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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44화 (44/108)

<-- 사랑한다는 것은 -->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나였다.

“아, 어서 들어오세요.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느라고.”

제롬을 들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기에, 아까 오스카와 다이애나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내 것을 끼워넣었다. 손이 맞물려 꽉 닫힌다. 그가 미소짓는다.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나는 맞잡은 손을 조금 당기며,

“가요! 식사가 한창인데.”

그는 천천히 따라온다. 그가 내 옆에 있다. 내 옆에.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벅차고, 가슴이 뛴다. 사랑한다는 게. 그런 게 있으면 이런 거 아닐까. 기쁘다. 좋다. 행복하다.

찬란한 빛무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대화소리. 따스함이 가까워진다. 그를 발견한 시종인이 목청을 큼큼 고르더니 봉을 두어번 내리쳤다.

“로드 화이트와, 레이디 로즈십니다.”

모두의 눈이 나와 그에게로 향했다. 다이애나와 문득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며 미소지어보였다. 탁자에 앉아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아, 부디 앉으십시오. 세실리아의 손님, 제롬 화이트입니다.”

“세상에, 공작 전하.”

다이애나의 어머니, 레이디 피오나 그린힐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걸음하시다니. 영광입니다.”

“공작 전하.”

로드 그린힐이었다.

“영광입니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제롬은 멋진 미소와 함께 악수에 응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이제는 가족 아니겠습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실리아의 벗은 제 벗이기도 합니다.”

“아아, 영광입니다.”

나는 마침 비어있던 두 자리를 발견하고 그 곳으로 향했다. 내가 의자에 앉으려 하자, 그가 나를 위해 의자를 빼 주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작게 미소지었다.

긴 식탁에는 만찬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카밀리아는 에드거 옆에서 어떤 때보다 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나비를 만나 화사하게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그녀의 미소는 예뻤다. 시간이 문득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천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하게 반짝였고,

단란한 저녁의 분위기가 따뜻하게 실내를 메우는 것만 같았다. 나는 탐스러운 케이크를 덜어 내 그릇 위에 놓았다. 고기보다는, 달콤한 디저트로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사르르 녹는 케이크의 식감이 이 분위기마치 달았다. 나는 그 맛에 심취해, 케이크 속에 씹히는 부드러운 젤리를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그때 입술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을 떠 보니 제롬이 생크림이 묻은 제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묻었습니다.”

그가 냅킨에 제 손가락을 닦아내고는 제 몫의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음, 고맙다고요.”

제롬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결혼은 언제입니까?”

“아마도 이번 달 내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에드거가 미소를 머금고 카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식을 거행했으면 합니다.”

“이번 주.”

“예?”

“식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다 내가 지원할 테니, 그럼 이번 주 안으로는 어떻습니까?”

“아…….”

에드거가 카밀리아를 힐끔 보았다. 카밀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신부가 그렇다고 말하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훌륭합니다.”

“고마워요.”

내가 제롬을 바라보았다. 그는 해맑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도울 수 있어서 오히려 영광입니다.”

“정말로, 고마워요.”

“제 레이디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습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오스카와 다이애나가 들어왔다.

아, 정말 둘이 같이 붙어 있으니까 빛이 나는 것 같네. 나는 가만 생각했다. 이때, 다이애나는 포크 끝의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고, 오스카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블리시스는 정말 성공한 항구도시이자, 위대한 요새가 맞지만 반대로 너무 삭막하다는 느낌이 큰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다는 프레임이 사람들의 유입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숙박업, 물류사업, 용병사업은 무리없이 순항을 맞고 있지만, 그 외 상권들이…….”

다이애나는 훌륭한 레이디 슐츠가 될 것이었다. 그때 상념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제롬이었다.

“아, 그냥 오스카…….”

그의 미소가 순간 옅어졌다. 그냥 내 착각이겠지?

“……와 다이애나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 동의합니다. 레이디 그린힐 같은 훌륭한 인사를, 블리시스의 안주인으로 맞이할 수 있어서 로드 슐츠는 정말 행운인 사내이겠군요.”

내가 그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며 정정했다.

“아, 물론. 제가 생각하는, 여기서 가장 운이 좋은 사내는 저입니다. 당신이 제 레이디라서, 행복하지 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웃었다.

“뭐예요, 아첨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고마워요, 제롬.”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 뒤에 그가 말했다.

“아첨이 아닙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왜, 자꾸 이렇게 좋은 모습만 보여 줘서. 기대하게 할까, 이 사람은. 왜. 어째서. 이 순간을 내가 포기 못하게 할까.

지금이라도 매정하게, 영원하지 않을 거라면 잘 해주지 말라고.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금이 너무 소중해서. 놓칠 수가 없어서.

“진심입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만을. 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나는.

“뭐, 여기 있는 분들 만큼은 행복한 것 같네요.”

당신이 와줘서.

“음, 뭐 그렇다구요.”

정말 기뻤다. 정말.

그는 한참동안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때, 오스카가 제롬을 바라보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전하. 디어뮈르 전쟁에서 제가 공작 전하의 종자로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제롬을 돌아보니 그의 표정이 짐짓 싸늘했다.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데, 오스카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온후했다.

“……기억합니다.”

나이프를 쥔 제롬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다이애나는 영문을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잘 지내셨는지요.”

“보다시피, 그랬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롬이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제롬의 뒤를 쫓았다. 그는 내가 아까 앉았던 정문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쟁 이야기가 좋지 않은 기억이었는지, 그는 제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힘없이 앉아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의 등을 가만 쓸었다. 그러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짐승처럼 경계어렸던 표정이, 눈이 마주치자 가만 풀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됐습니다.”

“…….”

그는 고개를 몇 번, 느리게 흔들고는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다시 식당으로 걸어갔다. 나는 가만 그를 바라보다가, 감정에 못 이기고 그에게 빨리 다가가 그를 뒤에서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는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의 넓찍한 등에 내 머리를 기댔다. 그 특유의 편안한 체향이 참 좋다. 내 사람.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그 자리에 한동안 서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나직히 말했다. 아마도 전쟁의 기억은 그에게 꽤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고는 다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놓지 않을 듯 꽉 잡은 그 손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고, 다시 우리는 원래 그랬던 대로 식사를 계속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를 힐끔거리며 아무런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끔 들어오는 질문에나 답하며, 부드러운 생 초콜릿만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달콤씁쓰름한 맛이 혀끝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힐끔 제롬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사람일까.

알려고 하면 안 되겠지. 궁금증을 꾹꾹 누르며 나는 시선을 초콜릿 쪽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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