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28화 (28/108)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

“누님.”

율리아가 다 차려 입고, 응접실에 도착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오스카!”

“늦으시기에 들렀습니다.”

율리아의 들뜬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것은 건조하고 차분했다. 나는 둘의 모습을 천천히 번갈아보았다. 율리아가 밝은 갈색 계열의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졌다 하면, 그의 동생은 놀랍게도 옅은 빛의 백금발에 적색 눈동자를 가졌다. 둘이 남매인 것이 신기했다.

언젠가 율리아가 우리 집 사람은 한명 빼고 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두 사람이 친남매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구나.”

율리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눈치 없이 너무 일찍 나온 건 아닌가 모르겠네.”

하며 웃었다. 다이애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다이애나가 급히 대꾸했다.

“그럼 이제 잘 가, 율리아. 집에 가면 꼭 무사히 도착했다고 편지해줘.”

“그래. 나도 이만 부티크 일도 밀려있고, 오스카도 바쁘니 일어나봐야겠어. 세실, 너도 안녕.”

“아, 그래. 율리아. 잘 가.”

율리아는 오스카의 에스코트를 받아 방 밖으로 향했다. 그래서 방 안에 남아있는 것은 나와, 다이애나였다. 우리는 한참동안의 침묵에 그렇게 가만 서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적어도 모레 오후쯤이나 돼야 도착할거야.”

“그래?”

“응.”

다이애나는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윤기나는 남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때동안 계속 여기 있어주면 안 돼?”

“하지만 카밀은…….”

“카밀은 애가 아니잖아. 그리고 난 엄마아빠가 여기 올 때 너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카밀이 우리 엄마아빠를 설득하는 것보단 나와 네가 천천히 이야기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거야. 엄마는 카밀을 보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너라면 뭐라도 다르겠지. 그리고 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마. 나는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그래, 좋아. 내가 머무는 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전혀. 괜찮아.”

우리는 오스카가 방금까지만 해도 앉아있었던 티테이블에 앉았다. 다이애나는 오스카가 손도 대지 않았던 다과를 집어 제 입에 가져다대었다. 나는 차를 마셨다.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봐.”

나는 솔직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나와 다이애나의 우정은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진 것이었을까? 다이애나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다과는 어디서 나는 거야? 정말 맛있네.”

“테네시 제과. 제도에서 꽤나 유명해. 원한다면 주소 적어줄게.”

“괜찮아. 가필드 테네시 음식이라면 이름값이지. 비싸.”

역시 말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오스카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크나큰 거리낌을 느끼는 듯 했다. 그래서 급히 화제를 돌린 것이었다. 다이애나가 피식 웃었다.

“……난 어렸을 때, 멋모르는 소녀 시절에는 귀족이었던 게 싫었어. 쓸데없는 반항이랄까.”

“말도 안 돼! 넌 사교계의 그야, 뭐 꽃이잖아. 네가 귀족이 되는 게 싫었으면 누가……?”

“그냥 격식 차리는 게 싫었다고 할게. 나는 모험가가 되고 싶었어. 세상을 보고, 그리고 탐험하고 싶었어.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세상을 누비는 거지. 드레스 대신.”

다이애나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율리아에게도. 나는 이 순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나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어릴 적의 꿈이었지만, 그리고 부정당한 이상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이상을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모험가 소녀 대신 귀족 다이애나 그린힐이 되는 데 익숙해진 다음에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을 그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나의 이상을 가만 동경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잭 제커시스?”

다이애나는 앳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멋모를 소녀 시절을 상기하는 왕비의 표정과 같았다면, 그녀는 믿을까.

“그 사람은 여러 나라를 여행했대. 총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리고 그 사람 소유의 배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 그가 몸담아 여행했던 것들이지. 그 사람은 제 사람이 부탁만 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거야. 그리고…….”

다이애나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와, 그거 참 대단하다. 처음 알았어.”

“……그래, 너는 몰랐구나.”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다과를 우물댔다.

“역시 몰랐겠지.”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유감스러운 감정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생각 없는 악녀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스카 슐츠가 싫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약혼한 사이인 것도 싫고, 그가 제 아내가 당연히 나라고 믿고 있는 것도 싫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귀족의 선민의식도 같잖고, 하여튼. 제 딴에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의 옆에선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이애나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이해할 순 있어도, 그것이 나의 것과는 다르다는 이질감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야, 다이애나가 왜 제 오빠의 결혼에 매달리는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결혼이 제 이상의 발현이라고 믿는 다이애나의 굳건한 신념 때문이었다. 동화 속 이야기를 닮은 그들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다이애나의 생각이었다. 다이애나는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며 동화 같은 이상을 동경하는 소녀였다. 그리고 그 이상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제 오빠의 결혼, 그리고 잭 제커시스였으며.

