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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53화 (53/108)

<-- 돌아온 탕아 -->

이때, 다른 쪽의 율러 왕국에서는…….

따사로운 새소리가 햇빛을 타고 느릿하게 퍼졌다. 침대에는 한 사내가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두 여자가 베개에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도롱도롱 숨을 쉬고 있었다. 늦오후의 햇빛이 따사롭게 침대 위로 내리고 있었다. 실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사내의 얼굴을 뜯어보자. 푸른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아름다운 골든블론드, 흰 살갗에 미간은 약간 찌푸려진 고운 얼굴, 닫힌 눈에 눈꺼풀이 문득 깊다.

그의 이름은 요나단 화이트. 율러 왕국의 한 축인 화이트 가문의 장남, 즉 현 화이트 공작의 형 되시는 분이었다.

“으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특이한 인사다. 곱슬거리는 짙은 금발, ‘단정’ 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퇴폐적인 인상,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에 눈 밑에 짙게 난 다크서클.

항상 반듯하고 신사적이며 빛이 나는 제 동생, 제롬과는 아주 정 반대인 인사이다. 이것이 힘의 경쟁에서 진 패자의 최후일까.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더니, 항상 여자나 후리며 퍼 자기 바쁜 요나단에게는 화이트 가문의 후계 자리가 과분했을 지도 모른다.

환락가로 유명한 노스아워의 탕아, 영원한 화이트 가문의 2인자, 아쉬운 실패작. 사람들이 요나단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말이었다.

요나단은 이 말들을 혐오했다. 너무나도 혐오해서 그 말들에게서 도망치려 나머지 일생을 더 치열하게 술로 때우며 연명해왔다.

그래도 동정하지는 마시길. 그는 절대 노력가는 아니었다. 요나단은 덜떨어진 천재로 태어난 게으름뱅이였고, 제롬은 훌륭한 수재로 태어난 노력가였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요나단이 가까스로 눈을 떠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요나단을 노려보았다.

인기척에 몸을 가린 것은 요나단의 옆에 있던 두 숙녀들이었다. 요나단은 이불 뒤 반라로 킬킬대며 시가를 물었다.

두 사내는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나단은 무심하게 시선만으로 제 시가 끝을 붉게 태웠다. 불의 마법이었다. 문턱 뒤 사내가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너 따위랑 동행해야 한다니. 신께서 불의 사제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군.”

그의 말에 요나단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서늘한 푸른 눈동자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언어술사’ 라고 한단다, 친애하는 세드릭.”

“역겨운 말투 집어치워.”

“너 같은 지루한 자식이 카사로 제국의 황태자라니, 카사로 백성들이 왜 그렇게 불행해 보이는지 알 법도 하네.”

“화이트.”

세드릭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요나단은 물러서는 기색 없이 무례하게 빙글거리며 웃어재꼈다.

“왜, 어쩌게. 디어뮈르 전쟁에서 불에 휩싸여 쳐발린 게 우리 나라냐? 이 몸이 없었더라면 너넨 아직도 내 잘난 동생새끼 눈치나 보며 벌벌 떨어야 했겠지. 너넨 언어술사 없어서 참 힘들겠다. 아니, 아 맞다. 있었지. 속성이 바람이었댔나? 바람이랑 불은 상성이……. 컥.”

요나단이 제 목을 틀어쥐고 침대에 고꾸라졌다. 그의 옆에 있었던 창녀들은 이미 제 몫을 챙겨 방을 떠난 지 오래였다.

요나단은 그대로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며 기도에 뭐라도 막힌 듯 켁켁댔다. 세드릭은 이 모습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뚜벅, 뚜벅. 세드릭이 천천히 침대 옆으로 가까워졌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요나단에게 향했다.

“내 아버지가.”

그가 시선을 낮추어 요나단을 보았다. 세드릭의 손을 거칠게 틀자 요나단이 더 거세게 저항하듯 발을 버둥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목을 더욱 거칠게 억죄고 있었다. 요나단의 목에 두드러진 핏줄이 대단했다. 아마 그것은 세드릭이 다루는 바람風이었을 것이다.

“네놈새끼를 국빈이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너는 한참 전에 죽었을 거다.”

컥, 컥. 요나단의 얼굴은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온통 붉었다. 세드릭은 한숨을 쉬며 허공의 제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요나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다. 이완된 그의 입술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고, 그의 코에서는 붉은 코피가 터져나왔다. 요나단은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키더니 그것을 대충 훔쳤다. 세드릭은 한심하게 덧붙였다.

“왜 네 동생이 너 대신 화이트 공작이 되었는지 알 법도 하군.”

“닥쳐.”

“내가 카사로의 황제가 되면 제일 먼저 죽이는 건 너다.”

“그러시던지.”

요나단은 힘없이 침대에 푹 쓰러졌다.

“안 그래도 인생 참 재미없었던 차에, 잘 된 일이겠네.”

