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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52화 (52/108)

<-- 사랑한다는 것은 -->

새벽이 왔지만 괜찮았다. 그 사람이 내 옆에 있으니까. 제롬은 내 방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 공간에 있는 것이 좋았다. 내 공간에 있는 그는 완벽한 나의 것이었다. 내 것. 내 사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불러주고, 내게만 다정한 나만의 공작 전하셨다.

“빨리 와요, 제롬.”

“…….”

그가 멈춰선 것은 책장 앞이었다. 나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덮어놓은 동화책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살폈다.

무심히 내리깔린 속눈썹이나, 완벽한 옆모습이 아름답다. 아마도 미의 여신이 계셨다면 제롬을 만들 때 실수로 아름다움 가루를 통째로 조각상 위에 뿌려버린 건 아닐까.

그가 들고 있던 동화책은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봤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율러의 건국신화〉, 그리고 내가 덮어놓았던 페이지에는…….

“세실리.”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가만 들고 있던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용맹하게 검을 들고, 말 위에서 소리치는 1대 화이트 공작이 있었다. 그의 뒤에는 수천, 수만의 군사들이 있었고 그의 앞에는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그의 비밀에 대해 몰래 공부하려 했던 게 들켰던 모양일까.

그는 한참동안 눈을 내리깐 채로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그러니까 그냥 만약에 말입니다.”

“네에.”

“제가 이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화염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게 세실리아를 무섭게 하겠습니까?”

조심스레 묻는 게 마치 상처입은 짐승 같았다. 상처입은 짐승이 조심스레 나무 뒤에 숨어서 병아리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내가 조금 무섭게 생겼을 수도 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랑 대화하고 웃고 놀았던 나는 사실 엄청 무서운 짐승이야.

그럼 병아리는 뭐라고 말할까? 내 사랑스러운 야수님, 당신은 이미 내 프린스 차밍이세요. 상대가 도망가 버릴 까봐 두려움에 떠는 건 오히려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그렇게 얘기하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짓궂게 미소를 짓고서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럼 만일 제가 어맛, 무서워. 하고서는 도망간다면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진중했다. 진중하게 다른 곳을 보고서 뜸을 들이는 것마저 아름다웠다. 정말 잘생겼다.

“…….”

“저는 오히려 멋질 것 같은데요? 알고 보니 남편 될 사람이 마법사였다니, 정말 대단하잖아요. 알고 보니 설화 속 이야기가 전설만은 아니었다, 와! 정말 그건 멋진 일이겠는데요!”

“마법사가 아니라 언어술사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 불이 수천과 수만의 사람을 불태웠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불태웠습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 말입니다. 가정이 있고, 생명이 있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 것이 저라고 하면, 당신은 그런 제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 게 만일 저라고 해도, 당신은…….”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오스카가 했던 말이 설마, 진짜였단 말일까.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 말 대로 그 말이 사실이었더라면.

나는 어찌되었던, 이 사람을 여전히 그대로 사랑할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기적인 감정이라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던 나는 이 사람을 사랑했다. 물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감정과는 별개였다.

“상관없어요.”

그가 나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이런 감정의 동요가 좋다. 나에게만 보여주는 그의 다채로운 빛깔들. 그의 생명의 빛깔을 사랑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더라도 당신은 내 제롬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을 똑같이 사랑할 거예요. 좋아하니까. 정말 어쩔 수 없이 많이 좋아하니까.”

“세실리아.”

“그 사람들에게 유감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전사자들에게. 그런데 그렇게 안 했으면 당신이 다쳤을 거니까. 그게 더 싫어서, 제가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하려고요. 그래서 그게 저한테는,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요.”

그는 그렇게 한참동안 내게 안겨 있었다. 툭, 하고 그의 손에서 동화책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구르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그것을 대충 훔쳐 주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게 조심스레 키스했다. 나는 그의 목에 내 팔을 감았다. 그냥 키스였지만, 정말 많은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나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쾌락으로 흐려졌던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였다. 차가운 새벽공기에, 장작은 타닥타닥 타들어갔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었고, 그는 나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도 뭐 하나만 물어보면 안돼요?”

“예. 좋습니다.”

“만약에…….”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샬롯 베르디게츠같은 제국 최고의 미녀가 유혹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별, 별다른 의미는 아니고. 제 말은 그게…….”

“…….”

“그러니까 넘어가요? 아니 물론 넘어가죠. 뭐 제롬도 남자인데.”

“세실리아.”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 머리카락을 들어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저는 제가 아끼는 것들만 아낄 따름입니다.”

그가 내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세실리아가 아닌 다른 여자들은 싫습니다.”

“정말요?”

“세실리아는 그러면 왕세자가 구혼해오면 받아줄 겁니까?”

“아뇨.”

웃어보였다.

“역시 전 제국 최고의 미남을 택할래요.”

그리고 그의 입술에 내 것을 쪽 소리나게 꾹 눌렀다.

“내 거에요, 내 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그리고 갑자기 즐거운 기억이 생각나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어렸을 때 재미있는 놀이를 했었어요, 카밀리아랑.”

“그랬습니까. 어떤 놀이였습니까.”

“아니, 놀이는 아니었죠. 음 우리 집에 먹을 게 드물었는데, 아버지께서 일터에서 돌아오시면 그래도 맛있는 디저트들을 사오긴 하셨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정확히 그걸 반으로 나눠서 거기다가 자기 거라고 침 뭍여놨어요. 더럽긴 했는데, 효과는 대단했죠.”

