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41화 (41/108)

<-- 새벽에서 아침까지 -->

심호흡, 다이애나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준비 됐어?”

“응.”

“가자.”

그리고 문이 열렸다. 시종인이 큰 목소리로 부러 말했다.

“레이디 그린힐, 그리고 레이디 로즈이십니다.”

나는 다이애나의 부모님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들이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카밀리아의 결혼에 대해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 아무런 생각이 머릿속에 없는 채로.

“반갑습니다, 레이디 로즈.”

다이애나의 부친이었다.

“정말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어서 앉으세요.”

방금은 다이애나의 모친.

나는 그들을 조심스레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그린힐의 노부부였다. 내 동생의 뜨거운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이라 해서, 사악하게 생겼을 것만 같다는 내 기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부디 앉으세요.”

나는 다이애나와 함께, 조심히 걸어가 그들의 앞에 앉았다. 시종인이 차를 내오는 순간까지, 나는 긴장감으로 떨고 있었다. 내 두 손이 차가웠다.

“저어…….”

“어머니.”

나와 다이애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이애나가 작게 웃어보였다. 그때 온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친구라는 건 이런 존재였다.

“네가 먼저 말해.”

다이애나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 따스한 미소에 나는 용기를 냈다.

“에드거 경과 카밀리아는 서로를 깊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동생의 가문과, 부가 그린힐 가에 감히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이해해주셔서 이 결혼을 찬성해 주신다면 더욱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적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제발…….”

“난 네 엄마만 좋다면 아무렴 상관없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레이디 그린힐, 그러니까 다이애나의 어머니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가만 차를 들이켰다.

“이러니까, 내가 꼭 악역이 된 것만 같군요.”

그녀는 그리고 웃었다. 귀족적인, 우아한 미소였다.

“소녀 시절, 꿈 많고 순정에 사로잡힌 소녀였을 땐 제가 이런 모진 시어머니 역할을 맡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녀의 미소가 문득 앳돼 보였다.

“주인공이 되어 책 속 이야기를 헤맸을 때나, 책을 덮고 창밖을 가만 바라봤을 때나. 저는 내일 무슨 일이 있을까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던 작은 아가씨였죠. 그 땐.”

다이애나의 아버지께서, 다이애나의 어머니의 손을 가만 쓰다듬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 숨을 죽인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내가 바라던 행복한 사랑의 황혼 같아서.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이 결혼이 단순히 부와, 명예와 관련이 없이 동등한 연장선에 놓이려면 그 정도 지참금은 필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심했었죠. 정말 미안하지만, 레이디의 동생분께서 돈을 노리고 우리 아들의 순정을 이용한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어요.”

“이해합니다.”

내가 말하자, 다이애나의 어머니께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고집불퉁 내 딸과, 에드거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다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죠. 그때, 재미있는 편지들을 받았습니다.”

“어떤…편지를 말씀하시는 건지.”

“공작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예. 제롬 화이트 공작께서 말입니다. 그 분께서 필요한 돈은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다고 하시덥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그대로 멍하니 레이디 그린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을 잘 아신다고 하시더군요.”

“저를요?”

“예. 아주 올곧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수십 번 돌려 말해서, 제 동생을 속물로 키워낼 인사는 절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보증하시겠다면서. 그 결혼을 허락해 주실 것을 부탁하더랍니다.”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제 아들과 딸이 그렇다고 말하면, 게다가 공작께서 보증하신다면 저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지요. 두 사람의 사랑이 순수한 진짜라는 걸. 책 속에서만 보던 사랑을 이렇게 현실로 마주하게 되니까, 얼떨떨하고 반대로, 낭만적이기도 하네요. 그린힐의 레이디로서, 결혼을 허락하겠습니다.”

레이디 그린힐이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아니, 당신…….”

“어머니!”

다이애나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함지막했다.

“세상에, 세실리아!”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눈만 그대로 깜박이며 미소지었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때였다.

