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것은 -->
“괜찮으십니까.”
오스카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도울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모른 척 해 주세요.”
모른 척 하기. 그게 내 최선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그저. 오스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 내가 말한 대로 할 것이다.
“이만 잘 가세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스카가 시종인에게 눈짓하자, 구석에서 후드를 입은 사내가 걸어나와 가까워졌다. 사내의 목에 달린 슐츠 인장이 서늘하게 반짝였고, 후드 자락은 바닥을 조금 쓸 정도였다.
오스카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굴려 비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리본 구멍에 손을 넣어 꼭꼭 잡아당겨 풀어지지 않게 했다.
그가 문을 열자, 다시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가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알싸한 비오는 냄새가 났다. 그는 내게 눈을 맞추며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나는 그의 마차가 정문 밖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쓸쓸히 문을 닫았다. 저택에는 나 홀로 외로웠다.
혼자 식사를 하고, 계단을 올라가 다시 침대 속에 파묻혔다. 이럴 때 한번 찾아와 주면 좋으련만, 제롬은 소식 한번 없었다. 한숨을 쉬었다.
카밀리아는 잘 있으려나. 생각이 많아졌다.
***
그 날로부터 4일이 지났다.
비는 오스카가 떠난 뒤로 곧 멈추었지만-소나기였던 모양이다-나는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 아, 이 습기. 바깥 날씨는 그야말로 흐림이었다. 먹구름이 걷히지를 않았고, 창 밖 구름은 정말 느릿느릿 움직였다.
올 사람도 없고, 떠날 사람도 없는 로즈블룸. 정말 고요했다. 나는 창가 앞에 앉아 그저 창밖만 바라보았다. 창문 앞 대리석 바닥에 팔 한 쪽 올려두고, 그 위에 턱을 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드레스 끈이 어깨를 타고 내려와 팔에 걸쳤다.
오스카는 편지라도 써 보라고 했고, 나는 물론 그의 말대로 했다. 다만 공작에게 쓴 것은 아니었고 잭에게 쓴 것이었다. 별 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다시는 찾아오는 일 없으면 좋겠다고. 매정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게 그에게 베풀 수 있는 내 친절이자, 최선이었다.
안부 인사도 없이,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다시는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편지. 약 꼭 챙겨먹으라는 말도 안 했다.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겠지. 마음이 아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와.”
문을 연 사람은 하녀장 페넬로페였다. 편지일까?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손을 훑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레이디 아그니스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응접실에 계십니다.”
“아, 응. 지금 간다고 전해줘.”
나는 드레스 끈을 잡아 올리고서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그 뒤에는 아그니스가 있었다. 홀로 보냈던 4일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했던지, 나는 재빨리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그니스!”
“시시!”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웬일이야?”
“아, 마침 내 제복을 찾으러 슐츠 의상점에 들렀는데, 율리아가 마침 네게 보여줄 게 있다면서 너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어. 내 생각에는 카밀리아의 드레스인 것 같아, 시시.”
“정말? 이렇게나 빨리?”
“그린힐 가문에서 결혼식을 빨리 하려고 아주 난리가 났나봐. 결혼식 준비로 아주 바쁘다더니만 벌써 이렇게 드레스까지 다 세팅 완료 해놓고, 곧 청첩장을 보낼 거래.”
“세상에. 페넬로페, 빨리 마차를 준비해 줘.”
그러자 아그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때 마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레이디, 그리고 레이디.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아그니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씨익 웃어보였다.
“율리아가 슐츠 후작가의 마차까지 빌려줬거든. 가자.”
“자, 잠깐만. 나 준비 좀 하고.”
“그래. 기다릴게.”
“금방 올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내 방에 돌아가 대충 화장을 하고, 괜찮은 드레스를 빼입었다. 카밀리아의 웨딩 드레스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찮은 마차네.”
나는 시원하게 말했다. 그리고 후작가의 제복을 입고 있는 마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중하게 나와 아그니스에게 손을 권했고, 우리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안전히 탈 수 있었다.
“율러 의상점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탁해.”
그리고 마차가 출발했다. 아그니스는 그 뒤로 줄곧 창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랬다.
아그니스의 시선이 느껴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그니스는 맑은 눈을 휘어보였다.
“세실, 어렸을 땐 내가 네 화장도 해 주고 그랬었는데. 우리는 그럼 내 옷장에서 좋은 옷도 고르고, 네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기도 했고, 빗질하기도 했고. 정말 즐거웠었는데.”