“옷이나 입어. 지금 떠난다.”

“젠장할.”

“시간에 맞춰 그 축제에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겠지.”

“하여간 카사로 놈 새끼들은 하나같이 다…….”

세드릭이 뒤를 돌아보며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요나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서는 속으로 분명 쫄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열심히 변명했다.

참으로 지랄맞다.

요나단은 대충 옷을 꿰입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춥다.

그리고 생각하길, 동행하는 새끼가 카사로의 황태자라 부족함 없이 여행할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세드릭은 이것이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라며 신분을 감춰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굳이 수많고 많은 여관중에서 이런 후진 여관을 선택했다.

층계를 내려갈수록 소음이 커졌다. 긴 망토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게 영 지랄맞다. 그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구석에 앉아있는 재수없는 망토 뒷통수를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향했다.

대낮부터 술인 인간들이 낡은 테이블을 땅땅 쳐가며 아침식사들을 하고 있었다. 요나단은 그 사람들과 최대한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세드릭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잘난 상판대기와 고상하게 움직이는 포크와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꼭 이런 데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쓸 건 뭔데? 빌어먹을 망토가 아니었으면 네가 높으신 분이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 여기 없었을 거라고.”

세드릭은 요나단을 무시하고는 제가 하던 것을 계속했다. 요나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 세드릭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반대로 너는 화이트라는 패밀리 네임만 아니었어도 귀족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요나단은 제 앞에 놓인 성의 없는 아침식사를 손가락으로 몇 번 쿡쿡 찔러보고서는 뼈다귀를 잡아 고기를 게걸스레 뜯기 시작했다. 그는 쩝쩝대며 말했다.

“동생새끼가 권력을 잡고 날 쫓아낸 지가 4년이다. 아주 무일푼으로 쫓겨났지. 말 한 필과 재수없는 찐 옥수수 5개가 전 재산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 빌어먹을 새끼는 나더러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더라군.”

요나단이 때가 눌러붙은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그의 목울대가 거침없이 울렁였다. 세드릭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 식어가는 고기를 천천히 썰어댔다.

취기로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요나단이 넋두리하듯 말했다.

“그렇게 4년을 굴렀어. 아주 밑바닥에서. 재수없는 동생새끼.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았다. 그런데 매너라니, 매너는 뭔 얼어죽을 매너. 매너는 너 같이 배때지가 부른 망할 새끼들이나 차리는 거다. 배고프고 밤에 등 차가워봐, 그럼 매너 소리가 나오나.”

“나는 네 동생이 왜 널 죽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데.”

세드릭은 냉소를 지어보였다.

“너 같은 치들은 뻔하지. 하는 건 숨이나 쉬며 연명하는 것밖에 없어서 그저 그렇게 내쫓아버리면 몇 걸음 못가고 죽어버릴 걸 굳이 아니까. 굳이 네 동생, 화이트 공작은 제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제 아버지에, 제 형까지 죽였다는 소문은 명성에도 큰 치명타를 날렸을 테니까.”

멱살이라도 잡아 올릴 줄 알았는데 요나단의 표정은 감정의 동요 없이 잠잠했다. 세드릭은 잔뜩 풀이 죽은 그의 얼굴에다 대고 양껏 빈정댔다.

“아, 이제 분노하는 것도 지친 건가?”

“너한테 화내봤자 도움 하나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뒤로 그만두었어.”

요나단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술을 들이켰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면 그래도 더러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야.”

“…….”

“서덴베르크.”

그러자 세드릭이 성의없이 요나단을 바라보았다. 요나단은 꼬인 혀로 말했다.

“그런데 너 여기 있어도 되냐? 아니 그 새끼 말만 믿고 카사로에서 율러까지 몸소 행차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시간인가 뭔가 다루는 언어술사가 뻥친 거일수도 있고. 물의 언어술사는 진즉에 씨가 말랐어. 솔레더스 왕가가 멸문하고는 그 뒤로 없었다고.”

“마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그 년이 이번엔 틀린 거일 수도 있겠지.”

“말 조심해라, 화이트. 그 분은 전 세계에 유일한…….”

“시간의 언어술사십니다, 네, 네. 아주 대애-단한 분 되시겠습니다. 솔직히 네가 불쌍하다. 서덴베르크. 그렇게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믿어재끼고. 그래봤자 스스로가 시간의 언어술사라고 헛소리 하는 그 계집의 말 뿐이잖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나단은 세드릭의 어깨를 동정하듯 몇 번 툭툭 두드려 주었다. 세드릭의 미간이 구겨졌다. 요나단은 완연한 비웃음을 얼굴에 내걸고는 말했다.

