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
“그래, 무슨 사이야?”
율리아가 그 깊은 속눈썹을 파닥이며 물었다.
나는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오해 없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전할 수 있는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말을 다듬었다.
사실 나는 다이애나가 나한테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해 줘서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사교계의 꽃이었다. 그녀는 내게 제가 찜해놓은 남자를 ‘빼앗았다’는 오명을 씌워 사교계에서 퇴출시킬 수도 있었고, 친구관계에 종말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책 속 퀸-비(Queen Bee)들과는 다르게 침착하게, 당사자인 나에게 이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나는 그래서 깔끔할 대답을 내놓을 의무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율리아가 듣고 있었다. 가십의 신인 그녀의 앞에서 말을 꺼낸다는 것은 온 왕국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율리아발 가십은 웬만한 언론사보다 빨랐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기자회견보다도 더 중대했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며,
“건국제에서 술을 마시다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 사람이 옆 의자에 앉아있었어.”
“……그렇구나.”
“그리고 내가 그 사람한테 편지를 전해 줬는데…….”
“그게 내 편지였고?”
“응. 그리고 내가 좀 집안 문제로 힘들어 하니까 그 사람이 좀 위로해주고.”
그때 율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은 취기로 붉어진 채로.
“세실리아 로즈, 너 그 사람이랑 잤어, 안 잤어. 그게 중요한거잖아.”
“안 잤어!”
“진짜 안 잤어?”
“그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깬 건 다이애나였다.
“왜?”
나는 율리아를 향해 웃다가 순간 차가워진 분위기에 다이애나를 간신히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제 존재감 하나만으로 주위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 사람이 편지로, 저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다이애나는 눈을 내리깔아 그 가녀린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쥐었다.
“그리고 나를, 그리고 내 마음을 알고 있지만, 제 취향이 아니래.”
“저런, 취향 무시 못 하지.”
눈치없이 끼어든 율리아를 내가 흘겼다. ‘왜? 맞는 말이잖아.’ 율리아는 궁시렁댔다.
“그 사람은 너한테 푹 빠져 있는 것 같던데, 왜?”
다이애나의 미소가 짓궂어졌다.
“한번쯤 침대에 확 눕혀보고 싶은 남자 아니야?”
그때 율리아가 끼어들었다.
“내 정보망에 의하면 정말 가정적인 남자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 저보다 가난한 사람을 깔보지 않고, 집안일 잘하고, 요리도 수준급에다가…….”
“율리아.”
“아, 알았어. 그냥 너희도 좀 알고 있으라고.”
나는 한 조각 남은 스테이크를 바라보았다. 이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입으로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가 나를 좋아한다.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쁘고, 말하는 사람도 찝찝하지만 나와 다이애나 모두 알아야 하는 사실. 일단 고비는 넘겼다. 나는 상념에 잠겼다.
그러게, 그 사람과 연애하는 것은 즐거울 것이다. 잭은 제 말대로라면 요리도 조금 할 수 있다고 했고, 재미있는 곳을 많이 알고 있다고 했고.
건국제 그 날 분수에서, 우리 서로 대화하고 웃다가, 눈이 마주친 채로 웃음이 멎어 그대로 그가 내 입술을 탐할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 날이 춥네요.’
거절했다. 분명 공작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내 턱을 잡고 천천히 다가올 때에는, 그저 가만 눈을 감고 그의 키스를 기다렸었는데. 잭이 그랬을 때에는 달랐다.
내가 그 다음에는 집에 그만 들어가 봐야 된다고 했고, 그는 나를 바래다주었다. 아, 그리고 현관에서.
‘네 마음이 변할 때까지, 내 헛된 마음은 널 좋아할 거야.’
그가 다시 고백했다.
‘나는 널 울지 않게 할 자신이 있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나는 잭에게 나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그래서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어. 난 다른 사람 좋아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다이애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리고 다이애나와 율리아가 시선을 맞추었다. 다이애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설마. 그 공작의 약혼녀가 너라는 말이니?”
“어?”
“네가 좋아하는 남자는 이 시점에서 하나 아니야, 그럼?”
“아…….”
나는 웃었다.
“나 아니야. 다른 왕국의 공주님쯤이나 되는 사람이겠지.”
“딱한 세실.”
율리아가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 뭐야! 너희 둘. 나 그 사람 잊을거야!”
나는 애써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잊어야 했다.
그래.
나는 내 격에 맞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할 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 사람은 정말 나의 영혼의 짝 같다던가, 평생의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게 할 만한 사람과 결혼할 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그 때,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했을 사람은 공작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내 영원한 상상 속 왕자님일 것이었다.
아무리 긴 삶을 살아도 사랑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그 남자 하나겠지.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파서. 언젠가 무뎌지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우리 레슬리 오빠도 참 괜찮은데.”
“다이애나, 그럼 너희 부모님께서 화병으로 쓰러지실 지도 몰라.”
