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27화 (27/108)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

“세, 세실리아.”

다이애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 사실 아직도 정신이 좀 혼미해.”

“그, 그렇구나. 방, 그래 방! 방 하나 빌려줄까?”

“아냐.”

나는 바닥에 도로 누웠다. 그리고 흐릿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텅 빈 와인 잔이 부드러운 카펫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누웠던 따뜻한 구석을 찾아 그곳으로 몸을 웅크렸다. 부드러운 카펫의 촉감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 이불이나 덮어 줘. 자게.”

“그럼, 내 침대에서 잘래? 조금 넓기도 하고.”

“너는?”

“아, 인형들 좀 치우면 두 명 누울 자리는 있어.”

“율리아는?”

“시종인들은 귀족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으니까, 뭐라도 덮어 주자.”

나는 동의했다. 그리고 애써 몸을 일으켰다. 숙취 때문이었는지 머리가 미칠 듯이 아팠다. 나는 다이애나의 침대에 가서 몸을 간신히 뉘였다.

나는 다이애나가 옷장에서 두꺼운 겨울 털망토를 꺼내 율리아에게 덮어주는 것을 보았다. 다이애나가 그 뒤로 내 옆 자리에 와서 누웠다. 내가 간신히 잠에 들려 할 때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 자?”

“아니.”

그녀가 조금 망설였다.

“너, 정말. 잭 제커시스님 안 좋아해?”

“응.”

나는 깔끔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데.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정말?”

“그래. 너네 행복해라.”

나는 깔끔하게 답했다. 그녀는 설레는 그 마음 때문이었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뒤돌아 누워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뜬 눈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본 건 작년 여름 칼라일 성에서 열린 파티에서였어.”

다이애나는 그 말을 한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어. 친구들이랑 한껏 취한 채로. 내가 신상 라빈 드레스를 자랑하고 있었고, 남자 생각은 없었어. 복도를 걸으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사람들이 왜 그 날의 파티를 ‘달밤의 연회’ 라고 부르는 줄 알겠는 거야.”

“그래서?”

“그때만 해도 난 사랑은 믿지 않았거든. 그래서 좋은 남자들을 물색하기보다는 발코니에서 애들이랑 가십 얘기를 하기 바빴지. 가끔 내게 오는 시선들을 작은 미소로 돌려주고는 말이야. 그리고 나는 복도를 걸으며 노래를 불렀어. 정신없이 걷다가,”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앞을 보지 않고 걸었거든. 부주의했지. 그 사람은 키가 컸어. 내 머리가 그의 가슴에 닿더라고. 나는 고개를 물끄러미 들어서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그 사람 얼굴을 올려다봤어. 그리고, 그게 그, 였던 거야.”

“잭?”

“응. 찰나가 평생같았어. 그리고 내가 가끔 와인잔 넘어로만 훔쳐보며 흠모하던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었으니 말이야,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지나쳐 갔는데, 나는 그 순간을 곱씹으며 그대로 오랫동안 서있었어. 그리고 뒤를 돌아 그 사람이 멀어지는 걸 바라봤어. 그 사람의 향수라던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서늘한 눈빛이라던가…….”

다이애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때 반한 거야?”

“파문, 그냥 파문이었어. 내 흐리멍텅한 인생에 나타나 준 즐거움이었지. 그런 남자를 보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부에, 잘생긴 얼굴에, 아니. 그냥 그라는 존재가 무언가가 특출났어. 인생에 저런 사람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레이디의 직감이었지.”

“그래서?”

“난 아닌 척 하면서 그 사람을 내 눈으로 쫓았어. 그리고 그 사람이 3층, 바에 있다는 들리는 이야기에 천천히 그 곳으로 향한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어.”

시가 연기 뒤에, 구석 테이블의 낡은 조명 아래. 신사들과. 다이애나가 이야기했다.

“그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사람들이 다 그 자리에 모여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그 곳으로 걸어갔어. 그리고 거기에서 둥근 테이블 뒤에 앉아있는 그 사람을 봤지. 그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재킷을 걸어놓고, 셔츠 소매는 거칠게 뒤로 접어둔 채로 여유롭게 게임에 응하고 있었어.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다고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상대방, 오. 세실. 그 사람은 애꾸눈을 한 사람이었는데…….”

다이애나는 제 옆에 있는 분홍색 토끼인형을 꺼내 안았다.