시간이 지나고 정적을 깬 것은 레이디 그린힐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인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아……. 그건 카밀리아와 에드거 경께서 직접…….”

“아뇨, 약혼하셨다 들었어요. 정말 잘 된 일이에요.”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 고, 공작전하 말씀이시다면 그건…….”

“어머니. 이 사람들 어제 약혼했어요.”

“하지만 항상 예쁜 잉꼬부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겉 늘 즐겁잖니.”

다이애나의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축하해요, 레이디 로즈. 그 사람, 당신을 매우 사랑하는 것 같더군요. 분명 멋진 한 쌍이 될 거예요. 공작 전하와 세실리아 당신."

“아, 감사합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카밀이 드디어 결혼을 한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린힐 경이십니다.”

그때, 시종인의 말과 함께 에드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드거는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않았는지, 다리를 절뚝거렸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었고 팔은 그대로 붕대를 한 모습이었다.

“어머니, 말씀드렸지만 카밀리아 로즈 양은 그럴 사람이…….”

“이미 늦었다, 에드거. 네 어머니께서 허락하셨다.”

“예?”

“말 그대로다, 에드거.”

“어머니!”

그가 빠른 걸음으로 와서, 그의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나이를 먹고도, 넌 아직도 사랑 얘기만 나오면 소년 같구나.”

레이디 그린힐이 점잖게 이야기했다. 에드거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부러웠다. 가족이라는 게. 저렇게 행복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나는 그저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줄 따름이었다. 카밀리아는 저 가족의 일부가 되어, 나를 떠나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그러면 나는. 내 해피엔딩은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식사 하고 가, 세실리아.”

“아냐, 괜찮아. 다이앤. 나는 이만 가 볼게.”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로즈. 훌륭한 밤 아닙니까.”

에드거가 멋지게 웃어보였다. 나는 미소로 답례했다.

“카밀리아를 불러와도 괜찮다면요.”

나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레이디 그린힐께서 사려 깊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요. 성대한 만찬이 되겠군요.”

“다이애나, 그러고 보니 네 남편 될 사람도 온다고 하지 않았더냐.”

“오스카?”

내 말에 다이애나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네, 맞아요. 아버지.”

그러자 로드 그린힐께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상에, 정말 성대한 만찬이 되겠구나. 두 쌍의 커플이 한 지붕 아래 있다니. 정말 잘 된 일이야. 그렇고말고. 오늘 요리사들이 정말 바쁘겠구나.”

“그러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커플을 셋으로 늘리는 게 어때요?”

“뭐?”

“왜, 세실리아. 공작님께서 사랑스러운 약혼녀를 위해 식사 한번 하러 들릴 순 없는 거야?”

“그래도…그 이는 일도 있고, 그래서.”

내가 머뭇거리자 장난스러운 얼굴로 에드거가 다이애나를 툭 쳤다.

“사랑스러운 레이디를 위해, 공작께서 블루 다이아몬드에 여섯시가 되기 전에 도착한다에 람타토르에 있는 내 성 세 채를 걸겠어.”

“여섯시가 뭐예요, 오라버니. 저는 다섯시 삼십분 되기 전에 걸겠어요. 무려 그이에게 받은 블루 다이아몬드 세트를 걸죠.”

시계는 마침 네시 되기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깬 건 나였다.

“저는 오지 않는다에 걸겠어요.”

한동안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풉. 웃음을 터트린 건 다이애나였다. 다이애나와 에드거는 서로를 마주보고는 한참을 웃었다.

“진심이에요!”

“그래, 그러면.”

다이애나가 손깍지를 끼고서는 그 위에 제 턱을 올려놓고선 말했다.

“넌 뭘 걸 건데?”

“꼭 뭔가를 걸어야 돼?”

“내기는 공평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릴이 있죠.”

