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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1화 (31/108)

<-- 새파란 달과, 춤추는 밤 -->

하지만 그 방법은 먹혔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젠장할.

그는 내 손을 잡은 뒤로부터, 완벽한 젠틀맨이 다 되어 있었다. 제가 에스코트 하는 레이디에 대한 예의는 있었는지 불편한 기색이라던가, 찡그리는 얼굴 따위는 더 이상 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충직한 기사처럼 매너있게 나를 리드하고 있었다.

역시 오스카 슐츠다웠다. 춤은 관능적이지도, 숨을 뺏어갈 정도로 달콤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로 잰 듯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게 오스카 슐츠의 매력인지도 몰랐지만.

와, 이런 미남을 왜 다이애나는 안 주워 갈까. 나는 슬쩍 그의 단정한 미소를 보고 탄식했다.

“이 정도면 보통은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뇨, 제가 아는데.”

나는 그의 리드에 맞춰 뱅글 돌아 그의 품에 안겼다, 다시 돌아왔다.

“당신 꽤나 쓸 만해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흠, 당신의 기대에 미쳐서 조금은 자랑스럽습니다.”

“워, 진짜요? 나 슐츠 영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신사는 레이디를 항상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게다가 사상도 매우 정직하다.

와, 이 사람 아내 될 분이 부러웠다. 얼굴만으로도 삼대를 먹고 살았을 사람만 딸려 오는 게 아니라, 레드 쇼어에다가 블리시스가 더블로 그냥.

물론 나를 속물이라고 욕해도 좋다. 돌을 던져도 좋은데, 정말 이 사람에 대한 사심은 없다고 신께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하는 것은 정말로 즐거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였다.

“있잖아요, 조금만 가까이 와 보세요.”

그가 멈칫하더니(스텝이 좀 꼬였다. 어지간히 당황했으면) 내게 1인치정도 가까이 다가왔다. 에효, 그걸로 되겠나 싶어서 내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그에게서 세이지 향기가 훅 하고 끼쳐왔다. 그답지는 않은 쌉싸름한 풀꽃향, 그리고 먹먹한 바닐라 향이 났다. 나는 그래서 순간 그 상태로 할 말을 잊고 굳어 있었다.

“레이디.”

그가 정중하게 나를 밀어 내기 전엔.

순간 내 시선이 그의 것이 향하는 곳으로 향했다. 난간에 홀로 서 있던 다이애나가 등을 휙 돌려 멀어졌다. 아, 너무 심취해서 다이애나가 이 모든 걸 보고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방금도 오스카에게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고 하던 거였는데……. 작전이 먹히고 있다고. 오스카는 나를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후문으로 향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그저 바라보았다. 내가 끼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면서 조금 웃긴 했다. 여기서 내가 오스카를 좋아하고 있었다면, 이거 조금 비참한 시나리오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조금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제롬 화이트 공작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마쳤을 땐 이제 혼자였다. 정말, 혼자. 첫 춤 상대가 워낙 어마무시한 상대였던 터라, 더 이상 꼬이는 남자는 없었다. 나는 혼자 터덜터덜 와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 웃기지도 않은 작전이 먹힌 것에 대해서. 확실히, 다이애나는 잭을 좋아했다. 그리고 오스카가 아무리 완벽할 지라도, 소녀 같은 마음씨의 그녀는 자신의 이상에 반하는 귀족 도련님 오스카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항상 자신만을 바라봐주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으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만을 바라봐주던 오스카를 데려간 여자가 잭이 좋아하는 나라면 더더욱, 그 순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었다.

다이애나의 심리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나는 이제 두 사람이 잘 해결하길 바라야 하는 걸까. 나는 정말 무신경하게도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게 미친 듯이 먹고 싶었다. 그때 내 손길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아.

“또 술이십니까?”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난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숨결, 익숙한 감촉, 그리고 향기. 그리고 적당한 고저의 목소리.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제롬 화이트.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무방비하게 있었다. 나는. 상처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먹먹한 감정이 해일이라도 되듯 황폐한 내 마음 속을 덮었다. 손이 떨렸다.

나는 키스 없이도 시간이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내 뒤에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내 귀를 향해 있었다. 게다가 그는 뒤에서 나를 팔로 감싸고 내 손을 쥐고 있었다.

나는 정말, 정말,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만을 바랬다.

