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는 것은 -->
분위기가 무르익고, 식사는 곧 끝났다. 나는 남은 디저트 몇을 건드리다 배가 불러 그만두었다. 다들 이제 각자 제 집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스카.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린힐 부인, 그린힐 씨.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요.”
카밀리아.
“감사합니다. 요리사와 페이스트리 쉐프의 솜씨가 훌륭하군요.”
제롬.
“이런 좋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차례를 마지막으로, 감사 릴레이가 끝났다. 그린힐 부부는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아닙니다, 대접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내가 많이 웃더군요. 앞으로 모쪼록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린힐 씨의 말을 뒤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카밀리아.”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대신 에드거가 대답했다.
“레이디 로즈, 괜찮으시다면 레이디 카밀리아께서 집에 돌아가는 대신, 블루 다이아몬드에 쭉 머무실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너는 어때, 카밀리아?”
카밀리아는 나와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정한 듯, 굳은 표정으로.
“저는……. 물론 제안은 감사하지만 앞으로 로즈블룸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오늘은 언니와 있고 싶어요, 에드거 경. 하, 하지만 내일은. 내일은 다시 와서…….”
에드거는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카밀리아를 보고 있었다.
“아,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에드거 경.”
카밀리아가 예쁘게 웃어보였다. 나는 뒤를 돌아 제롬에게 말했다.
“이만 잘 들어가세요, 제롬.”
그는 한참동안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끝내 그만두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다들 사람들을 떠나보내느라고 분주했다.
나는 사람들을 뒤돌아보고서는, 제롬의 옷깃을 여며주며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포옹도 잊지 않았다.
“사실, 제롬이 여기에 몇 시에 올지 에드거 경과, 다이애나랑 내기했어요. 다섯 시 반까지 오나, 여섯시까지 오나, 안 오나.”
“레이디는 어느 쪽이었습니까.”
“저는…….”
나는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다이애나가 오스카의 두 뺨을 잡고 그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제 것을 맞추었다. 오스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됐어요. 그냥 제가 졌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랬습니까. 그럼 제가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그가 멋지게 웃어보였지만, 나는 죄책감에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부러 들뜬 목소리로.
“아아, 제가 이겼으면 에드거의 성 세 채랑, 다이애나의 멋진 다이아몬드 콜렉션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
“그래도 제가 져서 기쁘네요. 와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뒤돌았다.
“세실리아.”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래요.”
나는 그리고 카밀리아에게 다가갔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가는 마차에서, 나와 카밀리아는 서로에게 기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으로도 수많은 감정들을 공유할 수 있다. 지금처럼.
“카밀리아, 집에 가면 짐 싸야지.”
“응.”
“그리고 로즈블룸한테 안녕 하고.”
“안녀어어엉”
“지금 말고.”
“잘 있어, 로징턴!”
카밀리아가 마차 밖 풍경에 손을 흔들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으쓱한다.
“언제 또 해보겠어. 에드거 앞에선 그럴 수 없잖아.”
“왜 못하는데.”
“별로 레이디답지 않아 보일까봐?”
“그래. 그러면 지금 실컷 해라.”
“잘 있어요, 로징턴!”
카밀리아가 또 다시 손을 흔든다. 어느새 밖은 온통 어둠이 깔려 밤이었다.
집에 도착한 뒤로, 나는 그린힐 가의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가만 주위를 바라보았다. 로징턴. 그리고 밤, 흔들의자.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가만 생각에 잠겼다.
“이젠 그러면 너와 나뿐이구나.”
낡은 저택을 벗 삼아 얘기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녀어어어엉, 로즈블룸!”
그때, 카밀리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가 층계를 올랐다.
우리 자매는 침대에 누워 서로 감정에 북받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각자의 방을 쓰지 않았고, 카밀리아는 항상 악몽을 꿨을 때처럼 내 방에 있었다.
“……보통 이런 날 밤에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니. 언니가 동생한테.”
“으음, 결혼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 위대한 첫 걸음이란다. 같은 말?”
“난 모르겠다. 그냥 행복하렴.”
카밀리아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언니도.”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도.”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배게 위에 펼쳐진 그녀의 금실같은 머리칼,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푸른 눈동자. 예쁜 미소와 착한 마음씨.
