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서 아침까지 -->
앤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따스한 햇빛이 창을 넘어서 복도를 따스하게 덥히고 있었다. 나는 어제 그와 함께 걸은 곳들을 가만 관조하며 천천히 정겨운 풍경들을 떠나보냈다. 저건 어제 봤던 갑옷, 저건 어제 봤던 그림, 저 분들은 웨스트체셔의 선대 가주들.
그렇게 큰 계단을 걸어내려가자 정문이 가까워졌다.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
집사장이 내게 깍듯이 인사해보였다. 나는 미소로 답례했다.
"좋은 오후네요. 수고하세요."
"레이디를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차는 아직인가요?"
"아닙니다."
그가 문을 열어보였다. 아침의 환한 빛이 문을 넘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의 평화로운 앞뜰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고, 신선한 오후의 공기가 내 폐부를 채웠다.
이때, 가만 밀려오는 햇빛이 너무 찬란해서 나는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페릴, 저 좋은 친구가 레이디를 안전하게 댁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마차 옆에 서있던 신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좋은 오후이지요.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의 마차를 많이 본 것도 아니었는데, 익숙했다. 내가 마차로 향하자 앤이 뒤따랐다. 그리고 내가 마차에 탄 뒤에도, 문 뒤에서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에도 꼭 레이디를 모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앤이 고저없는 목소리로 고했다. 나는 미소지어보였다. 그녀의 입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뒤로 하고, 마차가 움직였다. 나는 가만 한숨을 쉬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창문 밖 주위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풍경들이었다. 뻔한 율러의 어느 오후. 나는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가지 마....'
어제 잭의 상처받은 표정이 잊히지가 않았다. 미안해서. 맹세코 그를 사랑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나를 그렇게 위해주던 사람이었는데, 그와의 마지막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미안했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는데,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나는 믿으려 노력했다. 마차는 오전과 함께, 율러를 가로질러 텅 빈 길거리를 내달렸고 시간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레이디, 곧 도착입니다."
그의 준마와, 견고한 마차 덕분인지 나는 곧 로징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로즈블룸의 경치가 펼쳐진다. 나는 그 아늑함에 안도했다.
“수고하셨어요.”
“영광입니다, 레이디 화이트.”
그가 다시 모자를 쓴 뒤 마차를 몰아 멀어졌다. 레이디 화이트. 그 이름을 내가 잠시 곱씹는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나는 천천히 로즈블룸으로 걸어들어갔다. 아, 내가 사랑하는 내 저택.
소담한 계단과 붉은 색으로 만발한 아름다운 장미들. 문을 열면,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는 곳, 남쪽으로 뻗어있어 무엇보다 밝고 아담한 세상에 하나뿐인 그 저택.
깔끔한 닭의 목청소리와, 햇빛으로 아침이 시작되는 곳.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층계 옆 손잡이를 쓸어본다. 먼지가 앉았다. 문득 처음 이곳으로 이사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어린 카밀리아를 껴안고, 우리 그럼 여기서 잘 해보자.
카밀리아가 울면, 눈물을 닦아주며. 잘 했어 카밀리아. 그 애들이 어려서 그렇지, 네게 하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나쁜 애들, 언니가 혼내줄게. 언니가 지켜줄게.
카밀의 어깨를 토닥이던 나날들. 같이 눈물바람으로 잠들던 나날들. 그 시간들이 로징턴에 있었다. 결국 내가 남아있을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디 화이트라니.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행운이다.
예쁜 풀꽃 화관이 걸려있는, 이 소담한 문. 생각해보면 내가 원했던 건, 많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평화. 사랑. 기쁨. 빛.
그래, 그런 것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문고리를 턱, 턱 내렸다.
“누구십니까.”
“페넬로페, 나야. 세실리아.”
“아, 주인님을 뵙습니다.”
문이 열렸다. 노파가 내 겉옷을 받는다.
“언니?”
카밀리아가 층계에서 머리를 쏙 내민다.
“언니이!”
계단을 내달려 내게 다가온다.
“카, 카밀. 천천히! 다쳐!”
“언니!”
카밀이 폭 안긴다. 나는 이 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예쁜 금발머리, 나를 바라보는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나는 카밀, 이 아이를 정말 많이 아끼고 있었다.
“보고싶었어!”