뭘 걸어야 좋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됐어요. 제 전 재산은 벽면 한 칸을 다 메운 로맨스 소설이랑 발렌타인 30년산 8병이 전부인데요, 뭐. 차라리 순무에서 피를 뽑아다 쓰세요.”

맥없이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다이애나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오, 세상에. 세실리아의 로맨스 소설 콜렉션이라니. 내가 그걸 가질게. 다 읽고 더 안 읽는 것만 몇 권 골라서 주면 돼, 세실리아.”

“저는 그럼 발렌타인 30년산 세 병으로 퉁 치겠습니다.”

역시 남매 아니랄까봐, 죽이 착착 맞았다.

“그래요. 그래도 내가 이기면, 다이애나의 다이아 콜렉션이랑, 성 세 채를 가져가는 셈이 되는 거네요. 그러면. 정말 훌륭한 내기인데요?”

“대신.”

다이애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편지 내용은 우리의 검열을 받아야 해. 반칙을 방지하기 위해서. 언제까지 오라는 말이나, 오지 말라는 말이 적혀있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훌륭한 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럼.”

그러자 다이애나가 뒤를 돌아보며 하녀를 불렀다.

“종이와, 인장. 깃펜과 잉크를 가져다 주렴.”

“예.”

그녀는 곧 돌아왔다. 내 앞에 놓인 좋은 종이를 보며, 나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이 올까. 과연. 주제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나. 내가 그 사람을 오라 가라 해도 될까.

나는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이애나가 카지노를 다니더니 나쁜 버릇만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드 그린힐.”

“어머니, 시작한 건 에드거였어요.”

“한 손으로 박수를 칠 순 없죠. 내기에 응한 건 다이애나였습니다.”

로드 그린힐은 그저 껄껄 웃어보였다.

“나이를 먹어도 싸우는 건 어릴 적과 똑같군그래. 보기 좋다.”

“로드 그린힐!”

나는 편지를 적어나가며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에 꽂고, 행복한 그들의 목소리를 가만 들었다.

누런 종이에, 까만 잉크가 묻어 스며든다. 펜이 천천히 움직이고, 사각 거리는 깃펜의 소리가 마냥 좋다. 평화. 그래, 지금은 그저 잊고 싶었다.

당신이 오지 않는 쪽에 걸었지만, 그랬지만. 그래도 나는 이번 내기에서 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은 이렇다. 이해받지 못해서 엇갈리면서도, 어떤 배신감에서도, 비관 속에서도 그냥. 바라게 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게 내 생각일까.

한숨을 쉰다. 독한 마음을 먹어도, 실망감을 품어도. 그의 따스함 아래 녹아내린다.

“다 썼어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이애나가 내 뒤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슥 들이민다.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 내 옆 시야를 가렸다.

“으음, 좋아. 검수 완료.”

그녀가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 안에 넣는다. 그리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밀랍에 불을 붙여 편지 봉투 위로 뚝뚝 떨어트렸다.

꾹, 그린힐 가의 인장이 밀랍을 짓누른다. 그때 환한 얼굴로 에드거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같이 보낼 겁니다. 레이디 카밀리아 로즈 귀하.”

“윽, 내가 살아서 오빠 연애편지를 다 보다니. 나 죽을 때 다 됐나봐.”

“아버지, 그린힐 가의 마차를 로즈블룸으로 보내면 안 될까요?”

“네 어머니한테 물어봐라.”

“마부에게 그 편지를 전하라고 하세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에드거가 환하게 웃었다. 레이디 그린힐께서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 웃으셨다.

“자, 이제 기다려 봅시다. 다섯시 삼십분이냐, 여섯시냐.”

다이애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 참, 에드거.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는 거지만, 제 베팅이 추가되었으니까 오빠가 이기는 조건은 공작께서 다섯시 삼십일분에서 여섯시까지 도착한다예요. 아시겠죠?”

“그래, 그려면.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나.”

나는 웃었다. 가만 똑딱이는 시계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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