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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47화 (47/108)

<-- 사랑한다는 것은 -->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뒤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오스카도 스스로 말해놓고도 웃긴지 입꼬리를 조금 끌어당겨 웃었다. 나는 책상에 놓인 마지막 쿠키를 집어먹었다.

“세상에, 정말 그랬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제 레이디의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여인의 향수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의도는 좋았잖아요. 다이애나에게 딱 어울리는 그녀만의 향수를 선물해주고 싶은 연인의 마음이라, 음음. 제가 보기에 10점 만점에 10점이네요.”

오스카가 ‘블리시스의 철혈의 후계자’ 라는 거리의 소문은 맞았다. 그는 정말로 매사 냉철하고, 고지식하고, 한번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도 사랑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다이애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총명하게 빛났다.

“다음부터는 그냥 다이애나한테 같이 향수를 고르러 가자고 말해요. 그러면 다이애나가 오스카에게 폭 안겼을 때 그런 오해를 하는 일은 또 없잖아요.”

“그래야겠습니다. 갑자기 제 옷에 대고 향기를 마시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누구에요?’ 묻는데 상황을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서 말이죠.”

나는 조금 웃고는 손을 굽혀 다 식은 찻잔의 티스푼을 빙빙 돌렸다.

“오스카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다이애나도 알고, 오스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잖아요. 오스카는 젠틀맨이니까, 절대로 숙녀를 울게 하지 않을 거예요. 맞죠?”

“그렇습니다. 레이디 다이애나께서 제 레이디가 되어 주신다고 한 순간부터, 제 빛이자 구원은 그녀뿐이었습니다. 항상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녀가 행복하도록,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그래요. 항상 좋은 일만 생기기를 빌게요.”

“뭐, 저야 행복하지만 레이디께서는 꽤 복잡한 상황에 놓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안 그래도 사교계 사람들한테 안 받던 관심 24시간, 7일 빠짐없이 받다 보니 피곤하네요. 역시 가십의 신, 율리아의 동생답게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제 누이가 집에서 여간 수다스럽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가 조금 쓰게 웃어보였다.

“외사랑은 힘듭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아무말 없이 비오는 창가를 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은 차는 그저 고소하고, 알싸하기만 했다.

비.

비가 왔다. 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내렸다. 어쩐지, 아까부터 이 눅눅한 공기에 창 밖에 비 냄새도 조금 섞여 나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쏴아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창문에는 비가 톡톡톡 부딪혀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가 나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저를 좋아하시는 거라면 저는 레이디 다이애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멍청이. 너 아니거든요.

“오스카 경, 그렇게 세상 무너질 것 같은 표정 안 하셔도 되거든요.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 수레마차로 꾹꾹 채워서 가져다줘도 안 가진다고. 당신 얘기 아니에요.”

“다행입니다.”

그가 깊은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깔며 차를 음미했다.

“제 최후가 화이트 공작 전하에 의한 멸문이라면 조금 비참할 것 같았습니다만.”

“됐네요. 오스카 경께서 잘난 건 맞지만, 제 취향은 아니에요.”

“그 취향이 공작 전하이길 간절하게 바래봅니다. 다른 젊은이들이 딱해서라도 말이죠.”

“제롬이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너무 쉽게 가정하시는데, 그 이는 그럴 사람도 아닌데다가…….”

내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렇게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고요. 그, 그니까 좋아해 주는 건 맞는데. 뭔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계속 그 사람이랑 있으면 불안해요. 어디 갈 까봐.”

그러자 오스카가 웃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난 진지하다고요!”

“레이디.”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뭘요?”

“됐습니다.”

그가 제 손을 거두었다.

“확실한 건, 두 분의 사랑이 절대 외사랑은 아니라는 겁니다만.”

“진짜 오스카는 항상 혼자만 다 알고 있다가 물어보면 결론만 뚝 하고 던져준다니까요. 진짜 나쁘다. 항상 혼자만 다 알고 있어.”

“세상에는 알고도 입 다물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됐어요.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가 아는 건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아무것도 보낸 적이 없다는 거죠. 잘 들어갔냐는 편지도, 아니면 작게나마 안부 인사라도. 그냥 편지 하나 쓰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요.”

“레이디께서는 그럼 그 쓰기 쉽다는 편지, 쓰셨습니까.”

