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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8화 (38/108)

<-- 새벽에서 아침까지 -->

그의 방에 들어가서는, 우리는 서로가 더 말 할 것도 없이 키스했다. 마치 책 속의 장면처럼, 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했다.

서로의 감정에 매몰되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이 컸는지. 아니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는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조끼 단추를 풀었고, 그는 내 드레스 끈을 잡아 풀어헤쳤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탐하고, 탐하고, 탐했다. 새벽이었고, 그는 나를 제 품에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내려 내 목덜미에 입술을 맞춰 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누워있었고, 그래서 그 때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제가 이기적이였다는 건 압니다.”

그가 내 허리를 쓸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이기적으로 제 감정만 생각하고, 가짜 약혼 소문으로 당혹스러웠을 당신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저는 간절했습니다.”

“…….”

“우연히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엇갈릴 수밖에 없을까.”

나를 안고 있던 그의 손이 단단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멀리 보이는 그의 책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항상 거절당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한번쯤은, 저처럼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을 잃는 아픔을 가르쳐 드리고 싶었습니다.”

“…….”

그의 따뜻한 손이 내 것을 더듬어 잡아왔다.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서 가짜 약혼 소문을 팔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눈에서 눈물방울이 굴러가는 느낌이 났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무슨 마음과 각오로 밀어냈는지도 모르면서. 이 사람은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내가 ‘당신이 나를 떠날까봐 두려워요’, 말하면 이 사람은 그 사실 또한 이용할 것이다. 내 감정을 알아채고 나서 제일 먼저 그걸 이용해 거짓 약혼 소문을 퍼트린 남자였다.

내가 불안 속에서 그의 사랑을 견디고 있는 걸 이 사람이 알면, 똑같이 그 사실을 이용해 나를 그의 옆에 잡아둘 것이다. 그가 딱 나를 사랑할 때 까지만.

“세실리아.”

그가 내 손을 잡고 제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세실리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미동하지 않았다. 그는 내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으며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나는 이때 생각하길.

있잖아요, 공작 전하.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믿으세요?

처음엔 사랑, 그다음에는 편안함, 그다음에는 정으로 사는 거래요. 그런데 사랑이 끝나면, 당신은 당신의 사랑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나를 좋아해줄 건가요?

다 늙어서, 더는 아름답지 않고, 매일 보고 봐서, 새롭지도 않으면. 그때도 나를 똑같이 사랑해주실 건가요? 가문간의 이해관계에도 종속되어있지 않을 나를 좋아해 줄 건가요?

그럴 거면 지금 이렇게 따뜻하지를 말지, 그럴 거면 이렇게 좋은 말들을 해주지를 말지. 그럴 거면 나를 위해서 왕관이라도 구해 올 것처럼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지 마요.

나는 몸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우셨습니까.”

“…….”

“미안합니다. 울게 해서.”

“…….”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그의 체온이 좋다. 그가 그 큰 손으로 내 배를 어루만진다.

“아이가 생기면, 이름은 뭘로 짓고 싶습니까?”

“…….”

“평소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음, 레이디를 만나고 가끔씩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이 이름은 뭐로 해야 할까,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 건가.”

그는 그리고 그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저는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있는데. 부족함 없이 길러낼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다 하게 해주고,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다 갖게 해주고.”

눈이 마주치니까 너털웃음을 짓는다.

“물론 교육은 잘 시켜야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괜히 버릇 나빠지지 않게 말입니다.”

그리고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빛으로, 그 큰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었다.

“남자이면, 앤드류, 윌리엄, 니콜라스, 제이미, 데미안……. 여자면, 음……. 여자 이름은 많이 아는 게 없는데 말입니다. 혹시 좋은 이름 알고 있습니까?”

나는 피식 웃는다. 그가 똑같이 웃는다.

“역시 웃으니까 예쁩니다.”

“…….”

“평생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평생이요. 나는 가만 생각에 잠긴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하늘이 예쁩니다. 멋진 곳에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기분 전환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됐어요.”

“안 일어나시면 제가 안고 갑니다.”

나는 작게 웃고는 그가 건네는 가운을 입는다. 그가 가까이 와서 내 손을 잡는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는 와인 바구니 속에서 잔을 꺼내들어, 그것을 와인으로 채웠다. 그리고 내게 건네주었다.

짠, 와인잔이 마주치고 나는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화가도 표현할 수 없는 고혹적인 어둠 속의 밤. 그리고 그 사이로 빛나는 보석같은 별들.

그리고 우리를 비추는, 환한 달.

“보름달이에요…….”

나는 생각에 잠긴다. 시원한 밤바람이 내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리 율러의 보름달이라 해도 당신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겠습니까.”

“제롬이 그런 낭만적인 말도 할 수 있다는 걸 왜 그 파티의 사람들은 모를까요?”

“글쎄.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일생 처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웃었다.

그는 그 뒤로 성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방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벽에 걸린 그림과, 조각상, 그리고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갑옷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분들은 저와 같이 웨스트 체셔를 지켜오셨고, 화이트 공작이라고 불리었던 선대 가주들이십니다.”

나는 벽에 쭉 늘어진 초상화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왜 웃습니까. 전 진지했는데.”

“다 똑같이 잘생겨서요. 그 축복받은 얼굴은 가족 내력인가, 싶어서.”

“부끄럽습니다.”

“정말요? 귀에 박히도록 들어서 감흥도 없으실 줄 알았는데.”

“세실리아에게 듣는 건 처음입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그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차가운 복도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숨이 떨어진다. 그가 나를, 내가 그를 바라본다.

“사랑합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네.”

“세실리아도 제게 말해주십시오.”

“언젠가는요.”

언젠가, 정말 언젠가. 당신이 내게 뒤돌아 멀어질 때쯤에는…….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워요, 이제 방에 들어가요.”

“이제 어떻게 방으로 돌아가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연하죠. 길은 다 외웠어요.”

쓸데없이, 기억력이 나빴으면 좋으련만.

그와 함께 그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 그의 방으로부터 왼쪽으로 세 번째 떨어진 방 앞에 그가 멈춰섰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를 바라본다.

“세실리아가 몰랐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뭘요?”

“제가 당신께 드릴 열쇠는 모든 방의 문을 열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 방으로부터 왼쪽에서 세 번째. 이 방은 세실리아가 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눈을 작게 휘어보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뒤돌았다. 나는 두어번 문을 뒤돌아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비밀. 때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는 것이 있다.

그가 언젠가는 나를 떠날 거라는 내 근거없는 불안감과 같이…….

제롬, 당신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나는 가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팔에 내 것을 끼워넣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미소 짓는다.

알려고 하지 말자.

나는 그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도 이런 내 불안감을 모르게 하자. 이 팽팽한 줄다리기가 끝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런대로 그 동안 괜찮을 지도 몰랐다.

그래. 그 동안 나는 실컷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그런 거였다.

========== 작품 후기 ==========

섬세한 감상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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