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것은 -->
율리아의 마차는 나를 로즈블룸에 내려주고 멀어졌다. 나는 집에 돌아와, 샬롯 왕세자비의 초대장을 화장거울 앞에 두고는 다시 한 번 정성스레 치장을 했다.
“왕궁으로 부탁해요.”
“예, 아가씨.”
그 뒤에는 내 마차를 타고선 왕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마차에 가만 앉아있기를 한참.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밖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나는 그렇게 창가에 손을 올려두고 창밖 풍경이 변하는 것을 천천히 관조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옴과 동시에, 가슴이 두근댔다.
매번 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었다. 왕궁으로 가는 길. 내색은 안 했지만, 왕궁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은 처음이라 설렜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혹시 어릴 적, 공주와 왕자, 드레스. 연회, 그리고 그들이 사는 멋진 왕궁에 대한 환상을 가져 본 적 있는지.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열둘까지는 그 환상 속에서 살았다.
내 나이 열 살, 밤을 따스하게 비추는 노란 보름달에 빌었다.
내가 동화 속 공주님처럼 충분히 나이를 먹게 되면, 멋진 왕자님이 내게 와 그의 멋진 성으로 데려가게끔 해 달라고. 그 때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누더기였지만, 내 상상 속에서는 나는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모든 레이디들이 부러워 할 그 드레스 말이다.
동생이 잠들고,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문턱을 넘으면 나는 카밀리아가 가지고 논 장난감과 읽고 던져놓은 책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단정히 모아놓은 인형들 앞에서 기워 붙인 치마폭을 곱게 잡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킴벌리, 레이디 록산느, 레이디 캐서린.’
그리고서는 카밀리아의 장난감 티 세트를 들고는 내 상상 속의 차를 마셨다. 일부러 맛을 음미하는 듯 향기까지 맡아가며. 인형들이 나를 보고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 정말 날씨가 좋죠, 레이디 록산느.’
‘정말 그렇다고요? 아아, 그렇죠. 사냥 구경 나가기 정말 좋은 날씨에요.’
그랬는데, 이렇게 왕궁에 손님으로 방문할 수 있다니 정말 가슴 벅차는 일이었다. 어릴 적의 로망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설렜을 때 손마저 떨리는 그 마음의 울림이란.
나는 드레스자락을 단정히 하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아아, 예법은 어떻게 하지. 원래 하던 대로만 하면 되나? 말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드레스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려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궁에 가까워진다. 사람들이 보인다. 열심히 소리 높여 과일을 파는 사람과, 주렁주렁 고기를 매달아놓고 힘 있게 칼질하는 푸줏간 주인과,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 해가 율러를 느긋하게 품으며 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멀리서 왕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멋진 왕궁. 나는 탄식하며 아름다운 노을과 그 아래 그림처럼 녹아든 궁을 바라보았다.
‘책에서 봤던 거랑 똑같아.’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눈을 끔벅였다. 그대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노래 삼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게 누구냐.”
“이쪽은 로징턴의 레이디,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시다. 샬롯 베르디게츠 왕세자비 전하의 초대에 응해 왕궁에 들어가고자 하신다.”
“출입을 허가한다.”
쇠가 교차하는 소리와 함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라!”
“예이, 문을 엽니다!”
쇠가 철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거대한 문이었다. 이랴! 마부의 기합소리에 마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에 도착해서는 체통도 잊고 마차 창문 밖으로 머리를 쏙 내밀어 바깥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마부는 시종인의 안내를 받아 왕세자비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와아, 예쁘다.”
눈 앞에 펼쳐진 멋진 정원에 나는 숨을 헉 들이마쉬고는 바깥의 풍경을 보았다. 겨울 정원이었지만, 정원사가 신경을 썼는지 겨울에만 피는 흰 종류의 꽃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그리고 시녀들. 말로만 듣던 왕궁 시녀들이 단정한 복장으로 떼를 지어 걸어다녔다.
눈을 두어번 깜박이며 마음에라도 새길 듯 이 순간을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한참 왕궁 구경에 빠져 있는데,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레이디, 도착했습니다.”