그가 낮게 웃었다. 이 얘기를 내가 왜 했더라, 아 맞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에다 다시 입을 쪽 맞추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침 뭍혀놨으니까, 내꺼 맞죠? 조,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뭐 어쨌든.”

그 때 그가 몸을 일으켜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뭐, 이러면 공평해 진 거 아닙니까. 저는 세실리 것이고, 세실리는 제 겁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웃었다. 그의 품에 꼭 안겼다. 그가 내 팔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같이 여행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와, 레이디 단 둘이서만 말입니다.”

와, 다시 프로포즈 할 생각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그의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소지어보였다.

“어디로 가요?”

“웨스트 체셔 말고도 공작령인 발리타로크가 있습니다. 제도에서 좀 먼 곳에 있는 넓은 땅이고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곳에 초대 화이트 가주가 세우신 화이트 캐슬이 있습니다. 저는 세실리에게 그 곳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라스트 바빌론이 초대 화이트 공작께서 세우신 성이 아닌가요, 그러면?”

“라스트 바빌론은 5대 가주께서 왕께 하사받아 재건축한 성입니다.”

“5대 가주요?”

“예. 그분께선 뛰어난 전쟁 병기셨지만 절대 숙녀는 아니셨습니다. 마치 성미가 고대의 바이킹 같다고들 하셨죠. 술 좋아하시고, 미색을 즐기셨고, 마음에 안 들면 다 부숴버리고. 하여튼 독특하신 분이셨습니다. 당대 슐츠 후작이 너무 옳은 말만 지껄여서 짜증난다며 아무 이유 없이 블리시스의 절반을 아수라장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나는 조금 웃었다. 그 시대 서기관은 지루할 일이 없었겠네. 그가 내 손가락 사이에 제 것을 끼워넣어 그것을 꼭 쥐었다.

“그때 릴케 신성국이 쳐들어와 전쟁이 있었습니다. 선대 공작께선 선두에서 지휘하며 강력한 적국의 병사들을 쓸어내셨습니다. 국왕께서 그분의 공로를 치하해 제도 가까이에 있는 넓은 영지와, 성을 하사하셨습니다. 사실 공작께서 협박해서 뜯어 낸 거라고 봐도 무관합니다만, 하여튼 성의 이름을 지으라는 말에 그분은 시큰둥하게 그런 것 따위도 지어야 하냐고 물으셨답니다.”

“정말 화끈하시네요.”

“그래서 살아생전 ‘공작 전하’보다는 ‘블러디 리사’ 로 많이 불리었다고 합니다.”

아, 그녀라면 잘 알고 있었다. 블러디 리사, 화이트 공작가의 유일한 여공작. 분명 제롬의 복도에 있는 수많은 선대 화이트 공작 사진들 중 유일하게 홀로 여자였다.

그런데 라스트 바빌론이 '그' 블러디 리사의 작품이었다니, 그 기원은 내 허접한 역사책에서도 또렷하게 명시 된 바 없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역시 제롬은 살아있는 역사책이었다. 역시 내 남자라 똑똑하기도 하지,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성 이름이 왜 라스트 바빌론이 된 거예요?”

“그때 유행하던 고급 와인 이름이 〈바빌론〉 이었었는데, 공작께서 바빌론의 뜻을 알고선 감명을 받아 '라스트 바빌론'으로 지으셨답니다.”

“재밌네요.”

나는 그의 품에 내 머리를 비볐다. 너무 즐거웠다. 세상에, 라스트 바빌론이 그 유명한 와인 '바빌론'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 있을까?

아마 화이트 공작가 내부 기록이라 저명한 역사학자들도 잘 모를 것이다. 나는 은근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괜시레 미소가 났다.

“화이트 캐슬도 보고 싶어요. 당신에 대한 거라면 다 알고 싶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밀리아의 결혼이 끝나면, 우리 그 여행 가요.”

“좋습니다.”

“졸려요, 이만 잘래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의 세실리.”

“제롬도요.”

나는 그의 품에서 편히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다. 서로에 맞춰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 용기 내는 것, 한 발짝 더 걸어 나가는 것. 행복해지는 것. 서로를 아끼는 것. 이해하는 것. 눈높이를 맞추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는 것.

그의 큰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쓴다. 눈을 조금 뜨자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다시 그의 품에 쏙 안긴다.

“너무 좋아요.”

“주무십시오, 세실리.”

“너무 좋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 따뜻한 목소리, 절대 놓고 싶지 않다.

“있잖아요, 제롬.”

“예.”

“항상 생각했던 건데, 제가 늙어서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돼도, 나중에 매일 봐서 더는 새롭지 않게 돼도 똑같이…아껴 줄 건가요? 우리 사이에 가문의 이해관계가 끼어있지 않아서, 사랑마저 사라진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순간이 평생 같았다. 그가 침착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목울대가 울렁였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세실리는 제게 항상 아름다울 겁니다. 늙게 되어도, 매일 보게 되어도, 세실리는 세실리일 겁니다.”

“……그럼 제롬은 사랑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나요?”

“끝에 갈 때까지는 이렇다 말할 수 없는 거겠지만 말입니다.”

“…….”

“서로를 믿기로 약속한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간순간이 찬란하도록 말입니다. 절대로, 저는 세실리를 홀로 두지 않겠습니다. 항상 옆에 있겠습니다.”

그가 반지 낀 손으로, 내 반지 낀 손을 다시 한 번 맞잡았다. 두 개의 반지가 느껴졌다.

“믿어 주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가 엄지로 내 눈물을 닦아 주고는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울다 잠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해피 엔딩이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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