내 얼굴이 당혹으로 붉어졌다.

“그러다 그 사람이 귀찮아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답장을 안 하면? 안 쓰던 편지 쓰는 게 얼마나 낯간지러운 일인데요. 그리고 항상 보내던 사람이 안 보내니까 이상한 거죠. 저는 항상 편지 한번 보내본 적이 없어서…….”

내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가 거 봐란 듯이 미소를 피식 지어보였다.

“그러다 그 사람이 안 좋아하면 어떡해요…….”

“그러면 이제 서로 갈 길 가자고 하십시오. 뭐 사랑에 별 거 있겠습니까마는.”

“오스카는 몰라요. 전, 그래도 그 사람 저얼대로 안 놓아주고 싶다고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요. 진짜, 진짜,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레이디를 무도회장에서 처음 봤을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레이디께서는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시련이 내려도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한 대 더 치라고 고개를 쳐드시는 분이셨죠. 레이디께서는 사람들 손가락 앞에서도 늘 자기 자신이셨습니다. 동생, 제가 아끼는 이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일념 아래 말입니다.”

내가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런데, 레이디는 왜 레이디 스스로를 위해서는 그렇게 당당하실 수 없습니까. 행복이 머지않은 곳에 있는데 말입니다.”

“잃는 게 두려우니까요.”

“그럼 지금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 좋은 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아끼시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러다 그 이가 떠나면요?”

“그럼 그 때 미련 없으실 겁니다.”

오스카가 온화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하셨을 때, 또 다른 멋진 사람이 오겠지요. 기회도 그렇고,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적당히’만을 고집하시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치열해보고, 후회 없이 밀어붙여보고, 사랑할 기회 말입니다.”

“…….”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맞죠. 하지만 우리가 타인을 선택하고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시간만큼은, 그래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고,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아끼고,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 결과가 어찌되었던 그 순간이 찬란했다는 것만으로 가치 있을 겁니다, 분명.”

나는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요한 찻잔의 수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떠나면 난 잃을 게 더 많은걸요. 그 사람보다 더.”

“잃을 것이 없는 단조로운 일들을 ‘모험’ 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위험한 일이 맞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그 모험들이 있어서 삶이 특별해지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적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를 믿으셔야겠지 않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머랭쿠키를 힘없이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아사삭, 아사삭. 혀속으로 달콤한 맛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무엇이 그리 걱정이십니까. 전하께서 정부로 맞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레이디 화이트가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

“그리고, 화이트 공작가라면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위자료는 어마어마하게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평생 멋진 연하 애인들을 휘하에 두고 멋있게 늙어가실수도 있을테지요. 아, 물론 농담이었습니다. 정말 그러리라는 게 아니라.”

내가 피식 웃었다.

“정말 말은 잘하시네요, 고마워요. 슐츠 경.”

그가 답례로 미소지어보였다.

“고마워요.”

내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비 오네.’

이제 그와 작별인사를 할 때였다. 우리는 웃으며 로즈블룸의 층계를 내려왔다. 요리사가 칼질하는 소리가 문득 들려 그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그는 물론 사양했다.

서로 인사치레였다. 나는 손님에게 식사도 권하지 않고 보내는 게 매정해 보일 까봐 한 말이었고, 그는 의도를 알아채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는 문 앞에 섰다. 내가 깔끔히 웃어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레이디 로즈.”

그가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문가에서 턱턱. 문고리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실내에는 비 내리는 소리만 낭낭했다.

‘비가 오는데, 이 날씨에 웬…….’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상에.

문 뒤에는 잭이 있었다. 잭 제커시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취기로 붉어진 얼굴로 손을 어색하게 흔들어 보인다. 비가 오는 오후였다. 그의 까만 머리, 흰 셔츠, 대충 몇개 풀어재낀 단추까지 모두 비에 젖어 빗소리마냥 처량했다. 나는 가만 숨을 멈췄다.

“세실리아…….”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어보인다.

“미안, 미안. 진짜 얼굴 딱 한번만 보고 가려고 했어.”

비가 내렸다. 쏴아아, 빗소리에 나는 넋을 놓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그가 뒤돌아 멀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며 비 사이를 뚫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늘에서 미친듯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을 치고 조각으로 부서진다. 나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감히 그를 동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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