“제 처를 도박에 걸었어! 그 애꾸눈의 신사, 아니 신사라고도 말할 수 없는 무뢰배가 그러고는 노란 이를 내보이며 낄낄거리며 웃었어. 오, 세실. 시선은 그 애꾸눈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한테 쏠렸어. 그 여자의 얼굴이 얼마나 새하얬는지 몰라. 그리고 그 여자는 애꾸눈의 팔목을 붙잡고 저를 팔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 그 장면에 사람들은 숨을 헉 들이켰어.”

“그래서?”

“세실, 네가 알겠지만 게임에 참여할 때는, 승자가 제시한 것보다 더 큰 것을 걸어야 게임에 응할 수 있어. 그리고 보다시피, 블랙 잭 그는 지고 있었지. 누가 봐도 불리한 게임이었어! 하지만 애꾸눈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애꾸눈의 아내보다 더 귀한 것을 걸 용기가 없으면 잭은 게임에서 지고 말아. 그 무뢰배는 제 승리를 예감하고 사악하게 웃고 있었어.”

“내가 알기론 잭은 잃은 적이 한 번도…….”

“그래! 그거야. 모두의 시선이 잭에게로 집중되었어. 그는 모자 속에서 고개를 들며 그 금빛 눈동자로 무뢰배를 쏘아보았지. 그리고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블랙 잭. 그의 카지노를 걸겠고 했어. 그야말로 올 인이었지. 그 뒤로 행운의 여신이 잭의 손을 들었는지,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승리의 축배를 마시고 있었어. 우리 모두 손에 땀을 쥐었던 게임이었고, 결과는 잭의 승리였지. 그때 프레실리우 부인의 절망이란. 아, 그 불쌍한 여인.”

“프레실리우 리블랭?”

“그래! 한때는 가장 아름답던 여인,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린 인사가 노예로 팔아 넘겨지게 되었으니 그녀의 절망은 정말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지. 아름답게 태어났지만, 몰락귀족의 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녀의 절망이었을 거야. 그녀는 잭이 승리하자마자, 그의 팔을 붙들고 하녀로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빌기 시작했어. 제 몸 값을 평생 일해서 벌어 갚겠다며, 제발 저를 노예상에 팔아넘기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

“정말 유감이네. 그 애꾸눈,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지자 마자,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자리를 떴어. 제 전 처의 불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이야! 그의 표정은 지독했어. 마치 아끼던 장난감을 잃은 치의 얼굴이었지. 프레실리우 부인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으니, 뒤돌아 떠나는 그 망할 치도 아쉬운 마음은 있었겠지! 그때 잭이 여인의 부르튼 손을 소중하게 쥔 채로 그녀를 일으켰어. 그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지.”

“뭐라고 말했는데?”

“아름다운 아가씨, 절망하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밤이네요. 이런 밤에는, 누구나 선물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저는 당신에게 자유를 선물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저런 무뢰배의 옆에서 낭비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불쌍한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어. 그녀는 울며 그에게 연신 고맙다고만 말했어.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그녀의 손에 수표를 꺼내 쥐어주고는 그저 인파속을 뚫고 걸어 나갔어.”

“대단한 사람이네.”

“정말, 그렇지. 내가 듣기론 그 애꾸눈의 치가 질 낮은 사내들 앞에서 보란 듯이 제 처를 희롱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잭 제커시스님께서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거래. 그의 방식으로 말이야. 도박. 애꾸눈은 그에 응했고, 결국 제 처를 잃었지만 말이야. 그날 밤 그 여자는 자유를 얻었지. 잭의 도움으로.”

다이애나는 이야기를 마친 뒤에도 한참동안 그 감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건국제날 밤 우울했던 나를 미소 짓게 할 정도로, 마음이 착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라면 나를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거야.”

“그래. 그런 사람이라면 그러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사람이 좋아서 한 자선 활동으로 그 사람을 숭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담이던 아니던, 잭은 여전히 잭이었고 내 좋은 친구였다.

“언젠간 그 사람이 나를 보게 하고 싶어, 언젠간.”

다이애나는 힘 줘 말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쥐고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들이란, 말이야.”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카밀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들 그런 것.

아침이 밝자마자, 우리는 방문객을 맞이해야만 했다. 율리아는 늦잠을 자느라고 오후 늦게까지 침대에 뻗어 있었고(일어나보니 율리아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와 다이애나는 느긋하게 아점을 먹고 층계를 오를 때였다. 블루 다이아몬드의 집사장이 손님이 왔다고 일렀다.