“적당히 드십시오. 몸에 안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 몫을 들고 자리를 떴다. 나는 뒤늦게서야 뒤를 돌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향하는 곳에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모두 화려하고, 빛나고, 각자의 분야에서 최정상으로 거론되는 사람들. 가슴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뛰었다, 나는 바보같이도 그 순간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는 홀린 듯이 발코니로 향했다. 그냥 그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단을 올랐다. 그때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헉. 나는 뒤돌았다.

세상에, 다이아로 빚은 듯한 여자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올려보였다.

“해치지 않아요.”

그녀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레, 레이디 로렌스.”

벤 칼라일 대공이 그렇게 죽고 못산다는 화제의 여자, 마르사 로렌스였다.

그는 이 시대 사교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여자였다. 그런 사람을 죽기 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는 짓궂게 미소지어보였다.

“난 레이디가 아녜요.”

그리고 과즙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냥 마르사 로렌스.”

그녀의 구두굽 또각이는 소리가 선연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미소지었다.

“당신이 궁금했어요.”

“저,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리 와요. 우리 여자들은 닮은 것이 너무나도 많아.”

그리고서는 내게 친근하게 팔짱을 끼어 보였다. 그녀 특유의 바닐라 향이 알싸하게 퍼졌다. 순간 내 뺨을 강하게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거, 꿈일까. 현실일까?

그 마르사 로렌스였다. 그녀의 초상화를 빼고 그림 장사를 하는 곳이 없다는 율러 왕국 최고의 인기인. 현실에서 별이 보인다는 느낌이 이런 기분일 것이었다.

“자. 말해봐요.”

그녀가 난간에 섰다. 나도 그녀를 따라 얼떨결에 난간에 섰다.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 정말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무슨 잘 익힌 해산물처럼 보이는 게 아닌 걸까.

오늘 화장이 잘 먹었다고 내심 기뻐했는데 아무리 잘 먹어 봐야 이 여자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하하.

“저 남자, 어떻게 구워삶았어?”

그녀의 턱짓은 바로, 제롬 화이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오스카 슐츠나, 마르사 로렌스나. 아마도 내가 공작의 약혼녀라고 단단하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곤란하다.

“저, 저는 그러니까 공작, 전하의 약혼녀가 아니에요.”

그때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그는 당황한 듯 뒤를 한번 짧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한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또 한번 무언가를 찾다가, 순간 그와 나의 시선이 맞아떨어졌다.

시선만으로 숨이 턱턱 막혀본 경험,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있잖아요. 나이가 들다 보면, 어릴 적의 내가 본 것보다는 더 많은 걸 볼 수 있어.”

나는 마르사 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쁜 입꼬리를 곱게 끌어올렸다.

“나는 화제가 되는 거 냄새는 정말 잘 맡는데, 당신한테서 정말 대단한 직감이 와. 당신이 정말 크나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는 거. 그거, 알아요?”

모, 모르겠는데요. 나는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었다.

“남자가 제아무리 높다 해도, 사랑하는 여자 치맛바람을 못 벗어나니…….”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 순간, 제롬 화이트 공작의 시선이 내게로 꽂혀 나는 그대로 시간이 멈추는 기분을 하루에 두 번이나 느껴야 했다.

그의 주위 사람도 모르고, 나와 마르사만이 알고 있는. 오직 그와 나만의 은밀한 시선이었다. 그의 시선은 끈질기게 나를 향해, 나를 놓아줄 줄을 몰랐다.

하지만 왜. 왜였을까?

그는 약혼녀가 있을 텐데.

계약결혼이려나? 어렸을 때부터 예정되온 약혼? 아니면, 정략결혼의 시발점이려나.

“당신 정말 대단해요. 나도 저 사람은 성가셔서 싫은데. 항상 우리 그이에게 옳은 소리만 하니까, 내가 정말 저 사람이라면 치를 떨거든.”

그녀가 내게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했다.

“우리, 여자끼리 잘 해봐요. 나도 당신에게 필요한 도움이라면 언제든지 줄게.”

그녀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녀의 미모에 두 번 넋을 놓았다.

나는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다시 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냥 제 친구들과 시덥잖은 이야기나, 친한 레이디들이랑 인사를 하거나, 그냥 그게 다였다.

그러고 보니. 다이애나와 오스카는 잘 풀렸는지 모르겠네. 나는 으쓱했다.

그때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라 자리를 뜨기로 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정말로 의외의 인사였다. 나는 난간에 두 팔을 짚고 뒤돈 채로 그대로 가만 서 있었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제 손에 든 붉은 장미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잭.

그가 내게 천천히 걸어와, 눈을 내리깔며 붉은 장미를 내밀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께, 꽃을 바치러 왔습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오늘 밤,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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