀리아는 꿈에 부풀어 미소지었다.

“나는 더 행복할 수가 없었어.”

“잘 됐구나, 정말.”

“언니가 없었으면 이 모든 게 불가능했을거야.”

“오, 카밀. 정말 사려깊구나. 고마워.”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래도 자주 놀러 올게 언니. 그래도 되지?”

“그럼,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자, 뭐라도 먹자.”

카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식탁으로 향했고, 하녀들은 분주하게 아점을 준비해왔다. 나는 차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신문을 쫙 펼쳤다. 신문은 일요일쯤에 도착한 것이었는데, 지금 펼쳐보는 것이었다. 활자는 평소대로 조금 삐뚤거린 채로 번져 있었지만 나름 읽을 만 했다.

사실 그건 신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사교계 가십을 버무려 놓은 킬링타임용 종이뭉치에 가까웠는데, 딱히 머리를 쓰지 않아도 돼서 아침에 조용히 읽기 좋다.

그리고 내가 신문 1면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찾아냈는지, 한번 추측해 보시길.

〈‘그’ 제롬 화이트 공작을 홀린, 불세출의 요부. 로징턴의 가시, 세실리아 로즈 특집〉

그대로 얼어붙었다. 누구 특집?

게다가 요…부 라니. 정말 누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이 사람들,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어도 단단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러면 내가 무슨, 그이를 밤기술로 꼬셔서 그의 약혼녀 자리를 꿰찬 것만 같잖아? 아무리 그가 내게 반한 게 먼저더라도 뭐, 우리가 자긴 했으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건가? 아니면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충분히 요부인지도 몰랐다. 흐음.

나는 하녀들이 내온 복숭아 절임을 콕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언니?”

“응?”

“뭘 그렇게 정성스레 읽어?”

“쓸데없는 가십. 관심 가지지 마.”

나는 신문을 성의없이 접어서 책상 옆으로 접어놓았다.

“언니, 다 봤으면 나도 그거 보면 안 돼?”

“……카밀, 이번 뉴스는 좋지 않아.”

“언니 얘기야?”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카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로 걸어와 신문을 낚아채고는 재빨리 뛰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

복숭아 절임을 또 한입 베어물었다. 위층에서 카밀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져서 문가를 바라보았다. 하녀장 페넬로페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페넬로페에 뒤에는 나비같이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르사 로렌스가 있었다. 맞다. 그 화려했던 가면무도회의 주최자이자, 발코니에서 나와 대화했던 그 여자.

벤 칼라일 대공의 정부이자, 샬롯과 다이애나 위에서 사교계를 주름잡고 계시는 트렌드세터이시다.

눈이 마주치자 마르사 로렌스가 과즙이 터져나올 듯한 특유의 시그니쳐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스카, 잭, 제롬, 그다음에는 이 여자라니. 정말 로즈블룸이 쉴 틈이 없었다.

“어머, 세실리아. 내가 좋은 아침 시간을 방해했나요?”

“안녕하세요, 마르사.”

“나 기억해요? 우리 무도회에서 대화 나눴잖아요.”

“물론 기억해요.”

그 말에 그녀가 까르륵 미소지어보였다.

“세상에, 기억해주다니. 정말 고마운 걸요?”

“무슨 일이세요?”

“으음, 나한테 거짓말 한 당신이 괘씸해서?”

마르사는 천천히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그 순진한 얼굴로 ‘나는 공작의 약혼녀가 아닌 걸요.’ 하더라니만, 일요일 신문 봤죠? 결국 세실리아가 제롬 화이트 공작의 약혼녀였잖아. 나 좀 놀랐어요.”

“아.”

제롬이 계략을 꾸며 가짜 약혼 소문을 퍼트렸다는 말을 굳이 할 생각은 없었다.

“내 직감은 이렇게 또 맞아드는 구나, 하고. 세상에. 당신 정말 유명하잖아, 요즘. 그래서 내가 조금 어울려주려고 왔어요. 심심해서.”

꽤나 오만하다고 생각될 만한 발언이었지만, 마르사 로렌스라면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뭐하고 놀래요?”

마르사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글쎄요, 제가 좀……. 그러니까, 바빠서.”

카밀리아의 결혼식, 오늘 밤에 찾아온다는 제롬, 그리고 책 읽으며 빈둥거리고 싶다는 마음. 게다가 카밀리아가 결혼하고는 아그니스랑 같이 가기로 했던 축제도 있고…….

“요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르사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하녀가 가져다 준 찻잔을 들어올렸다.

“흐음, 아주 고급 정보였죠. 벤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모를 지도 모를 만 한 이야기였죠. 아주 특별한, 그런.”

“그게 무슨…말씀이세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제롬 화이트 공작 전하께서. 세상에, 아주 튼튼한 덫을 놓았다죠? 세실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물고 늘어질 아주, 튼튼한 덫.”

그녀의 눈빛이 나를 빨아들일 듯 강렬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마르사?”

“당신 남자가 가짜 약혼 소문을 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신 잡아두려고.”

마르사가 찻잔을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것은 내가 덮어두려던 제롬의 흠이었다. 그리고 마르사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당신은 알고도 그걸 덮어주려고 했나 보죠?”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나는 사교계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길 원하지 않았다. 제 약혼에 대해 거짓 소문을 뿌린 일은 분명 제롬의 흠이 될 만한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가 가장 중히 여기는 가치가 신뢰임이 분명했을 때, 거짓 약혼 소문을 푼 제롬의 명성이 더럽혀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교계의 사람들을 상대로, 나를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극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그 가짜 소문에는 아마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이니 말이다. 그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제 명성에 마이너스가 될 것을 알고도 그가 그런 일을 감행한 것을 사람들이 알면, 사람들은 분명 내가 그의 약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롬이 나한테 그렇게 미쳐있는 것을 알면, 우려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제롬은 그들의 충언에 귀기울이겠지. 안 그래도 언론이 나보고 요망한 계집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나를 멀리할지도 몰랐다. 반대로 제롬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내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나는 훌륭한 인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생각이 쓸데없이 먼 곳까지 미쳤지만, 어쨌던 우리는 평범한 약혼녀와, 약혼남으로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제롬의 굳건한 탑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만 했다.

마르사 로렌스, 이 여자의 수다스러운 입을 어떻게 단속해야 할까. 마르사는 사교계의 꽃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게 뭐예요, 마르사.”

“시간.”

그녀가 깔끔히 대답했다.

“자, 놀러 가요.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식당 문 앞에 카밀리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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