“맞아. 카밀리아도 거기 있었지. 우리 정말 재밌게 놀았었잖아.”
“그랬지. 우리 셋은 이야기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에 빠져들기도 했어. 행복한 토끼 이야기 기억나? 우리 그 동화책 진짜 좋아했었는데.”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지. 나 아직 그 노래도 기억해. 오, 멋진 토끼 아저씨 수트를 빼입고 회중시계를 든 채…….”
눈이 마주쳐 우리는 한참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그니스였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리다니, 진짜 정말 모든 게 이렇게 다 빨리 지나가버릴 줄이야. 뭐. 그때도, 나는 네가 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글쎄, 그냥 얘는 아무래도 이 바닥에서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사람의 직감?”
“…….”
“넌 언젠가 누군가가 꺾어갈 꽃 같았어. 아직 피지 않은, 수줍은 그런.”
문득 보이는 아그니스의 미소가 앳돼보였다.
“네가 행복해 보이니까 정말 다행이네. 카밀리아도. 정말 잘 된 일이야.”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래, 고마워 아그니스. 네가 축하해준다니 정말 누구보다도 더 기쁠 수 없을거야.”
나는 답례로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드레스다. 공작께서 준 거니?”
“아, 응. 예전에 입던 건 다 낡은 거라, 그냥 선물 받은 걸로…….”
“흐응, 잘 어울린다.”
“고마워.”
“까만색에다 노란색, 정말 예쁘다. 레이스도 정말 귀한 거 아냐?”
“아무거나 집은 거였는데. 고맙다.”
“뭘. 두 자매가 결혼하려는 거 보니까 행복하다. 진심이야.”
“고마워.”
나는 웃어보였다. 그녀는 다시 창가를 바라보았고, 정적 속에서 가까운 말발굽 소리 따박이는 소리만 낭낭했다.
딸랑.
부티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쾌한 종소리가 났다. 구석에서 머리가 쏙 나오더니 나와, 아그니스를 훑는다. 율리아였다. 붉은 안경 뒤에 있는 따스한 두 금빛 눈이 휘어진다.
“어머, 세상에 아그니스, 세실리아. 정말 반가워. 어제 마침 카밀리아가 드레스를 입어보고 갔어. 너희들이 그때 여기 없었어서 참 유감이야.”
그녀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두꺼운 핀으로 고정해두고 있었다. 그녀가 또각또각 흰 대리석 위를 걸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팔을 벌리자 그가 나를 반갑다는 듯 가볍게 끌어안았다. 율리아는 그 뒤로 아그니스에게도 포옹을 권했다.
“오, 그래. 아그니스. 다시 보게 되어서 정말 기뻐.”
“바로 부탁한 대로 세실리아를 데리고 왔지. 제복 고마워. 네가 만들어 준게 최고야.”
율리아는 작은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뒤돌아 걸어갔다.
“내가 보여줄 드레스는, 이번 해 내 역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그녀의 뒤를 좇았다. 율리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뒤돌았다.
“카밀의 웨딩드레스야. 어때?”
그녀가 마네킹을 덮고 있었던 베일을 확 끌어냈다. 그러자 우리의 눈 앞에, 카밀리아를 닮아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백색의 드레스가 드러났다. 나는 그대로 감정에 휩싸여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내가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고, 고대했던 카밀리아의 결혼.
카밀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그 보조개가 예쁘게 파인 미소를 지으며, 제가 가장 사랑하는 멋진 사람 옆에서 결혼식을 할 것이었다.
“이건, 이건 정말…….”
“나도 알아. 내가 만든 드레스는 율러 최고니까.”
그녀가 뿌듯하다는 듯 덧붙였다.
“게다가 내 선물이기도 해. 돈 안 받을거야.”
“세상에, 율리아.”
내가 그녀를 다시 한 번 꼭 껴안았다.
“고마워! 정말이야!”
율리아는 관대한 미소로 내 등을 두 번 격식있게 토닥여 주었다.
“뭘, 너는 내 친구이면서도 내 동생 오스카의 사랑의 은인이야.”
“사랑의 은인?”
“응. 내가 붙인 너의 멋있는 공적에 대한 칭호이지.”
우리는 그대로 까르륵대며 웃었다. 아그니스는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였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드레스에 감탄하며, 한동안 설렘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벗어나지 못했다.
“차 마시고 가.”
