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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29화 (29/108)

<-- 까만 모자를 쓴 사내와 하얀 용 -->

제 하얀 피부를 과시하기라도 한 듯 하얀 색의 딱 들러붙는 드레스, 또각또각 대리석에 부딪히는 붉은 구두 굽, 누가 봐도 휘파람이 나올, 들어갈 덴 들어가고 나올 덴 나온 여자.

새하얀 얼굴과, 사내들의 로망이라고 할 금발 머리카락이 걸음과 함께 흔들린다. 눈동자는 정말, 유례없다고 일컬어지는 금색. 붉게 칠한 입술 아래엔 까만 점이 있었다.

왕의 서녀로 태어나, 대숙청을 피해 밑바닥에서부터 칼라일 대공의 코르티잔으로 사교계 최정상에 등극한 그녀였다. 사교계에서 핫하다는 그 잇-걸.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벤 칼라일 공작이 꼼짝을 못한다고들 했다. 칼라일 대공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마르사 로렌스가 좋아하는 다이아몬드부터 구하라는 것이 암묵적인 시장의 룰이 되었다.

나이 34, 그럼에도 아직 젊은 마르사 로렌스는 어느덧 사교계 데뷔탕트를 치르는 소녀들의 교과서가 되어 있었다. 차기 사교계의 꽃으로 거론되는 다이애나 그린힐이나, 샬롯 베르디게츠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저 숭배할 뿐이었다. 그녀는 가끔 제 기분에 따라 한밤중의 가면무도회를 열었는데, 아무나 초대장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복잡한 것을 싫어했기에 무도회의 룰은 간단했다.

첫째, 가면을 쓸 것.

둘째, 동행인 한명을 데려올 것.

셋째, 파트너가 있으면 가슴에 붉은 장미꽃을,

없으면 자신의 가슴에 붉은 장미를 꽂아줄 남자를 기다릴 것.

그야말로 귀족들의 기호에 맞는 무도회였다. 너무 복잡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원하는 높은 직위의 사람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기회.

마르사 로렌스는 사교계 사람들의 기호를 기막히게 잡아낼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의 무도회가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순간, 그녀의 걸음이 큰 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 옆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기사가 창을 교차하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름을 대시오.”

“나, 참. 니콜라스, 월터. 월터 맞지? 우리 꼭 이래야 돼?”

“이름을 대시오.”

“하여간 참 골 때린단 말이야. 나 누군지 알잖아.”

“이름을 대시오.”

“좋아, 마르사 로렌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두 사내가 창을 거두었다. 마르사는 가볍게 문을 밀어내며 저를 안으로 들였다.

“잭!”

잭은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녀 특유의 시그니쳐 미소를 내보이고는 그의 앞 소파에 가 누웠다. 그러고서는 당당하게 다리를 쭉 뻗고는 입에 시가를 물었다.

“불 있어?”

“누님. 제발 약속을 잡고…….”

“나 참, 우리가 그런 사이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몰라, 불 줘.”

잭은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 그녀의 시가에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시가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소파에 늘어졌다. 그녀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탐스러웠다. 잭이 다시 제 자리에 가서 앉자 그녀는 관능적인 미소를 지으며 제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나 이 목걸이 어때, 요즘 꽤 유행하는 건데. 무려 이카로스 수입품이야.”

“요즘 그게 그렇게 유행이라 이 여자든 저 여자든 하고 다니는 거군요.”

“그래,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그녀는 까르륵 웃었다.

“소문의 세실리아 로즈 때문이지.”

잭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 그는 그 뒤로 종이를 구겨버리고 다른 종이를 꺼내들었다. 마르사는 그 모습을 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끅끅대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아, 역시 그거였어. 젊은 사랑들이란. 좋아하는 게 사실이었구나!”

“…….”

“와, 얼굴 빨개지는 거 봐. 귀여워, 진짜 네 쫄병들이 보면…….”

“누님, 제가 제 부하들을 쫄병들이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무례한 표현이라고…….”

“쫄따구, 따까리보단 낫잖아.”

마르사가 깔깔거리며 소파 팔걸이 아래로 늘어진 다리를 휙휙 저어댔다.

“아님 시다바리? 아아, 지루해라. 우리 그이는 내가 제 부하들을 뭐라고 부르던 상관하지 않던데.”

“원하는 게 뭡니까, 누님.”

“나 이 세실리아 로즈라는 사람 이제, 만나고 싶어.”

“그렇군요.”

“아이 참, 도와달라는 말이잖아. 네가. 자. 이거.”

그녀는 그의 책상에 반짝이는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무도회입니까?”

“그렇지. 세실을 파트너로 데려오는 게 어때? 제발 이번에는 얼굴 좀 비춰줘라. 내 기 좀 세워달라고. 여자애들이 네 이름을 얼마나 울부짖는지 듣는 마르사 귀가 아파요.”

잭 제커시스는 반짝이는 카드를 보고 제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듯 정리했다. 그는 카드를 잡아 제 서류뭉치 위에 대충 올려두고는 시선을 옮겨 다시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래 줄 거야?”

“제 능력이 닿는 한 말입니다.”

“그래,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마르사가 시가 연기를 허공에 뽐내듯 내뿜었다.

“그래도 우리는 항상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그녀의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같은 시각.

제롬 화이트의 저택, 라스트 바빌론에서는.

그 성의 주인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왔다고 하녀들이 시끄러웠다.

어떤, 대담한 사람이 과연 그를 감히 귀찮게 했는가?

