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50화 (50/108)
  • <-- 사랑한다는 것은 -->

    그 다음, 무신경하게 의자에 기대어 누워있는 샬롯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빛나는 벽안 그리고 흘러내리는 금빛 고수머리. 고생을 몰랐을 것만 같은 뽀얀 손가락과 미의 여신이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될만한 굴곡과 아름다운 실루엣.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샬롯.”

    “알아.”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어머니가 그러시길 어떤 빌어먹을 노파가 와서, 솔레반 후작가에 천하에 둘 없을 미색이 태어날 거라고 그랬다더라고. 어머니는 당연히 믿지 않으셨지. 솔레반 후작가는 학자 가문이니까. 여자아이가 족보에 드물었어. 아들 잘 낳기로 유명했지.”

    그녀는 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거야. 우리 집안 막내로. 짜증났어, 그 관심이나. 사람들의 시선이나. 배부른 소리라고들 그러지, 그런데 우리 집안보다 센 사람들이, 그것도 그 중에서 내 마음에 차지 않는 자들이 마음을 강요해 온다고 생각해봐. 이것도 꽤 짜증나.”

    “힘들었겠네요.”

    “당연하지 않겠니? 나는 사람이지 조각상이 아니야. 사람들이 멋대로 찬미하고, 탐하고, 논하는 게 싫었어. 그럼에도 그들을 원망할 수 없어. 나도 예쁜 건 좋아하니까.”

    그녀가 나를 보며 눈을 휘어보였다.

    “그쪽은 어때?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봐. 날 즐겁게 해 줘.”

    “저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떤 얘기를 해 드릴까요, 왕세자비 전하.”

    “네 남편 될 사람. 그 사람 내 첫사랑이었어.”

    눈이 마주치자 샬롯이 미소지어보였다.

    “물론, 지금은 그 얘길 하면 알렉산더가 그 다음날에 날 걷지도 못하게 하겠지만.”

    그녀는 제가 말하고서도 우스운지 작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제롬 공작이 소공자 때의 일이야. 네 아버지의 이름은 전쟁영웅의 꼬리표 아래 역사책에도 실려 있겠지만 진짜 전쟁영웅은 제롬 화이트 공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 사람이 승전하고 돌아와, 화이트 공작이 되는 날에 나는 그 자리에 있었어.”

    그녀의 흐리멍텅한 눈이 처음으로 꿈에 젖어 반짝였다.

    “……아, 사람들이 다들 화마의 자식이라고 그 사람을 두려워했어. 악마다. 뭐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정말 수어번 경고를 주셨어. 절대로 제 옆을 떠나지 말라고, 또 그 사람을 쳐다보면 안 된다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셨지. 맨 눈으로는 바라봐서는 안 되는 태양과도 같다고 하셨어. 하지만 그 작은 소녀가 얼마나 알았겠어? 나는 호기심에 발코니로 뛰어갔어. 그리고 몰래 그를 훔쳐봤지. 그리고 아.”

    그녀가 숨을 들이마쉬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색채가 여러 빛이 되어 맴돈다.

    “달빛 아래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는 첫눈에 반했어. 그 사람이 파멸이어도, 악마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지, 그 사람.”

    “샬롯은 왜, 그러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 거예요?”

    “정략결혼.”

    그녀가 제 손을 뒤집어 손등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반지가 제 자태를 뽐냈다.

    “그 사람을 사랑해도, 사랑할 수 없었어. 마음조차 들킬 수 없었지. 나는 알렉산더의 아내로 태어났고, 첫 달거리를 하자마자 왕가의 일원이 되었어.”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제 빛나는 반지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도, 첫 사랑의 추억은 조금이나마 남아서 그 사람 얘기를 할 때면 아직도 마음 언저리가 조금 따끔해. 그렇다고 내가 알렉산더를 아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가요…….”

    “그 사람 얘기 해줘. 탐내진 않아. 그냥 궁금해서.”

    그녀가 천장을 바라보며 돌아 누웠다.

    “연인한테는 어떻게 미소 짓는지, 어떻게 구는지, 사랑한다는 목소리는 얼마나 따스한지.”

    “…….”

    “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저를 보고 어쩔 때는 환하게 미소 짓고요, 그 사람. 그리고 항상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봐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땐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고…….”

    “에이, 나 마음 바뀌었어. 그냥 하지 마. 조금 질투나려고 하고 있어.”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탐은 안 내. 그 사람, 듣자 하니 정말 상당하게 당신을 아낀다더라고.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는데 말이야, 괜히 패악 부릴 생각도 없어.”

    다행이네요. 나는 말을 삼켰다.

    “샬롯.”

    “응?”

    “그 사람이…동화 속 얘기처럼 불의 언어를 다룬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아, 이 작은 아가씨한테 말해줘도 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냥 네 상상에 맡기자. 그러는 편이 좋잖아.”

    그녀가 눈을 휘며 미소지어보였다.

    “매일 왕궁에 갇혀 사는 건 재미없어. 하지만 원래 내가 내 집에 있었던 시절에도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이 없었지. 내 천성이 빈둥거리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야. 갑갑하긴 하지만 이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아. 게다가 남편이 잘생기고 잘 하니까 더 그래.”

    나는 작게 웃어보였다.

    “제가 자주 들러서 말벗이 되어 드릴게요.”

    “부디 그러렴. 너는 예쁘니까 보는 즐거움도 있어.”

    “감사합니다.”

