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46화 (46/108)

<-- 사랑한다는 것은 -->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사실, 어제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무표정으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적이 어색할 때 쯤, 그가 말을 꺼냈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라고 알고 계십니까?”

“아, 물론 알고 있죠.”

“어떤 내용이더랍니까?”

“판도라라는 사람이 열지 말라고 했던 상자를 굳이 열어서 불행해지는 이야기였죠.”

“그러면 푸른 수염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주인공이 굳이 열지 말라고 했던 방 문 열어서 불행해지는 이야기였죠.”

“충분히 행복했던 두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덧없는 호기심.”

대답했더니, 그가 꽤나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네?”

“공작 전하에 대해서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가 차를 마셨다. 정말 귀족답게.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안 궁금해요. 항상 오스카 경은 그 사람 조심해라, 그런 말만 하고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를 않는데. 전 알고 싶어요. 오스카 경께선 알고 있잖아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꼭 아셔야 하겠습니까.”

“제발요. 그 사람한테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이 강렬했다. 마치 붉은 폭풍 같았다.

“율리아 누님의 벗이자, 레이디 다이애나의 가족 되실 분이니까.”

그가 힘주어 얘기했다.

“말씀 드리는 겁니다. 굳은 신뢰 아래에 말입니다.”

“그래요. 비밀은 꼭 지킬게요.”

그리고 또 정적이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기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5년 전. 제가 열 넷이고, 공작께서 열아홉이셨을 때 위대한 디어뮈르(Diamuirr) 전투가 있었습니다. 율러는 강력한 카사로 제국에 승리를 거의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알아요.”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 전투에서 돌아가셨어요.”

“아, 레이디 로즈께 애도를. 로즈 경께서는 아주 위대하고 영예로운…….”

“그만 하셔도 돼요. 우리 모두 다 내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그는 낮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레이디가 아시다시피, 기사 로즈 경께서는 국왕 전하를 보호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울 정도라면, 전세가 어떻게 기울었는지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 전쟁에서 선대 로드 화이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선대 로드 화이트라 함은 제롬의 아버지이다. 게다가 그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롬이 전쟁에서 제 아버지를 죽였다는 거리의 뜬소문을 꺼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제롬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제롬은 정말 그랬다.

“……그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다들 미친 소리나 하는 거겠죠. 어떻게 제롬 같은 선한 사람이 제 아버지를 죽였겠어요, 전쟁에서. 그 사람은 기회주의자나, 독재자도 아니에요. 게다가 제 아버지를 단지 공작위가 탐나서 죽일 사람도 아니었다고요.”

“당연히 맞습니다만.”

그는 따스함이 녹아든 이 공간 속에서, 시간이라도 멈춘 듯 느긋이 차를 마셨다. 그가 그의 깊은 백금빛 속눈썹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깔았다.

“저는 보았습니다. 제가 전쟁에서 공의 종자로 전하의 시중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 분께선…….”

오스카의 그린 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됐습니다.”

“부디 계속 말해 주세요.”

그는 망설이듯 한참동안 식어버린 제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사람들이 왜 그 사람을 ‘율러의 용’ 이라고 하시는 지 아십니까?”

“그…이가 율러를 수호하니까요.”

“단지 ‘수호’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 단어가.”

“그 사람이 불이라도 다루나요, 그러면?”

정적이 있었다. 허,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탄식했다.

“언어술사에 대한 것들은 다 전설이에요. 그냥 건국 설화에 각 가문들을 경외하게 하려고 끼워넣은 상징적인 비유라고요.”

“범부들이 대부분 하는 생각입니다.”

“…….”

“그리고 저도,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고 말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쯤은 확실합니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아니라 화염 그 자체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사람 손에서 불이라도 나오나요?”

“레이디.”

그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나쁘게 말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사과했다. 원래 이 이야기를 부탁한 건 나였다. 내가 충분히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그는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당혹스러우시다는 건 이해합니다. 확실히 일반 백성들이 알기에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저희들만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언어술사에 대한 것들이요.”