“에드거는 너 같은 사람을 레이디로 맞을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일 거야, 카밀리아.”
“고마워.”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만 어둠 속에서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주 놀러와.”
“어디로? 웨스트 체셔로?”
“어디든, 내가 있는 곳으로. 알았지?”
“으응.”
카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그래.”
밤이 깊었다.
그 다음날, 카밀리아는 떠났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나는 그저 쓸쓸하게 팔짱을 낀 채로 두 팔을 문질렀다. 그렇게 하는 일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아그니스였다. 루이지애나 고모의 딸이자, 내 친구. 그동안 바빠서 그랬는지, 이렇게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정말 무난한 오후였다.
“언젠간 보내야 할 줄 알았는데, 정말 막상 카밀리아가 가니까 쓸쓸해.”
“그거 그렇다잖아.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아그니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시들해보이니 걱정이 되었는지 손을 꼭 잡았다.
“축하해야지! 이제 너도 네 삶 찾아갈 때 됐잖아. 얼마나 고생했어, 카밀리아 혼자 키우느라고. 소녀가장, 말이 쉽지 나는 네가 존경스럽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자, 이제 카밀리아 보낸 기념으로 우리 같이 어디 축제라도 한번 가자. 듣자하니까 저기 제도 어딘가에서 축제가 있다고 하는데. 진짜 큰 축제래.”
“재밌겠네.”
“가자. 우리 둘이 오랜만에. 응?”
“그래, 나쁘지 않네.”
“꺄! 너무 좋아 세실리아!”
확실히 분위기를 환기할만한 즐거운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 때, 얼마 있지 않아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오스카.
“오스카 슐츠 백작이십니다.”
하녀장 페넬로페의 목소리였다.
그가 천천히 문 뒤에서 걸어나오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문 뒤에 있는 미청년 오스카의 아름다움은 사랑을 만난 뒤 더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냉정과 이성으로 점철되어있던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보였다면 당신은 믿을까.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작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어보였다.
물론 입꼬리가 휘어지는 각도가 워낙 미세해서 당신은 그가 웃었는지도 몰랐겠지만.
“제가 레이디들의 시간을 방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투는 여전히 사무적이고 딱딱하다. 딱, 오스카 슐츠의 방식대로다.
“정말 예상 밖이네요. 슐츠 백작님을 로즈블룸에서 뵐 줄은 몰랐거든요.”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게 웃어보였다.
“제가 로즈블룸으로 향할 줄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아그니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열렬하게 오스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그니스가 얼빠진-그녀로서는 매우 드물다-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그니스, 저 분은 오스카 슐츠 백작이셔. 레드 쇼어와, 블리시스의 후계자야. 오스카 슐츠 백작님, 이쪽은 제 친구 아그니스 카터입니다. 명예로운 기사예요.”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카터 경.”
카터 경. 아그니스는 레이디보다 기사로 불리는 걸 좋아했는데, 그가 아그니스의 스윗 스팟을 공략한 모양이었다. 아그니스의 얼굴에 무언의 호감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완벽한 첫인상이었던 모양이었다.
“카터 경, 실례가 아니라면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로즈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슐츠 백작님. 이만 실례하지요.”
처음 그가 내 응접실에 발을 들였을 때, 경계하던 아그니스의 표정이 조금 풀려 있었다. 아그니스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니까 생긋 웃으며 자리를 떴다.
“세실리아, 난 갈게. 약속 꼭 지키기다.”
“아, 그래. 고마워 아그니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자리를 잔뜩 잘 차려입은 오스카가 차지했다. 그는 그의 피붓빛을 닮아 새하얀 슐츠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그의 가문색인 붉은 빛 망토를 한 쪽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귀족이었다. 그의 아름답고 긴 백금발이 햇빛을 받아 얇은 금실처럼 빛났다.
“안녕하십니까.”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직접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어제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디어뮈르 전쟁과, 제롬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오스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율러에서 가장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오스카일 것이다. 그는 제롬의 종자로 그를 보좌했으니 제롬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내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정보가 필요했다.
물론 제롬이 내게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이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나름 도움이 되고 싶었고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제롬은 나에게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