“어머, 누구?”

“오스카 슐츠 도련님이십니다.”

“오스카!”

다이애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빠르게 그녀의 걸음을 쫓았다. 율리아의 동생이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일상 중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다이애나가 문을 열자 차를 마시던 오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레이디 다이애나.”

“아, 어서 와. 어서와. 여기는 내 친구 세실리아. 로징턴의 레이디야.”

“레이디 세실리아.”

“반가워요.”

“세실리아, 저 사람은 오스카 슐츠. 슐츠 가문의 장남이자 블리시스, 레드 쇼어의 후계자야.”

나는 오스카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보기 드문 백금발이었고 눈은 사람을 꿰뚫는 붉은 빛이었다. 남자는 잘생겼기보다는 예쁜 편이었고 분명 나보다 한 살 적었을 텐데도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머리, 장발이 어울리는 남자는 흔하지 않을 텐데 그의 머리카락은 꽤나 길었고, 그와 잘 어울렸다. 다이애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차갑게 미소지어보였다.

“오스카, 잠깐만. 내가 네 누나를 데려올게. 넌 세실이랑 대화 좀 하고 있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리고 그와 홀로 남겨졌다.

“안 앉으실 겁니까?”

그가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이미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불쾌합니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그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정말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저에게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힘을 분위기만으로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지금쯤 그의 혈관엔 푸른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생각에 잠겼다.

항구도시 블리시스, 그리고 그곳의 난공불략의 요새로 적의 피로 물들어 붉은 바다, 즉 레드 쇼어라고 불린다는 곳의 차기 주인.

천사같은 얼굴과, 냉철한 머리로 슐츠 후작가의 천재라고 불리는 인물. 내가 자작가의 레이디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의 옷자락조차 구경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미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 이름 없는 땅의 듣보잡 레이디가 되면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그가 다이애나에게 보내는 시선과는 다른, 차갑기 그지없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게 상위 귀족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고결하게 태어났다는 마음가짐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뒤에 감추어진 은근한 선민의식. 나는 이런 환영받지 못하는 순간들에 익숙하다. 다만 최근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일들과, 좋은 사람들 덕에 가끔씩 잊고 사는 것이지.

나는 다이애나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냥 율리아를 데려올 걸 그랬네.”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의 정적 뒤에,

“레이디 다이애나가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가 그 아름다운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디 다이애나는…….”

“…….”

“……아닙니다.”

뭐야, 둘이 뭐라도 있어? 나는 죽을 만큼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내 여자의 직감이 오스카가 다이애나를 좋아하고 있고, 다이애나의 마음은 잭에게 있다는 것을 미세하게 감지했다. 하긴, 다이애나는 남자라면 한번 쯤 꿈꿔 볼 여자이기도 하지.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오스카의 마음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을 거였고. 둘만 있게 되고 싶지 않았겠지. 나는 왜 그렇게 다이애나가 다급히 방을 떠났는지 알 수 있었다.

“주제 넘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건조하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된 채로.

“좋아.”

그가 시선을 떼 내 눈을 바라보았다.

“생화를 닮으셨군요. 들에 피어있는 그런 류의 것 말입니다. 가공되어있지도 않고, 재배용으로 자란, 품종이 있는 꽃들과는 다릅니다. 웃는 얼굴에서 생기가 느껴집니다.”

“어, 음. 고마워.”

“그러니까 경고드리겠습니다.”

그가 단정하게 말했다.

“로드 화이트. 그 분에게서 최대한, 멀리. 그리고 빠르게. 도망치십시오.”

“그, 그분께서는 내가 알기로…….”

“만일 다른 분을 마음에 품으셨거나, 그렇다면 말입니다. 지금부터 도망치는 게 빠르겠군요.”

나는 반론을 제기하려 했지만, 오스카의 서늘한 눈빛에 더 이상 말을 뗄 수가 없었다.

“슐츠 영식, 말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이건 제가 당신에게 베푸는 자비이자, 당신이 아는 한 가장 믿을만한 조언일 겁니다.”

그는 깔끔하게 답했다.

“나,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예, 이해가 안 되시겠지요. 하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빠르던, 느리던. 인간은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는 제가 놓인 현실을 배우는 동물이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굳어있었고, 그는 여전히 고요 속에서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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