    “뭐, 그런데 화이트 공작도 집착이 그이 못지않다고 하니 모르겠네. 내가 좋은 친구 하나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말이야.”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 벌써 4일째 편지가 없어요.”

    주제넘게 내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샬롯이 조금 친구처럼 느껴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흐음, 나한테는 절대 없을 일이라 나도 별 말은 못 해주겠네.”

    샬롯이 편지를 안 쓰는 쪽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내가 보기에도 힘들어 보였다.

    “그럼 당신, 직접 찾아가 보기라도 해 봤어? 직접 편지는 써 봤고?”

    “아뇨.”

    “그럼 지금 널 보내 줄게. 어차피 곧 그이가 올 거거든. 이런 문제는 초기에 진압을 해야지, 방치하는 건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빨리 가 봐, 그 사람한테.”

    “제가 그래도 될…….”

    샬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궁의 분위기가 공기부터 바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통 바깥이 어수선하고 시녀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방금…….”

    “신경 쓰지 마. 그냥 알렉스야.”

    그녀가 다소곳이 앉아 차를 마셨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샬롯.”

    왕세자라는 사람은 제복 위에 이 나라의 훈장이란 훈장은 모두 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왕가의 혈통답게 머리는 어두운 빛에, 눈은 짙은 갈색이다. 사냥광에다 상당한 애주가였다는 선왕을 빼다 박은 외모였다. 다급한 표정만 아니면 아이들의 환상일 만큼 늠름한 얼굴이다.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그렇죠?”

    알렉산더 왕세자는 내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한다는 듯 샬롯에게 가 그녀를 품에 꼭 넣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혼자 둔다면 그녀가 증발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오늘은 다급하시네요.”

    “샬롯, 나의 샬롯. 오늘 보고 싶어서 죽는 것 같았어.”

    “그래요. 이쪽은 내 친구 세실리아에요. 세실리아 로즈.”

    그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중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알렉산더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듯 눈을 굴렸다.

    “화이트 공작이 귀애하는 숙녀이죠.”

    “아아.”

    그가 그제서야 경계를 풀고 멋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대단한 신사입니다, 화이트 공작 말입니다.”

    감사한다고 해야 되려나. 아니. 그냥 이 답변이 더 적절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왕세자 전하.”

    “그러고 보니 이 레이디가 네가 말하던 그 화제라는 여자군.”

    “맞아요, 알렉스. 요즘 날 찾아오는 레이디마다 세실리 얘기만 해서 지루해요. 뭐, 그래도 다행인 건 공작께서 곧 결혼하실 수도 있다는 거겠죠. 그 사람, 평생 결혼 안 할 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 냉혈한이 여자에게 관심 있었던 것도 아니고.”

    냉혈한? 적어도 내가 아는 제롬은 냉혈한이 절대 아닌데.

    “이만 가 봐요, 세실리. 다음에 또 봐요. 당신 갈 곳이 있잖아.”

    “아, 네 샬롯. 그럼 다음에 볼게요.”

    “샬롯?”

    “오, 지루하게 굴지 마요 알렉스.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요.”

    “아.”

    그리고 알렉스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나도 편하게 알렉스라고 부르도록. 샬롯의 벗은 내 벗이지.”

    “아, 감사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문득 문 뒤로 샬롯의 교태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 알렉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는데요.’

    ‘그래. 침대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지.’

    나는 피식 웃어보이고는 대충 기억을 더듬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왕궁의 시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안경을 귀엽게 내려쓴 여자였다.

    “레이디, 세이지 궁의 수석시녀 엘리자벳입니다. 제가 정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 부탁할게.”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빨리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멀어졌다. 정문 앞에서 졸고 있었던 마부를 깨워,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바깥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화이트 공작가로 가야겠어.”

    “예, 레이디.”

    마차가 움직였다. 그리고 마음 속 한 구석이 두려움, 그리고 설렘으로 요동쳤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내가 먼저 그 사람 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창 밖 풍경이 느리게 변한다.

    차가운 공기가 마차 창문을 넘어서, 커튼을 쳤다. 입 밖으로 차가운 입김이 새어나왔다. 마부의 콧노래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피곤했다.

    “레이디.”

    눈을 뜬 것은 마부가 나를 깨워서였다. 그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화이트 공작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겨울바람이 차게 불었다. 화이트 공작저가 내 앞에 굳건히 서 있었다. 나는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 광활한 하늘과 공작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마부가 고개를 끄덕해보였다. 나는 조금 몽롱한 기분으로, 천천히 공작가로 걸어갔다. 그의 초대 없이 무작정 방문하는 것이어서 무작정 걱정이 앞선다.

    “멈춰라.”

    기사들이 창을 교차하고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게 누구냐.”

    “세실리아 로즈.”

    나는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입술이 추위로 덜덜 떨렸다.

    “공작 전하를 만나러 왔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우선 핍이 집사장을 모셔올 동안 이곳에 있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난 그 사람의 약혼녀에요.”

    “알고 있습니다, 레이디 화이트. 하지만 지금은 집사장의 지시에 따라 주셔야 하겠습니다.”

    “추워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절차에 따르는 것임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냥 집에 갈까 생각하다가 집사장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생각했다.

    “핍, 집사장을 모셔 오너라.”

    병사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자, 성 위 망루에 있던 소년이 재빨리 등을 돌려 멀어졌다. 집사장을 데리러 갔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주말 잘 보내시고 계시죠?

    주말이니까 정각에 다시 한번 만나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