애써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경관은 지금부터였다. 와아, 나는 탄식하며 눈앞에 굳건하게 서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다웠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여신상과, 그 사이에 신전처럼 들어선 흰 기둥. 그리고 옆으로 쭉 펼쳐져 있는 화려한 벽면과 수많은 창문들. 위로는 뾰족한 원형의 지붕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하늘을 바라보니 마침 탁 트인 하늘과, 붉은 빛으로 타오르는 햇빛이 물들인 노란 빛무리에 나는 가만 눈을 찌푸렸다. 정말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곳의 주인이 되는 기분은 어떨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일인 것만 같았다. 공작가의 성도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지만, 이곳은 왕궁만의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정문으로 걸어들어갔다.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내 뒤로 들려왔다. 나는 창을 교차하고 굳건히 서 있는 기사들에게 샬롯 왕세자비가 준 초대장을 보였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거두고는 내게 경례를 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받았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가만 숨을 크게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천장, 천장이었다. 빛을 부수는 샹들리에와, 그를 감싸고 있는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타고 조각이 되어 내리는 극채색의 수많은 빛들. 가슴이 생동함에 눈을 반짝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꿈이 아니야…….’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찬란한 빛, 그 빛에 나는 순간 압도되어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너무나도 찬란한 빛에 눈을 찌푸리지 않고는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시선의 끝에는 황금빛 바닥과 화려한 대리석의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눈으로 오르자, 그 끝이 두갈래로 갈라진다. 고풍스러운 층계 손잡이를 타고 시선을 올리면 그 끝, 난간 뒤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난간을 사이에 끼고 있는 것은 화려한 그림들이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율러의 명작들.
그때,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난간 옆 벽면 속에서 나고 있었다. 숨이 멎은 것만 같이 그 곳을 보고 있자니 한 여자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차차 층계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들에 둘러싸인, 흰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왕세자비였다.
그녀가 난간 쪽에 가까워지자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난간 위에 제 팔을 굽혀 기대고는 제 다른 손 위에 턱을 올렸다. 자칫 오만하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따분하다고 할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금 벌어진 입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웠고, 내리깐 눈은 고혹적이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팜므 파탈. 딱 왕세자비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녀가 가까워졌다. 그녀의 풀린 눈이 나를 천천히 탐색하듯 훑었다. 나는 가만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한참이 지난 뒤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왕세자비 전하. 저는 세, 세실리아 로즈, 로즈 자작가의 첫째로…….”
“그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요즘 유명하다지?”
오만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순간 턱에서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부채로 내 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부채 너머로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부채 끝에 따라 내 턱이 이리 저리 돌아갔다. 나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아, 정말 미색이네. 공작이 탐낼 법도 해.”
부채가 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런데 요부는 아니야. 소문이 그건 틀렸어.”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난 거짓말 안 해. 재미없거든. 게다가 이 위치쯤 되면 할 필요도 없어. 너도 곧 나처럼 따분한 삶을 살게 되겠지. 따라와. 너네들은 말고.”
시녀들이 물러가고,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의 곱슬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보는 사람이 사라지자, 나는 두리번거리며 왕궁의 복도를 구경했다.
아아,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워라.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뻗어있는 샹들리에, 그리고 벽면에 걸려있는 크고 웅장한 그림과 예쁜 천장의 무늬들. 창 밖에는 그 아름답던 왕궁이 한 눈에 보였다. 내 구두 아래엔 폭신폭신한 카펫이었는데, 자줏빛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견고한 목재 기둥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마냥 탐스러웠다.
“두리번거리는구나.”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저…….”
“샬롯.”
그녀가 몇 걸음 뒤에 말했다.
“난 전하 이런 거 재미없어. 지루해.”
“제가 가, 감히 그래도…….”
“두 번 말하게 하면 내쫓을 거야. 그리고 너 두리번거리는 거 다 창문으로 보여.”
나는 몸을 움찔 떨며 옆에 나 있는 아름다운 창을 바라보았다. 바깥에 땅거미가 슬슬 깔리자 멍청하게 창을 바라보는 나와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왕세자비가 비추었다.
“세실리아라 했지?”
“네.”
“바깥 얘기 좀 해 줘. 그리고 네 남자 얘기도.”
“아…….”
“내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
“아, 아뇨. 죄송하지만 제가 소문에는 관심이 없어서.”
“좋아. 더 마음에 드네. 유리 속의 장미꽃.”
“네?”
“사람들이 내 뒤에서 그렇게 쑥덕인다고. 왕세자의 집착 때문에 말이지, 나는 결혼하고도 이 왕궁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어. 정말 재미없게도 말이야.”
그녀가 화려한 문의 두 손잡이를 잡아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찬란한 빛과 함께 아름답고 넓은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고요한 방 속 풍경과, 흘러들어오는 잔잔한 빛에 나는 또 다시 숨이 멎는 것 같은 감흥 속에 사로잡혔다.
“차 가져와.”
“예, 전하.”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샬롯은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누운 뒤, 턱짓으로 그 반대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 앞에 조심스레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티 파티라고 전해 들었겠지.”
“네, 샬롯.”
“뭐, 아니야. 그냥 너랑 나랑, 차 마시면서 시간 보내는 거지. 내가 설마 너 데려다 놓고 재미없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호호호 거리는 거 시킨다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 집어치워.”
“아, 감사…….”
“자주 와. 넌 재미있는 사람 같으니까.”
“그럴게요.”
“그럴 수 있으려나. 네 남편 되실 분도 듣자 하니 집착이 보통이 아니라서.”
제 생각에는 별로 그렇지 않는데요, 생각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비의 말에 딴지를 건다고 생각될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