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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0화 (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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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새파란 달과, 춤추는 밤

When The Night Falls.

마차가 덜그덕거리는 소리, 귀에 걸린 귀걸이가 짤랑거리는 소리,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같은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줄곧 하늘에 걸린 파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5년에 한번이라던 블루 문이었고,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낮이 짧고 밤이 길었다.

추위, 낭만, 그리고 긴 긴 밤. 딱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계절이다. 파티라면 다이애나는 항상 조금 들떠 있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생각에 잠겨 숙연하다.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카밀과 에드거에 대한 거라면…….”

“아냐. 그 두 사람 일이라면 이제 괜찮아.”

“아. 그렇구나.”

그리고 한참동안 우리 사이에 정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 사람도 거기 있을까?”

“잭?”

“응.”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윽, 잭이랑 다이애나랑 나랑 삼자대면, 그거 너무 어색할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그 순간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내가 한숨을 푹 쉬고,

“있지, 나 오늘밤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게 공작가의 새 안주인 되실 분이야.”

다이애나나, 아니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마음이었지만 나는 말을 해야 했다. 누구에게라도. 자존심을 세워대며 그를 애써 밀어내 놓고는 정말 치졸하게도 매달린다. 사람들이 보면 정말 추하다고 할 속마음이었다. 그래도 다이애나였기에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내가 가족 다음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만 잘 풀린다면 곧 가족이 될 사람이기도 했고. 나는 그 뒤로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만약 그럴 일이 생긴다면, 그때 네 옆엔 내가 있을게.”

나는 웃었다. 그러니 기분이 좀 더 나아졌다. 지금처럼 열병이 난 가슴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수다였다. 어떻게든 말하고 나면 고였던 감정이 조금 흘러나간다.

“고마워, 다이앤. 네가 최고야.”

“너 지금 진짜 예뻐. 내가 공 들인 보람이 있어.”

“진짜? 이런 마르사 스타일 여신 드레스는 조금 과할까 걱정했는데.”

“아냐. 드레스가 제 주인을 찾은 듯 예뻐. 나만 믿어.”

“고마워.”

내가 웃어보였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공작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실제로 만난 지는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밤 무도회에 가자는 다이애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신나게 놀아보자는 명목으로 나왔지만, 사실 그런 파티라면 그가 있을 것 같기에 가기로 했다.

그의 얼굴만이라도 잠깐 보고 싶었다. 정말, 그 이상으로는 바라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이미 좋은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와 꼭 마주쳐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상상을 잠깐 했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니까 천하에 둘 없을 나쁜 년이네.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그 뒤로 서로의 상념에 잠겨, 아무런 말없이 적막 속에 밤을 흘려보냈다.

마차가 멈췄다.

“세상에, 마차가 멈췄어.”

“그러게.”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행동해.”

그때 문이 열렸다. 내 앞에 깔려있는 화려한 카펫과, 출입문이 보인다. 환한 빛이 여기저기에 있고, 가면을 쓴 신사숙녀들이 짝을 지어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 두근거림으로 가슴을 쉬게 할 수가 없었는데 정작 다이애나는 태연했다.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걸으며 내게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네 가슴에 장미를 꽂아줄 신사분을 꼭 만날 수 있기를.”

“너도,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깃털이 달린 화려한 가면 뒤로 웃어보였다. 그리고 출입문에 서 있는 관리인에게 제 티켓을 보여주었다. 관리인은 티켓을 받아들고, 나와 다이애나를 번갈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문을 넘어서니, 그곳에는.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 와인, 마티니, 가면을 쓴 신사와 숙녀들.

그야말로 한밤중의 천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볼 수 있다면, 분명 이곳은 율러 왕국의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한 곳이며, 예술적으로 극단에 선 인간의 지상낙원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가 있었다.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잿빛 머리에, 잿빛 눈을 한 인사로 내 인물도감에 등재되어 있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면 뒤의 그는 꽤나 잘생겼고, 절제적인 인상과는 달리 눈에서 느껴지는 탐욕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상대는 남편으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회용 무도회 파트너로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요.”