예쁘다. 곱다. 내가 지켜야 할.
“어떻게 된 거야, 응? 응?”
나는 내 반지를 보여준다. 카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함지막해진다.
“세에상에!”
제 일인 것마냥 행복해한다. 에드거 때문에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으면서도.
“너무 축하해, 언니! 그래서 누구야? 누가 행운의 신사분인거야?”
“카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집 문 앞에 매달아놓은 흔들그네를 탔다. 로징턴의 아침을 만끽하며.
그때, 우리 집 층계로 편지를 든 시종인이 걸어오는 것을 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새겨진 저 문양이라면, 다이애나의 가문. 그린힐 가문의 것이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한쪽 팔을 굽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시죠?”
“다이애나 영애께서 레이디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마당에 놓인 다이애나의 화려한 푸른 마차가 보였다. 그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읽어보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그래서 난 네가 지금 블루 다이아몬드로 혼자 와줬으면 좋겠어. 카밀리아와 에드거의 결혼에 관해서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어제 무도회에서 공작 전하의 옆에 있는 너를 봤어. 그래. 그리고 네가 알 수도 있었겠지. 그 무도회에 너를 데리고 간건, 사실 내 욕심이었다는 걸 말이야.
네가 공작 전하의 옆에서 행복했으면 했어. 그리고, 사실. 둘의 사랑 싸움에 끼어서 잭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고. 미안해. 화났겠지. 차근차근 설명할게.
그런데, 난 지금 네가 진짜 필요해. 할 이야기가 많아. 결혼도 그렇고, 결혼 외에도 그렇고. 제발 너를 블루 다이아몬드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다이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부의 뒤를 따랐다. 블루 다이아몬드에 도착하니, 초조하게 마당을 서성거리는 다이애나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기실 그녀가 제롬의 계략의 일부였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솟는 걸 느꼈다. 그냥, 그랬다.
“다이애나!”
나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내 손에 끼워진 반지와 함께.
“미, 미안해…….”
고결하게 태어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애였다. 그런데도,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난, 네가 안 올 줄 알고……. 우정이 영원히 끝난 줄 알았어.”
“아냐. 괜찮아. 정말로.”
“정말, 진짜. 미안해. 잭이 다칠까봐 두려웠어. 두 사람의 사랑싸움에 어설프게 끼어서 공작께서 질투로 잭을 무너트릴 게 너무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그랬어.”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진짜야. 내 이기심으로 그 무도회에 널 데려간 건 아니었어. 사실, 나 잭 포기하기로 했어. 나도, 이제 행복해지려고. 날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나 어젯밤에 오스카랑 결혼하기로 했어. 어쩌면 곧 있으면 블루 다이아몬드를 떠나 그의 블리시스로 이사할 지도 몰라.”
“그거 잘 됐네!”
나는 그제서야 다이애나의 손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다. 푸른 다이아몬드는 정말 희귀해서 구하기 힘든 보석 중의 보석에 속했다.
다이아몬드는 블루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새파랐고, 컸다. 컷도 깔끔한 것을 보니 보석 문외한인 나도 저 반지가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보석을 다이애나에게 선물할 정도라면, 오스카가 다이애나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나름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피식 웃었던 게, 사실 오스카랑 춤추고 싶어서 한 되도 않는 구닥다리 변명이 작전이 되어 먹혔던 것이 웃겨서였다.
진짜 이렇게 될 지 몰랐는데.
그래, 삶이란게 그렇다. 어디로 구를지 모르는 수레와도 같다.
“어째서 마음을 바꾼 거야?”
“글쎄.”
다이애나는 피식 웃었다.
“잭, 그 사람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서였는지…….”
그녀는 쓸쓸하게 뒤돌았다. 그리고 문득, 정적속에서.
“넌 어때?”
“응?”
“행복해?”
“아…….”
제롬 공작과 있을 땐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원래 그랬던 듯이.
그 고요에, 일상에, 익숙해지는게 이제는 너무나도 어려워져버려 괴롭다. 한숨을 쉰다.
“글쎄…….”
그리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잘 모르겠어, 나도.”
내 인생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 끝이 오기 전에 감히 그 때를 예측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겨 블루 다이아몬드의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여러 방들을 지나치고, 끝없는 복도를 걸어 드디어 그녀의 부모님이 있을 방 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