“말도 안 돼.”

“그는 불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 분께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온기와 화염, 그리고 파멸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언어술사들은 대게 무언가를 대가로 힘을 지배합니다. 레이디는 혹시 이를 알고 계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에 그런 말이 있었다. 언어술사들은 불, 물, 바람, 하늘, 마음, 시간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언어를 사용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대개 한 가문이 한 속성을 대표하는 게 일반적이며, 율러 왕국의 유일한 언어술사는 분명 화이트 가문의 후계들이었다.

불을 다루는 자들. 하지만 그 것은 마치 성서처럼, 그저 ‘선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 같은 전설로 내려오는 것으로, 실존한다고 보기 힘든 것이었다.

뭐, 어찌 됐던 이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마법은 단 하나의 결점이 있었다고 한다.

제물.

힘에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과 같이, 그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물은 ‘간절한 염원’,

바람은 ‘평정’,

시간은 ‘기억’,

그리고 불은…….

“아시다시피 불을 다루기 위해선 '생명' 이라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레이디. 그가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제물이 될수록 힘은 강력해집니다. 전쟁에서 패배를 예감하고는 선대 화이트 공작께선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

“산 채로 불태워지셨죠.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했습니다만, 그 때 당시의 소공자, 제롬 전하께서는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제 아버지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대로 꼿꼿이 서서.”

“거짓말.”

“아뇨. 그리고 화염이 있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일은 단지 손끝으로 화염을 뿜어내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레이디. 그 날, 카사로의 병력과 적진 전체가 불탔습니다. 카사로의 전력이 말입니다. 그때 전하께서는 막사 안, 총사령관의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그 분께선 그 순간 화염 그 자체셨습니다.”

“…….”

“팔걸이를 잡은 손의 힘줄은 터져나올 듯 두드러져 있었고, 공작께서는 숨도 쉬지 않는 것만 같아 보이셨습니다. 그분께선 그렇게 의자에 몸을 기대 미간만 찌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오스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 끝으로 제 미간을 연신 주물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하여튼 평범한 인생을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약혼을 무르시면 됩니다.”

“……그래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몰입해서 들었지만, 나는 사실 그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 동화로나 접하던 이야기가 사실 진짜라고 말하고 있는 사내가 눈 앞에 있다.

그리고 제롬이 화염의 주인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로징턴, 웨스트체셔, 율러, 오늘, 그리고 언어술사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전하께서 일상을 원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의 약점이 되지 마십시오, 레이디 로즈.”

“…….”

“그분만이 위협인 것이 아니라, 카사로에서도 당신을 주시할 겁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적이 있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를 느꼈다.

“뭐, 좋은 정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하러 이 먼 길을 오신 건 아닐 테니까. 이제 슬슬 용건을 꺼내놓으실까요?”

“…….”

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오스카는 쑥스러운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건 다이애나에 관한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디어뮈르 전쟁이 있고 화이트 공께서 작전을 세울 때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도움으로 공께서는 많은 성을 함락했고 다리들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이디. 전술을 짜고 이상을 탐구할 때 탁월하게 작동했던 머리가…이상하게 여인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무지합니다.”

“다이애나 이야기이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겸허히 내게 조언을 구했다. 조언이라. 나도 여자였지만, 그에게 여인의 마음에 대해 조언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자이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 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성향도 달라서.

그래도 나를 믿으며 초롱초롱 바라보는 오스카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있었다. 처음에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높은 귀족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나를 이미 조금은, 편안하게 여기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나름 그것에 쏠쏠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춤춰보고 싶었던 내 사심어린 작전이 이상한 쪽으로 전개돼, 본의 아니게 연애 베테랑으로 오해받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요. 최선을 다해보죠,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어술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두 사람의 연애가 순항을 맞기만을 진심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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