“그래, 다이애나. 그러니까 세실 너는 우리 오스카랑 만나보는 건?”
우리는 모두 웃었다. 제롬이나, 레슬리나, 오스카나. 어쨌던 나랑 모두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모두 다이애나의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녀의 방에서 또.
와인을 마셨다. 지금 화제는 사교계 여자들이라면 다 할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이때, 율리아가 갖고 있었던 어마무지한 양의 정보는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때 소냐 플렛쳐, 그 여자가 호라스 남작한테, 그래요 난 돈이라도 많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다.
“당신이 지금 말하는 대로, 전 졸부가 맞아요. 조오오올라 부자라는 뜻이죠.”
“그리고?”
“호라스 남작이 발을 구르면서 파티장을 나갔어. 그리고 모두 소냐 플렛쳐한테 박수를 치기 시작했지. 딱한 여자야, 얼마나 호라스 남작이 추근댔으면.”
“제 분수를 알아야지. 호라스 남작 이제 오십이잖아. 게다가 소냐 플렛쳐가 돈으로 작위를 사긴 했어도 준남작 영애라고. 그렇게 해서는 안됐다니까.”
율리아가 안주로 말린 건포도를 집어먹었다. 다이애나는 계속 재밌는 얘기 해달라며 율리아의 이야기보따리를 거꾸로 들고 짤짤 흔들었다.
율리아는, 생각하다가.
“있잖아. 세실, 내 옷가게에 온 손님 중에서 네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 하는 작가도 있었어.”
“내 이야기?”
내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응. 세기의 사랑이잖아. 왕세자가 결혼했고, 왕비 닮아 예쁜 3왕자는 옆 나라 황제랑 결혼했고. 그러니까 세상에, 세실. 국보로 간주되는 공작님이 너를 좋아하시니 말이야.”
“그리고 공작님이 약혼하셨고?”
“오, 맞다 세실.”
율리아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미안.”
“그리고 누가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하겠어. 내가 검을 쓰니, 시간이동을 하니, 율리아 너처럼 잘나가는 부티크가 있니? 차라리 카밀리아 이야기를 쓰라고 하겠어, 나는. 카밀리아를 가만 보고 있으면 꼭 잘 쓰인 로맨스 소설 한 편은 보는 것 같아.”
“그런데 일이 정말 잘 풀릴까? 그러니까 그린힐 부부께서…….”
율리아가 다이애나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다이애나가 눈을 내리깔며,
“잘 될거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댔어.”
“그래도 결혼 한 뒤에는…….”
“우리 오빠랑 내가 카밀을 지킬거야. 게다가, 엄마아빠는 영지에서 블루 다이아몬드로 자주 올라오지도 않는다고. 그러니까 이제 예쁜 예비잉꼬부부 응원이나 해달라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때, 조금. 조금 카밀이 부러웠다. 카밀은 딱 그녀와 어울리는 동화속 해피엔딩을 세상에게서 선물받을테니 말이었다.
“그나저나, 세실. 너 바쁘겠네. 다음주 주말에 왕세자비께서 초대하시니 말이야.”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샬롯 베르디게츠가 내 세실이랑 이야기 할 건 뭐고?”
“다이애나, 이제 샬롯은 왕세자비야. 그렇게 부르면 안 돼.”
“그러니까 그 잘나신 샬롯 왕세자비 전하께서 세실이랑 단둘이 할 얘기라는 게 뭐냐고.”
다이애나가 이렇게까지 왕세자비라는 이름에 분노하는 이유는, 현 왕세자비 샬롯 옥스퍼드 베르디게츠가 소녀 시절부터 다이애나의 영혼의 라이벌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론, 둘은 같이 데뷔탕트를 치렀고, 같이 사교계의 정점으로 언급되며, 아직까지도 사교계의 큰 세력의 축을 이루며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사교계의 힘의 논리에선 어느 정도 권력이 보장되면 인기와 부가 순위를 결정하기에 둘이 대립하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리도 없었다.
“그냥 티 파티야. 별 일 아니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왕세자비 전하의 호기심이라던가.”
“그래서 넌 갈 거야?”
다이애나가 종용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새벽이 깊었다.
우리들은 뭐, 남의 집 술이라 부어라 마셔라 했지만 다이애나는 첫 와인 잔을 비운 뒤로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잔뜩 마시고 율리아랑 바닥에 엎어져 있었는데 그때 다이애나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다이애나가 내 앞으로 걸어오는 듯 했다.
“세, 세실리아?”
다이애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엎어져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누가 내 위에 이불만 덮어 논다면야 바닥에서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율리아는 코를 골고 있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율리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때 그녀의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걸음 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실눈을 떠 다이애나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녀는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새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이애나는 창문 바깥으로 새 한 마리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그 새의 다리에는 하얀 종이가 보기좋게 묶여 있었다.
나는 헉, 하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때 다이애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야심한 새벽이었다. 부엉이가 우는 밤이었다.