그 이상의 정 반대에 서있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준비된 미래, 또 오스카 슐츠였던 것이었다.

애초에 나에 대한 맹목적인 다이애나의 신뢰는, 다.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그녀와는 정반대인 내가 그녀의 이상을 감히 닮아서이리라. 나는 그래서 그녀를 믿을 수 있었다. 사람은 신념을 간파하면 그 뒤로는 쉽다. 예상 행동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다이애나는 그 뒤로 내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의 것과 닮아. 근거 없는 직감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다이애나는 아마도, 제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그래도 친구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녀가 내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냐. 괜찮아.”

다이애나가 그 뒤로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정말 이유를 모를 그녀의 웃음이었다.

다이애나가 뭐라도 읽자며 책을 좀 가져오겠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몇 개 남지 않은 다과를 우물댔다.

다이애나가 조금 늦었다. 책을 고르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나는 괘념치 않았다. 그리고 책에 흠뻑 빠져 있다가, 너무나도 갑자기 문득.

“편지!”

다이애나가 화들짝 놀랬다.

“으, 응?”

“카밀이 기다리고 있어. 세상에. 걱정했겠다. 다이애나, 나 편지 좀 쓸 수 있을까?”

“아. 그거라면 괜찮아, 세실.”

다이애나가 평온해진 얼굴로 답했다.

“내가 미리 카밀에게 서신을 보내놓았으니까.”

“아, 다행이네.”

내가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하나 더 쓰지 않아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걱정되면 종이와 펜, 그리고 사람을 빌려줄 수 있어.”

“부탁할게.”

그녀가 내 뒤의 하녀에게로 슥 눈빛을 보냈다. 하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

다행히도, 다이애나의 오빠. 에드거는 고비를 넘기자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침을 많이 했고, 목소리가 쉬어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부러진 팔과 깊은 상처를 입은 왼쪽 다리는 완쾌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부러진 팔이 검을 들어야 하는 오른쪽 팔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나와 다이애나는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집사장에게 전해 듣자마자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는 천장을 보며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있었다.

“오빠, 하녀들이 약은 잘 챙겨 주고 있는 거지?”

“그래. 모두 다 정성으로 돌봐 주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가 그 말을 끝으로 기침을 했다.

“의사는?”

“십오분 뒤에 약속이니까 곧 올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덥잖은 이야기 몇이 오갔다.

의사는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다. 그가 왕진가방을 들고 문 뒤에 서 있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준 다이애나 어머니의 추종자인 듯한 그의 첫인상 때문이었으며, 그가 에드거와 카밀의 사랑을 방해하는 나쁜 세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정중하게 나와, 다이애나에게 인사했다.

“레이디 그린힐, 그리고 레이디 로즈를 뵙습니다.”

“필립.”

그가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저번의 태도와는 보기 힘든 이질감이 느껴졌다.

“진료를 할 동안, 귀한 레이디들께서는 잠깐 자리를 비워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좋아.”

다이애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애나 뒤를 따랐다. 문을 닫고 나서, 다이애나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렵지 않겠네. 생각보다.”

다이애나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렵지 않다니, 뭐가?”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다이애나는 걸음을 순간 멈추고, 움찔 떨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이애나는 웃었다.

“말하자면 길어. 하지만 이건 확신할 수 있어. 카밀은 곧 오월의 신부가 될 거라는 걸.”

“그걸 어떻게 알아?”

“음……. 레이디의 직감이랄까?”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어느새 창 밖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세실.”

“응?”

“동생 뒷바라지하느라고 그동안 고생 많았을 텐데, 재밌는 데 가고 싶지 않아?”

“아…….”

나는 망설였다.

“나는 지금 드레스도 없고, 화장하려면 또 집에 들러야 하고…….”

“내 옷, 내 화장품, 내 트왈렛 모두 오늘 밤엔 다 네 거야. 네가 입고 싶은 옷을 고르면 내가 꾸미는 거 도와줄게! 넌 정말 욕심이 나는 사람이라니까, 내가 한번쯤 꼭 코디해주고 싶었어. 세실. 모두가 너만 바라보게 해줄 수도 있어. 제발, 세실. 제발. 이럴 기회가 또 어디 있어?”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거기에 와인도 있는 거니?”

“와인, 위스키, 마티니! 네가 말만 해! 그것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무도회는 아니야. 제도에서 그렇게 얻기 힘들다는 마르사의 한밤중 가면 무도회 초대장이라니까!”

“그게 오늘이었구나. 몰랐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지나치게 감정소모가 잦았다. 게다가 가면 무도회라니,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애나가 꺄 소리를 질렀다.

“빨리 와, 어서 준비해야 돼!”

다이애나가 내 손목을 잡고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녀의 찰랑이는 남색 머리칼을 보고 작게 피식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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