나는 눈을 내리깔며 뜸을 들였다.

“날 위한 장미는 준비해 주셨나요?”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그가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꽃을 꺼내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내게 건넸다. 나는 조금 망설인 뒤, 고개를 약간 틀었다.

“하는 거 봐서요.”

그리고 장미를 받아 다시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

그의 입술이 휘어졌다.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내가 웃었다.

“하지만 오늘 밤 동안은 세레나라고 불러도 좋아요.”

“레이디 세레나.”

그가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당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럼, 당신은?”

“애쉬. 그냥 애쉬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나는 웃었다.

“춤 잘 춰요?”

“아름다운 레이디가 요청하신다면야.”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아, 이 열기. 나는 당장이라도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싶었다. 그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기에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가 기묘하게 웃어보였다. 선수는 내 취향이 아닌데, 조금 깨긴 했지만 임시 파트너로 나쁘지 않다.

음악이 멈추고, 마침 한창이었던 댄스가 끝났다. 그러자 분위기가 바뀌고 느긋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활기차게 뛰고 손벽을 치는 댄스 대신에 몸을 맞대고 추는 댄스곡이었다. 그가 내게 손을 권했다. 내가 받아들려는 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늦으셨군요.”

뜻밖의 인물이었다. 당신이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스카였다. 그렇다. 그 율리아의 동생 오스카 슐츠. 그가 내 앞을 막아서며 애쉬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제 파트너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애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늦으셨네요, 왕자님.”

웃어보이며.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그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을 것을 거라고 믿었다.

오스카는 과묵하고, 문득 보기에 불친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사려 깊고 신중하기도 했다. 그냥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게다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왕자였다고 착각했을 것이었다. 순백의 슐츠 제복을 입은 그는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고귀해 보였기 때문이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레이디. 다만, 저 치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울리기 좋은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믿어요. 구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 다음 파트너 찾는 일에 행운을.”

그러고서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허어.

“이봐요.”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가 나를 평소에 바라보듯, 싸늘하게 다시 바라보았다.

“다이애나 찾고 있었죠?”

그가 정곡이라도 찔린 듯 미간을 구겼다.

“레이디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요.”

하. 그가 낮게 한숨지었다. 나는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가 대여섯쯤 되는 남자들 사이에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아, 나도 와인 땡기는데. 다이애나의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은 모두 제가 들고 있는 와인을 다이애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는 왜 저런 남자복이 없담.

“오스카 영식께서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한번쯤은 도와줄게요.”

“예?”

“영식께선 여인의 질투를 사는 방식을 모르시군요?”

사실 나도 모르는데 오스카와 춤추고 싶었다. 그가 좋아서는 아니라, 싫어 죽어하는 오스카를 보고 싶었다. 나와 떨떠름한 얼굴로 춤추면서 다이애나를 힐끔거리는 오스카라니, 이 광경을 놓칠 수가 없었다. 어차피 파티장에 공작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그러니까,

이 광경이라도 놓칠 순 없다는 말씀.

“그건 자랑스러운 신사가 할 일이…….”

“고지식하네요. 다이애나는 고지식한 남자는 별로라는데.”

“……레이디께선 방금 제 말씀을 끊으셨습니다.”

“그건 죄송한데요. 오스카 영식께서도 첫 만남에서 제가 말을 끝마치게 두지 않으셨죠.”

그가 한숨을 내쉬며 아름답고 긴 그 백금발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래서 춤 출 거예요, 말 거예요.”

“당신 수작에는 안 넘어 갈 겁니다.”

“됐거든요. 당신 같은 남자 수레마차로 실어다 줘도 싫어요.”

그가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속고만 살았나, 정말.”

그가 피식 웃더니 내게 제 손을 내밀었다.

“저도 당신 같은 여자는 수레마차로 실어다 줘도 싫습니다.”

“그럼 좋네요.”

내가 깔끔하게 그의 손 위에다 내 것을 올려놓았다.

“이걸로 당신 한번 도와준 거예요.”

활기찬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 심정을 말하자면, 솔직히 이 방법이 먹힐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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