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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51화 (51/108)

<-- 사랑한다는 것은 -->

그 뒤로 얼마 있지 않아 집사장이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당연하지, 저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나를 어서 그에게로 데려다 줄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눈만 굴릴 따름이었다.

“저, 레이디.”

“안 들여보내 줄 건가요? 적어도 이 창살은 치우고 얘기해요.”

얼마나 와 봤다고 상전처럼 구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다급했다.

“그게…….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들여보내드리기 조금 곤란합니다. 내일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도 내가 지금 왔다는 걸 아세요?”

“공작 전하의 지시입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나 이렇게 약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차이는 건가. 앨런한테 차였을 때도 비참하다는 기분은 안 들었는데.

‘그 사람이 이제 내가 질렸대요?’

‘이게 그 사람 방식으로 이별하자는 건가요?’

‘그래서 편지도 안 보낸 건가요?’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나려고 한담.

“그래요. 이별은 깔끔하게 편지로 하자고 전하세요.”

“레, 레이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뭔데요!”

내가 뒤돌았다. 집사는 한참동안 망설이다 말을 꺼내놓았다.

“공작께서는 지금 사냥에 나가셨다, 막 돌아오셨습니다.”

“그게 왜요?”

“그, 그러니까 많이 지치셨겠지 않습니까. 이별이라니요, 전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아, 타는 냄새. 무언가가 지독하게 타는 냄새가 여기까지 나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무슨 냄새일까. 나는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짐승의 살갗 같은 것이 지독하게 타버린 뒤 진동하는 악취.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짐승 손질하고 남은 가죽들을 태우곤 해서 알고 있었다. 못 쓰는 사냥감을 태웠기라도 한 모양인가. 매캐하고 지독했다.

“그 안에 여자라도 있어요?”

“맹세코 없습니다, 레이디. 전하께는 레이디뿐이지 않습니까.”

“입발린 소리. 난 갈 거예요.”

“레이디!”

뒤돌아 나왔다. 거짓말, 거짓말일 것이다. 사냥을 하고 왔어도, 지쳤다 해도 못 만나줄게 뭐람. 떳떳한 신사라면 절대 제 애인을 이렇게 문전박대할 리 없다.

여자이려나? 그러니까 쓸데없이 사냥 핑계를 대는 거겠지. 나쁜 사람. 정말 그럴 거면 진즉에 헤어지자고 하던가.

마차에 타고 팔짱을 낀 뒤 차체의 움직임을 느낀다. 오스카가 틀렸다. 이쯤이면 이건 철저한 외사랑 아닌가. 기껏 용기를 내려고 마음을 먹으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

비라도 내리지. 하늘은 다시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비는 안 오고 온통 우중충해서 나쁜 기분만 더 나빠졌다. 집에 가면 또 혼자일 텐데 벌써부터 그 적막함이 싫었다.

혼자이다는 기분을 혹시, 아는지.

집 문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공기가 다르다. 혼자이면. 공기가 고요하고 적막하고, 침묵은 당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이 잠잠하다. 사람은 있는데 말붙일 사람은 없다.

“페넬로페, 나 왔어.”

“오셨습니까.”

그녀는 사무적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사는 됐어.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아.”

“다른 용건은 없으십니까.”

“아냐, 됐어. 고마워. 가봐도 좋아.”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멀어졌다. 한숨을 쉬었다. 남편, 남편을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블룸에는 활기가 필요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아줄 남편이 필요했고, 이렇게 외로움이 뼛속으로 사무칠 때 든든하게 미소지어줄 수 있는 남편이 필요했다.

나는 층계를 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교계는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모두가 더 좋은 짝을 찾으려고 투쟁하는 곳이다. 그런 곳으로 다시 돌아가 무한경쟁을 통해 멋진 남편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세상은 당최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방 문을 열자 익숙한 내 방이 있었다. 하녀들 몇은 바닥을 쓸고 있었고, 몇은 장작불을 확인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하던 것을 그만 두고 내게 다가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예쁜 드레스를 다시 벗고, 코르셋을 풀고, 머리장식을 떼어냈다.

화장대 앞에는 예쁜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다. 카밀리아의 청첩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다음주 화요일. 정말 머지않아 그녀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또 한숨이 나왔다. 카밀리아가 결혼하면, 첫째인 나는 더욱 결혼하기가 힘들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예전에는 한두 개씩은 왔던 구혼자들의 편지가 끊긴지 꽤 되었다. 게다가 작은 무도회 같은 곳에 가면 사내들은 내가 말 거는 것도 무서워한다.

그래도 옛날에는 구혼하는 사람들, 꽤 많았었는데. 하루에 열 장씩도 왔었고. 게다가 내가 소문이 좋지 않았어도 말을 걸었을 때 도망가는 신사들은 없었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아나, 정말로. 나는 피식 웃었다.

편한 드레스를 갈아입고, 창가 앞에 앉았다. 팔짱 위에 머리를 기대니 내 짙은 머리카락이 대리석에 흩어졌다. 대리석의 차가운 냉기에 머릿속이 모두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남편 찾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세상 쉬운 일 하나 없다.

나쁜 사람. 이렇게 떠나갈 거라면 애초에 그러게 그 발코니에서 고백하지를 말지. 나는 한참동안 창밖을 가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시간 지나는 줄도 모르고 한 곳만 의미 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 때 인기척이 들렸다.