“마고 그 년이 틀렸어. 물의 언어술사는 없어. 있어도 진즉에 다 뒤져버렸다고. 그래서 카사로나, 릴케 신성국이나 다들 그 조그만한 율러 눈치를, 아니 내 동생새끼 눈치를 보면서 빌빌 길 수밖에 없는 거라고. 불을 막을 수 있는 건 물 뿐인데 물의 언어술사들이 다 뒤져버렸으니까 말이야.”

“…….”

“솔직히 인정해라. 내가 능력은 쥐뿔도 없어도 불 그거 조금 부릴 수 있다고 너네 아버지 눈 돌아가는 건 못 봤냐? 물의 언어술사 씨가 마른 뒤로, 세 나라 돌아가는 꼴이 딱 그거야. 가위 없는 가위바위보. 세력의 균형은 깨진지 오래라고. 그 중에서 누가 갑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지. 다들 알아서 내 동생한테 기어재끼니까 말이야.”

세드릭은 눈을 찌푸렸다. 그가 황태자 신분으로 요나단의 무례를 받아주어야 하는 이유도 다 요나단이 화이트이자, 불의 언어술사였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물의 부재로 힘의 균형이 깨진 이상, 최강은 불이 맞았다. 하늘의 언어술사도 날씨를 예측할 수만 있지,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었다. 요나단의 말 그대로 바람과 불은 상성이라, 불이 있는 데 자신의 능력으로 폭풍을 불러올 수도 없었다. 상황만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 좋은 바람은 오히려 불의 힘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래서 불 앞에서 모두가 철저한 약자였다. 그래서 세드릭은 절박했다. 마고가 물의 언어술사가 율러에 있을 거라고 하면, 그 사람을 찾아야 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물의 언어술사는 제롬 공작의 훌륭한 적수가 되어줄 것이다.

세드릭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굳은 표정으로 요나단을 보았다.

“마고가 물의 언어술사가 율러에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네놈은…….”

“말 조심해, 나 너네 나라 국빈이야.”

“……화이트 너는 나를 도와 물의 언어술사를 찾을 것이다.”

세드릭의 경직된 말투에 비해, 요나단의 표정은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요나단은 뒤로 기대앉으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치고는 눈을 감았다.

“있어야 찾든 말든 하지. 헛소리.”

“화이트!”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애초에 이런 후진 데에서 묵을 거면 내 도움은 왜 필요한데? 암만 내가 이십 몇 년 동안 율러 사람이라고 했어도, 이런 후진 데는 잘 모른다고.”

요나단이 툴툴대자 세드릭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요나단은 고기를 뜯었다.

“나중에 돌아갈 때 보자고, 그럼. 나는 네 잘난 얼굴에다가 물의 언어술사 같은 건 없다고 실컷 비웃어재끼고 있을테니 말이야.”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란한 듯, 그는 쭉 그렇게 말이 없었다.

식사와 숙박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자, 광활한 푸른 하늘이 두 사내의 눈앞에 펼쳐졌다. 기온은 건조했고, 차가운 봄바람이 부는 것 빼고는 좋은 날씨였다.

그 두 사람 앞에는 낡은 마차가 있었다. 세드릭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요나단이 마차에 타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안 타고 뭐하는 거지?”

요나단은 바닥에 뒹굴던 신문 쪼가리를 줍고 있었다. 세드릭은 냉소를 입에 걸고 양껏 빈정거렸다.

“아하, 아직도 그 4년 전의 거지 근성을 못 버리셨나?”

“닥쳐, 서덴베르크. 지금 읽고 있잖아.”

“쓸데없는 가십에 신경 쓸 시간 없다. 빨리 타.”

“내 동생 얘기인데? 1면에, 아주 크게.”

그러자 세드릭이 멈칫했다. 요나단은 신문을 다시 바닥에 던져버리고서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드디어 요나단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요나단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마차 벽에 기대어 웃어재끼며 벽을 퉁퉁 쳐댔다.

“드디어 네가 미쳤군, 화이트.”

“아니.”

요나단이 천천히 얼굴빛을 지웠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마차에 탔다.

“내 동생새끼가, 드디어 약점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 미친 새끼가, 세상에. 여자라니.”

“거리의 뜬소문이겠지.”

“약혼했다더군. 아주 그렇게 절절한 사랑꾼이 또 따로 없다고.”

이랴! 마부의 걸걸한 호령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나단은 흔들리는 차체를 느꼈다. 그리고서는 짙게 미소지어보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도 용건이 생겼겠어. 이 빌어먹을 땅덩어리 안에서 말이야.”

“화이트 너…….”

“서덴베르크 넌 빌어먹을 물의 언어술사 찾는 일에나 집중해.”

“…….”

“곧 재미있는 일이 생길테니 말이야.”

요나단이 고운 입을 째며 조소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역시 우리 독자님들이라 해내시군요!

분량 꽉꽉 채워서 올립니다. 이벤트 성공시켜주셔서 감사해요.

작가를 격려하는 데에는 역시 고운 감상과 추천이죠.

항상 행복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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