율리아가 손짓하자 앞치마를 입은 하녀들이 차를 내왔다. 율리아가 고르는 것들은 모두 다 왕국의 최상품이거나, 카사로의 귀한 수입품들이었는데 차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우와, 정말 향이 좋다.”
“그렇지? 오스카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레드 쇼어를 통해 들여온 거야. 카사로에서도 없어서 못 먹는다는 로스티 차야.”
로스티. 어디서나 정말 귀한 풀이었는데, 옆 제국 카사로에서만 잡초보다 더 흔하게 나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카사로에서는 오히려 푸대접을 받고 있는 작은 풀꽃이었는데, 농민들이 귀족들의 차 문화를 모방하며 이를 차 재료로 사용하며 점점 유명해졌다고들 한다.
한번 로스티의 향긋함과 부드러움을 맛보면 다른 차는 손을 대지도 못할 거라는 말이 돌고 돌아, 어느새 로스티는 상류층이 독점하여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입소문으로만 들었던 차였는데, 막상 마셔보게 되니 이것보다 더 큰 행운도 따로 없었다.
“정말 귀한 차인데, 여기에서 이렇게 마셔보게 될 줄 몰랐어. 율리아. 고마워.”
“내가 뭘, 나는 너네들이랑 이렇게 차 마시는 것만 해도 너무 좋아.”
율라아는 두 손을 쫙 펼쳐 겹친 뒤 그 위에 제 고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 그럼 요즘 화제의 레이디 세실리아님.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줘.”
“그래, 어서 해줘. 세실리아.”
아그니스가 재촉했다.
“우리 약혼했어. 그러니까 공작님과, 나.”
율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 손가락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세상에! 율러의 자애로운 신들이여, 정말이야?”
“응. 사실 아직은 약혼뿐이지만,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 정말 짓궂은 오스카도, 참. 나한테는 이런 얘기 한 마디도 안 해주고! 세상에, 그러면 빨리 드레스를 또 만들어야 하지 않니?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 중에서 손 볼만한 게 있을까.”
“아직 약혼뿐인데 뭘.”
“아냐. 축하해, 세실리아! 네가 역시 그 사람이랑 잘 될 줄 알았어. 그 소문의 약혼녀가 사실 너였던 거지? 우리한테 그냥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거지?”
“으, 응.”
나는 대답하며 팔을 괜히 쓸었다.
“비밀로 해서 미안.”
“미안하긴, 기집애. 진짜 걱정했잖아!”
율리아는 제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너무 기뻐!”
율리아는 그저 나의 행복을 빌어주며 계속 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스카가 공작에 대해 해 준 말이 기억나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응, 세실리아.”
“오스카가, 디어뮈르 전투에서 공작님의 스콰이어(종자)였다는 게 맞니?”
“아, 응! 그랬지. 그때 아버지께서 오스카가 워낙 똑똑한 놈이라 도움이 될 거라고 공작께 내 동생을 추천했어. 오스카는 믿을 만한 주군이라며 냉큼 따라나섰고 말이야. 그런데, 왜?”
“아니야. 그냥 오스카랑 했던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구나. 남자들이란. 여자들이랑 있을 때, 하는 게 전쟁얘기, 전투얘기, 제 공적 자랑하는 얘기……. 정말 오스카도 못 말린다니까. 세실, 지루하지는 않았니? 부디 얘기해줘.”
“아냐. 오스카와의 대화는 항상 즐거워. 똑똑한 신사라 그런지.”
“다행이야. 오스카가 널 지루하게 했다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팠을 거야.”
나는 그때 주머니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바라보았다.
“아, 율리아. 나 이만 약속이 있어서 나가볼게.”
“설마 샬롯 베르디게츠의 티 파티?”
“맞아. 다이애나가 달가워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그래. 뭐, 누가 감히 왕세자비의 말을 거스르겠냐마는. 잘 다녀와.”
“응. 고마워.”
나는 율리아의 콧노래 소리와 함께 부티크 밖으로 나섰다.
바깥에 위잉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바람이 몰아쳤다. 이제 곧 봄이 오는 때였다. 그리고 꽃을 시기하는 데엔, 늘 바람이 있다. 계절은 분명 봄에 가까워지는데 그걸 놓기 싫은 겨울이 마지막 발악으로 바람을 보낸다.
항상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로즈블룸으로 데려다 줘.”
아그니스는 마차 문 뒤에서 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잘 다녀와.”
“응, 고마워 아그니스.”
그녀가 웃어보였다.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가만 반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편지가 없는 걸까.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