“레이디, 방문자가 있습니다.”

페넬로페였다.

“됐어. 돌려보내.”

“제롬 화이트 공작전하십니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 사람이 여기엔 웬 일이람.

“들여보내지 마. 직접 갈 거야.”

나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내가 화난 이유들을 깔끔히 정리해 두었다. 이게 마지막이려나. 나는 빛나는 반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준비해두었던 이별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 시시. 스스로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누구세요?”

굳이 알면서 한 번 더 물었다.

“저입니다, 세실리아.”

“…….”

화가 치밀었다. 저 차분한 목소리를, 내가 4일 동안 기다렸다니. 그렇게 절절하게 다른 사람 붙잡으면서 털어놓을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었다니. 억울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를 문전박대했다. 나는 이 사람한테 그러니까, 화 낼 이유가 아주 많았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이 문 뒤에 있었다. 금방 씻고 왔는지 머리는 조금 젖어 있었고, 몸에서는 좋은 향료 향이 진하게 났다. 목욕하고 온 모양이었다.

오호, 그래서 여자 만나고 바로 이쪽을 정리하러 오셨다 이건가. 나쁜 새끼.

“왜 그동안 편지도 안 하셨나요?”

“세실리아.”

“집에 못 들어가게 한 건 여자 때문이죠?”

“세실리아.”

“짜증나요, 당신. 그러고선 아주…….”

나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바로 내 두 팔을 잡고, 거칠게 키스해왔기 때문이었다. 분한데, 분해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가슴이 뛰었다. 좋았다. 이 사람이 정말 미칠 듯이 좋았다. 내 감정을 인정하니까 더, 더, 더 미칠 듯이. 이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화를 낼 수 없었다. 순간, 그러게 여자 만날 거라면 들키지만 마세요. 이런 미친 생각도 들었다.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 사람만 봐도 가슴이 뛰고, 생각이 정지하고, 화났던 마음도 아무 이유 없이 태양 아래 눈처럼 녹아내린다.

이 사람에 대한 감정을 밀어내고, 밀어내고 밀어냈던 이유들. 이 사람이 나를 떠날 것 같아서. 나는 레이디 화이트가 될 자격이 없는것 같아서. 그리고 또, 내가 이 사람을 정말 미칠 듯이, 집착할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만 키스 한번에 생각이 흐릿해진다.

이 사람의 살덩어리가 내 혀를 헤집으면 살아나는 생경한 감각이 있다. 말 못할 짜릿하면서도 얼얼한 감각. 내 감정을 모두 마비시키고 쾌락으로 멍해져버릴만큼 특별한 그런. 서로 숨을 나눈다. 그리고 얼얼한 입천장을 그가 제 혀로 꾹 누른다. 그리고 부드럽게 쓴다. 혀가 얽힌다.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내가 그를 힘줘 밀어냈다.

그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멍청하게 웃는다. 또 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빨리 말해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거 말고요.”

“사랑합니다, 나의 세실리.”

“아니, 헤어지잔 말 하자고 온 거 아니었어요?”

그때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그의 체향이 어렴풋이 코를 간질인다. 그의 큰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움켜쥔다.

좋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좋다. 이 사람이 내 옆에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그의 등에 꽉, 아주 자국이 날 정도로 꽉 내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말없이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책 속의 악역들 말이다. 처음에는 생각하길 저 언니는 왜 저럴까. 세상에는 멋진 남자들이 많고 저 언니쯤이라면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남주인공한테 집착해서 굳이 불행을 자처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까, 이 사람 아니면 정말 안 될 것만 같은 게…….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처음에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그저 감흥 없게 바라봤던 얼굴이었는데, 천천히 뜯어보니 정말 잘생겼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니었다. 그러니까 애가 탔다. 이 사람이 나를 떠나면 이 세상은 빛을 잃을 것이다. 이 사람이 다른 여자를 본다면, 다른 여자한테 웃어준다면.

그건 싫었다. 정말, 싫었다.

“제가 왜 세실리에게 헤어지자고 하겠습니까.”

“그야……. 제롬은 저한테 4일 동안 편지도 안했고, 방금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잖아요. 여자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사냥…아, 그러니까 일이 있었습니다. 일 끝나자마자 바로 찾아왔습니다.”

여자만 아니면 되었다. 그거 말고는 상관없었다.

“여자 아닌거죠?”

“당연히 아닙니다.”

“진짜요?”

“제 가문과 저택과, 부를 걸고 아닙니다.”

“좋아요.”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층계를 올랐다. 그를 잡아 방 문 안으로 들이고 문을 잠갔다. 철크덕, 소리가 문득 야살스러웠다.

그는 새 놀이터에 온 짐승처럼 두리번거리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내 방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그의 크라바트 끈을 풀어 잡아당겼다.

“세, 세실리아.”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다음에는 그의 조끼 단추를 말없이 풀었다.

“팔 치워요.”

아까 샬롯이 했던 것처럼 교태어린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팔을 내리자 내가 그를 껴안듯이 해 조끼를 뒤로 툭 떨어트렸다. 그때 그가 나를 안아들었다.

“뭐예요!”

내가 발버둥치자, 그가 말없이 나를 침대로 데려갔다. 그가 나를 내려주었고,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드레스 끈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유난히 달콤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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