다이애나는 제 파란 손가방의 손잡이를 여러 차례 만지작거렸다. 때 탄다고 계집애들 만지지도 못하게 했던 것인데 손에 땀이 배고, 두려움으로 가슴이 뛰니 보이는 게 없다. 삭막하다. 왜 라스트 바빌론이라고 선대 로드가 이름을 지었는지 알 것만도 같다.

당당하게 왔지만 싸늘한 하녀들과 집사장의 기세에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사용인들은 무언가가 이상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분명 있었다. 그때 문이 달칵, 단정하게 열렸다. 다이애나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주인님께서 레이디를 보시겠다고 합니다.”

집사장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이 창백하다. 그리고 그의 기척과 발소리는 찾아보려 해도 없다. 그가 에스코트를 요청할 줄 알았더니 싸늘하게 뒤돌아선다. 실내 기온이 1도씨는 더 떨어진 것만 같았다. 다이애나는 핸드백을 품에 꼭 안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기에 눌렸다. 그래, 한 번도 기싸움에서 져 본적이 없는 다이애나가 벌써부터 기에 눌렸다. 한 걸음을 뗄 데마다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는 게, 바닥이 마치 살얼음판 같다.

성이 꽤나 넓어서 구조는 마치 미로와 같다. 벽에는 좁은 간격으로 그의 병사들이 서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했다가는 그녀라도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 잘생겼네.’

복도에는 선대 화이트 공작들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정 하나 없을 것 같은 냉혈한들이다. 이 사람들이 왕의 출전을 도왔고, 옆에서 싸웠으며, 항상 승리를 거두어냈다. 이 사람들이 나라를 만들고, 법을 만들었으며, 국가를 수호했다.

사실 화이트 공작가는 막강한 부와, 권력, 군대로 이미 왕관을 쓰고 싶었으면 왕가를 갈아치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대의 뜻을 받들어 묵묵히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과연 사람들이 말하길 ‘율러의 용’ 다웠다. 아니, 애초에 ‘율러’가 고대어로 ‘용이 수호하는 국가’ 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용이 화이트 공작가를 싸잡아 일컫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을 것이었다.

세실리아, 그 애는 애초에 이 사람이 이 나라에 가지는 무게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1부터 100까지 사이에서의 크기만큼만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도 애초에 제롬 화이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감히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분명 그녀의 계산 범위 바깥일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 사람 대하길 친구 대하듯 했겠지만 말이다. 귀족으로 자라지 않은 그녀는 이 세계와, 그 힘이 뻗어나가는 곳, 그리고 그 힘의 균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또한, 제롬 화이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그가 나이 24에 왜 공작위를 얻었는지, 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겐 세실이 더 특별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집사도 완벽한 율러 악센트를 쓰는 것으로 보아, 고위 귀족의 차남, 삼남쯤 되는 사람일 것이었다. 다이애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방 문 안으로 향했다.

그는 때마침 박제된 나비들을 액자에 고정하고 있었다. 무, 무슨 나비를 박제한다고 그래? 다이애나는 마침 자기 자신이 박제당하는 기분이 들어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놀라셨습니까?”

다이애나는 뭐라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턱이 덜덜덜 떨리려는 걸 그녀는 애써 속내를 진정했다. 아니, 애초에 그는 그녀가 상대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 나라의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올라 포효하는 용 그 자체였다. 오스카나, 율리아, 엄마 아빠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왕을 알현할 때도 이런 위압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는 핀을 들어 나비의 날개를 섬세하게 찔렀다. 바늘이 날개를 뚫고 천천히 흰 종이가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제 즐거운 놀이 시간을 방해하시다니, 참 짖궂습니다.”

“노, 놀이요?”

“예. 놀이입니다. 늘 신중해야 하죠, 나비들은. 잡기도 어렵고, 잡아두기도 어렵고……. 살아있는 채로 보관하기도 어려워 늘 신중해야 하죠.”

다이애나의 손이 차게 식었다. 그녀의 아랫배가 긴장으로 살살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방에서 미약한 포르말린 냄새가 났다.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번 건 산 채로 박제된 곤충입니다. 아주 희귀하죠.”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 한쪽을 들어.

“무슨 일이시죠?”

“아, 아니…….”

“그런 멍청한 얼굴 할 거면 애초에 오시지를 말았어야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날카로워졌다. 남은 것은 그의 한 꺼풀짜리 정중함이었다.

다이애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애초에 세실은, 정말 미쳤어. 정말 미쳐버린 거라고. 간절하던 잭 제커시스 생각이 싹 달아났다. 생존욕구가 앞서면 사람은 으레 그렇다.

“용건.”

그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이애나는 그 순간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다.

남자는 아름다웠다. 동시에 위험했다. 다이애나는 순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의 심리가 이해가 갔다.

“세, 세실이.”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표현은 못하지만, 전하를 많이, 조, 좋아하고 있어요. 저는 치, 친구를 위해서…….”

“위해서?”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휘어졌다.

“당신이 잭 제커시스에게 미쳐 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제국에 있습니까? 매번 그의 카지노에서 수천 골드를 잃고 올 정도로 그에게 당신의 부를 과시하고 있다는 것도?”

깔끔한 구두 소리가 넓은 실내에 울렸다. 턱, 소리와 함께 다이애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그의 큰 손이 다이애나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이애나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문득 보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가 세실에게 보이는 것과는 사뭇 달라서. 그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세실리아가 당신 같은 이기적인 친구를 두었다니,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그녀의 볼에 눈물이 굴러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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